75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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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 구속구들 다 줬잖아. 또 뭐냐?”
탁자 위에 있던 포도주를 병째 들이켜자 그제야 졸음이 좀 가셨다. 수염에 묻은 술은 늘 그랬듯이 소매로 한번 쓸고 말았다.
“여쭤볼 게 있어서 왔어요. 들어가도 됩니까?”
덜컥 발부터 들일 거면 물어보질 말든가, 포라킨은 머리를 숙이고 들어오며 말했다. 그러고서는 익숙하게 바닥에 주저앉아 도서관에서 가져온 두꺼운 책 하나를 펼쳤다.
“브라우니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다룬 책이 없더라고요. 먹을 것을 받고 집을 지켜 주는 상급 요정이라는 언급 외에는 별다른 건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다위는 심드렁하게 술병을 들고 가 침대가 흔들리도록 엉덩이를 풀썩 눌러 앉혔다.
“상급 요정들이 발에 챌 정도로 많았던 건 ‘혼돈의 시대’ 이전이라고. 그것도 모르면서 학자 나부랭이라고 떠들고 있는 거냐?”
“예전에는 집집마다 브라우니들이 살았다고 했을 정도로 흔했다는 것 정도는 압니다. 그런데 이번에 트라야누스 대원 중에 브라우니의 저주에 걸려서 돌아온 사람이 있어서요.”
그녀의 말에 다위의 눈썹이 조금 움찔했다.
“설마 타라 늪지대에서?”
“예.”
띨띨한 놈! 누군지는 몰라도 욕지거리가 절로 나왔다.
마주쳐 봤자 도망만 가는 집요정들에게 저주라니, 몇백 년 동안 들어 본 적도 없는 터무니없는 일이다.
“그래서, 지금 그 한심한 놈의 저주를 풀겠다고 아침부터 이 다위의 집을 찾아왔단 말이지?”
팔짱을 끼고 비뚜름하게 코웃음을 치는 다위에게 포라킨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심한 놈이 바로 루예요. 다위 님이 직접 별명도 지어 주셨던 ‘까만 콩’ 루요.”
“뭐야?”
아이고 두야. 다위는 이마를 탁! 치고는 고개를 떨궜다.
그 째깐하고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이 언젠가 사고 한번 칠 줄은 알았다만, 하필이면 브라우니의 저주를 받아 올 줄이야.
이전과는 다르게 그가 끙하고 앓는 소리를 내자 포라킨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해주할 방법이 없을까요? 브라우니들은 이미 여관을 버리고 떠나 버려서 소용이 없어졌고, 상급 요정이신 다위 님 외에는 이제 상의할 사람도 없습니다.”
“…신관한테는 가 봤냐?”
신관까지 들먹이는 것을 보니 다위도 별다른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포라킨은 음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좀 전에 알리온 주교님을 뵙고 오는 길입니다만, 마물의 저주도 아니고 요정의 저주는 신성력으로도 어쩔 수가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렇다면 포기해라. 노움이라도 나타나지 않는 이상은 방법이 없어.”
“대지의 요정인 노움이 모습을 드러내서 저주를 풀어 줄 가능성은…….”
당연히 없지. 다위는 쓴 입맛을 다시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요정의 신들은 마물 전쟁 이후로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지. 땅이 오염되고 공기가 혼탁해지면서 그들의 힘도 자연히 약해졌으니.”
하릴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포라킨은 옷에 묻은 쇳가루를 털어 낼 생각도 않고 값비싼 책만 소중히 챙겼다.
포라킨의 축 늘어진 어깨를 본 다위가 불편한 심정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까만 콩한테 밭을 좀 가꾸고 나무도 심으라고 해 봐. 노움이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혹시 또 모르지. 내켜서 도와줄지도.”
“…시도는 해 보겠습니다. 그럼 쉬세요.”
벌써부터 그악스럽게 꽥꽥댈 루를 떠올리면 큰 기대는 접어야 했다.
* * *
팔찌 세 개, 귀걸이 한 개.
신체가 정상 범주로 돌아올 때까지 깨뜨린 장신구의 숫자였다.
지난밤 포라킨이 가져왔던 것과 대장간에 있던 여분의 장신구들까지 합쳐 보니 남은 것은 팔찌, 귀걸이, 반지, 발찌까지 다해서 대략 스무 개쯤 되었다.
[전부 순금으로 만든 것들이라 제법 무겁네요.]
테이블 위로 묵직한 주머니를 내려놓으며 헥토르가 했던 말이다.
마력을 구속하는 쓰임새로 제작된 거라, 일반적인 액세서리보다 크고 두꺼운 편이라고도 덧붙였다.
‘야닉을 가까이서 처음 봤을 때도 액세서리들이 눈에 띄었는데.’
한 주임은 마탑에서 팔짱을 끼고 앉아 있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고 얼굴을 못 본 건 일주일이 채 안 됐건만, 한참이나 지난 것만 같은 묘한 그리움이 일었다.
장신구에서 흡수한 야닉의 마력이 그리움을 재촉하는 것 같았다.
언제나 따스하고 부드러운, 온몸이 녹진하게 흘러내릴 것만 같은 황홀경은 오로지 그에게서만 느낄 수 있었으니까.
머릿속이 맑아진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알리온이나 염 부장에게 받았던 것은 신기할 정도로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그저 갈증이 일었던 목에 물을 붓는 정도의 느낌이랄까.
마시지 않으면 죽을 테니 단순히 생명 유지를 위해 들이켜는 것이라면, 야닉에게 받을 때는 좀 더 뭔가…….
[기분이 너무 좋아서 위험해.]
순간 오두막에서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나 곧바로 안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미쳤나 봐! 혼자 제자리에서 펄쩍 뛴 한 주임은 창문을 열어 얼굴을 식혔다. 그러곤 이내 시무룩해졌다.
“밥은 잘 먹나…….”
객관적으로도 훤칠한 키에 어깨도 무척이나 넓고 탄탄하고 날렵하기까지 한 몸을 가진 야닉이었지만, 2m는 가뿐히 넘는 거인족이 대부분인 용병들 사이에서는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얼굴은 군계일학일지라도 말이다.
매일같이 그를 생각할 때마다 한 주임의 상상 속 그는 점점 더 마르고 야위어만 갔다.
혼잣말까지 하면서 한 주임은 주섬주섬 낡은 외투를 입었다. 누워 있는 동안 미엘라가 터지고 해진 부분에 다른 천을 덧대어 말끔하게 고쳐 준 옷이었다.
‘보기는 좀 그래도 로브보다는 가볍고 활동성도 좋으니까, 뭐.’
저번에 사무실 사람들과 영지 구경을 나갔을 때 옷가게에서 봤던 겨울옷들이 제법 비쌌던 거로 기억하고 있다.
동화도 아니고 은화 단위였던 걸 보면 기십만 원은 훌쩍 넘는다는 말이다.
그녀 기준에서 겨울 외투는 3벌이 마지노선인데, 마침 이 옷을 포함해서 딱 3벌이 되었으니 돈이 절로 굳은 셈이라 제법 만족스러웠다.
한 주임은 부츠 끈을 단단히 동여매고 드디어 본성 밖으로 나갔다. 무려 6일 만에 맡는 바깥 공기였다.
안뜰을 지나 사원까지 정해놓은 코스를 달리는 동안 마주친 사용인들이 하나같이 몸은 괜찮으냐 물었다.
그녀는 부러 힘찬 발성으로 괜찮다고 대꾸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으로부터 안부 인사를 받는다는 것이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기껍게 느껴진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했다.
사람들의 기운을 받아 씩씩하게 오르막길 끝에 달린 사원에 다다르자 멀리서 인영 하나가 서성이는 것이 보였다. 로기아 후작이었다.
한 주임은 저도 모르게 반가운 마음이 들어 얼른 가까이 갔다.
비록 첫 만남에서 로브를 건넸던 손이 시원하게 무시당하긴 했지만 그 후로도 조깅을 할 때마다 종종 그를 마주치곤 했다.
후작은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주문을 외면서 한 주임을 지나쳤고, 그녀는 굴하지 않고 인사를 건넸다.
달리는 내내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던 것으로 심적 단련이 된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영주님. 원정에 따라갔다가 좀 다치는 바람에 며칠 운동을 쉬었어요.”
평소보다 들뜬 마음에 묻지도 않은 근황까지 보고했건만, 오늘도 역시 깡그리 없는 사람 취급이다.
은발의 남자는 아주 잠깐 멈칫하는 듯하다가 재차 발을 놀렸다.
“…한천 구 씨 십 대손 훔리치야도래 훔리함리 사바하. 부디 가엾은 영혼을 살피시고…….”
살짝 섭섭한 마음도 잠시, 안쓰러운 분 앞에서 뭐 어쩌겠나 싶어서 한 주임은 뒷모습을 조금 눈에 담았다가 몸을 돌렸다.
‘머리는 원래 저런 색깔이신 건가? 아니면 하얗게 센 건가? 그렇게 나이가 많아 보이진 않는데. 밝은 데서 보니까 한층 더 하얗네….’
툭툭 내달리던 발이 자연스럽게 멈췄다.
제대로 둘러보니 주위는 벌써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항상 새벽빛이 푸르스름할 적에 만났었는데, 늦잠이라도 잔 건지 환한 아침 햇살 속에서 마주친 모습이 꽤 이질적이었다.
‘…타이밍이 좋았네.’
한 주임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깊이 생각하지 않고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마력이 채워지니 허기가 미친 듯이 몰려든 까닭이었다.
평지에 이르러서는 조깅이 아니라 거의 질주하듯이 뜀박질해서 식당까지 한달음에 도착했다.
누워 있는 동안 멀건 콩죽만 조금씩 넘겼던 터라, 안 그래도 납작했던 배가 움푹 패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복에 달리느라 기력이 달려서 홀의 문도 제대로 못 열자 지나가던 하녀가 대신 열어 주었다. 한 주임은 민망할 틈도 없이 고맙다는 말만 겨우 하고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이렇게까지 맹렬하게 배가 고팠던 적은 다이어트를 처음 시작해서 식사량을 절반으로 뚝 떨어뜨렸던 때 말곤 처음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곳에서는 식사 준비를 스스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기운 없는 몸뚱이로 밥까지 차려 먹을 자신은 도저히 없었다.
“아침부터 뭔 마라톤이라도 했어요?”
자리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데 공 대리가 불쑥 말을 걸어왔다.
한 주임은 사용인이 가져다준 물을 꿀꺽꿀꺽 삼킨 후 도리질했다.
“아니요. 그냥 조깅을 좀….”
김유정과 사귀기로 했다지만 그렇다고 공 대리가 편해진 건 아니었는지 거리감이 맴도는 답변이 절로 튀어나왔다.
홀 안에는 용병대에서 숙소 생활을 하고 있는 이한율을 제외한 운영팀이 전원 모여 있었다.
“좀 살 만해졌다고 이제 인사도 안 하고. 한 주임이 너 말이야. 내가 그때 마력 주고 나서 저녁에 코피를 한 바가지….”
“부장님, 왜 이렇게 흘리면서 드세요!”
갑자기 테이블보를 끌어 올려 염 부장의 입을 짓뭉개듯 문지르는 김유정이었다. 그녀의 인정사정없는 손길에 염 부장의 하관이 거칠게 휩쓸렸다.
“읍! 읍! 야! 김 사원, 뭐 하는 거야! 왜 이래? 아! 발은 또 왜 밟고 난리야?”
눈치를 밥 말아 먹은 염 부장이 귀 옆으로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기까지 했다.
“드디어 미친 거야? 너는 내가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와. 부장님 진짜 강적. 인정. 킹정.”
김유정은 질렸다는 얼굴로 혀를 내둘렀다.
두 사람을 아연하게 바라보던 한 주임의 시야에 박 차장이 비집고 들어왔다.
박 차장은 단박에 이맛살을 구기며 쇠 포크로 접시를 깡깡 내리쳤다. 삽시간에 모든 이의 이목이 박 차장에게로 쏠렸다.
“뭔데? 세 사람 나 모르게 뭐 했어요?”
박 차장은 취조하는 형사처럼 예리한 눈으로 공 대리를 제외한 나머지를 훑고 있었다.
자신만 소외된 뭔가가 있다는 것이 참을 수 없이 불쾌하다는 눈빛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