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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95화 (95/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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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세레나는 여유롭게 한 주임의 주변을 거닐었다.

“편하게 이야기해도 된단다.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어. 나는 델피온 출신이지만 그렇다고 꽉 막힌 사람은 아니라서 남편의 정부를 어찌하겠다는 생각은 없거든. 오히려 사례하고 싶을 정도랄까.”

“……네?”

“내가 없는 동안 그이를 위로해 준 사람이잖니. 고마울 일이지.”

세레나는 노골적으로 한 주임을 비하했다.

제국의 황자가 아무런 배경도 없는 혈혈단신 이방인과 결혼할 리 없다는 강한 확신에서 비롯된 조롱이었다.

야닉이 진심으로 상대했을 리가 없다. 그러니 이런 대접 정도는 충분히 해도 되는 여자다.

“이제 내가 왔으니 아무 쓸모도 없어졌지만.”

그러면서 착실하게 모욕을 주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이방인이니 어느 영지를 가도 환영받을 테고, 너 정도 외모면 다른 귀족 눈에 띌 수도 있겠구나. 어쩌면 이번에는 정부가 아니라 귀부인 자리라도 꿰찰 수 있을지도 몰라. 로엘에는 의외로 멍청한 귀족들이 많거든!”

“하.”

한 주임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얌전히 야닉이 오기만을 기다리려던 결심에 금이 간 모양이다.

그녀는 다소 곤란한 얼굴로 세레나를 내려다보았다.

“실망하게 해 드려서 죄송한데, 그건 안 되겠는데요.”

그러자 세레나는 물론 시에나까지 대번에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한 주임은 두 사람의 눈길을 피하며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그 사람은 주기적으로 분출을 해야 하고…….”

물론 마력을 말이다.

“그걸 받아 낼 수 있는 사람은 제가 유일하거든요.”

세상에 마력을 흡수하는 여자가 저 말고 또 있다면 모를까.

“게다가 저는 이미 그 사람이 없으면 살 수 없는 몸이라서요.”

거짓말은 아니니.

위에서 내려다보니 세레나의 속눈썹이 파르르 진동하는 것이 더욱 잘 보였다.

이제 어떻게 나오려나, 루이자에게 그랬던 것처럼 뺨이라도 올려붙일 셈인가 생각하며 한 주임은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물론 순순히 맞아 줄 생각은 없다. 신장으로 보나 힘으로 보나 세레나는 자신의 적수가 못 되니까.

5년 전 성을 나갈 때는 살이 많이 쪘다고 하더니, 지금의 세레나는 피죽도 못 먹은 사람처럼 볼이 홀쭉하고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은 작고 앙상했다.

좋게 말하면 가녀리고 나쁘게 말하면 한주먹 거리도 안 돼 보였다.

물론 체격 차이로 우월감을 느끼는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쯤은 안다. 그러나 이런 인격적인 모독을 받으면서까지 세레나를 존중하고 싶진 않았다. 먼저 저열하게 나온 쪽은 그녀가 아니던가.

예전이었으면 죄책감에 지레 저자세로 굴었겠지만, 포라킨에게 들은 세레나의 과거로 인해 그럴 마음은 싹 사라졌다.

한 주임은 되레 당당하게 밀고 나갔다.

“제 처분은 황자님이 돌아오면 그분에게 맡기면 될 일이죠. 이제 와서 안주인 노릇을 하려는 뻔뻔한 사람에게 휘둘릴 생각은 없어요.”

그러고는 살짝 고개를 기울여 음산하게 속삭였다.

“그러니 나한테 어떤 명령도, 요구도 하지 마세요.”

무표정에 가까운 세레나의 안면에 분노가 이는 것쯤은 쉽게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

한 주임은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 잿빛 회랑을 빠르게 걸었다. 답답한 심경을 대변하듯 성난 걸음이었다.

세레나에게 한 방 먹여서 유쾌하다기보다는, 조문하러 가는 길에 삿된 마음을 가졌던 것이 몹시도 껄끄러웠다.

그런데 머지않아 뒤에서 둔탁한 발소리가 허둥지둥 저를 쫓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달려오는 시에나를 마주했다.

언제나 푸근하게 웃어 주던 하녀장의 안면에 난감한 기색이 여실히 비쳤다.

“저기, 주임님…….”

“네?”

시에나는 우물쭈물 낯빛을 흐리다가 이내 울상을 지었다.

“공주님께서… 그 옷은 벗어 두고 가라고…….”

“……네?”

한 주임은 황당한 얼굴을 하다가 이내 낙담했다.

거절한다면 빈손으로 돌아갈 시에나가 겪을 고초는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비겁하고 치졸하기까지 한 명령을 받은 시에나는 얼마나 속이 타들어 가겠는가.

한 주임은 도저히 그녀를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가뜩이나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을 텐데, 집사장도 거리낌 없이 때리던 세레나가 하녀장의 눈치를 볼 리가.

판단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즉각 모피를 벗어 시에나에게 넘겨주었다.

“안 주려는 걸 억지로 뺏었다고 하세요.”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그냥 옷일 뿐인데요.”

야닉이 준 소중한 옷이긴 하지만, 이걸 지키려다간 시에나의 뺨이 남아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야닉이 되찾아 주겠지. 주겠지? 주려나? 솔직히 확신은 안 섰다.

“날이 찬데….”

대신에 제가 두르고 있는 망토를 벗으려 하는 시에나를 한사코 말리고 한 주임은 억지로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주춤거리며 기도실로 돌아가는 시에나를 잠시간 지켜보던 그녀는 양팔을 끌어안고 다시 걸었다.

새벽에 서둘러서 나오는 통에도 잠옷 위에 블리오를 껴입은 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든든한 외투가 사라진 자리엔 싸늘한 바람이 대신 몸을 에워쌌다.

속에선 천불이 끓는데, 몸은 착실하게 식어 갔다.

한 주임은 이를 딱딱 부딪치며 얼마쯤 걷다가 마주친 사제에게 길을 물어 자로가 있는 곳을 찾았다.

기도실과 다를 바 없는 냉랭한 공간에는 플라타너스 잎에 둘러싸인 자그만 옹기가 나무 선반 위에 고요히 놓여 있었다. 자로는 그 작은 항아리 안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주임은 천천히 계단을 올라 옹기 앞에 금화 한 개를 내려놓았다.

잠깐의 침묵 끝에 그녀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노잣돈이에요.”

그녀는 조금 망설이다가 자신 없는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여기서도 황천길을 건너는지는 모르겠는데…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데 잘 쓰셨으면 좋겠어요.”

눈앞이 괜히 흐려지는 것을 소매 춤으로 벅벅 문질렀다.

“제가 장례식장을 가 본 적이 없어서, 이런 것밖에는 잘 몰라서…….”

점점 잠기는 목소리를 힘겹게 가다듬고 부러 밝은 목소리를 내었다.

“좀 더 많이 찾아뵙고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았을 텐데, 죄송하고 또 고맙습니다. 좋은 곳에 가셔서 편안히 쉬셨으면 좋겠어요. 종교는 딱히 없지만… 그래도 기도할게요.”

깊게 머리를 숙여 마지막 인사를 건넨 뒤 그녀는 문을 나섰다.

밖을 나오자마자 매서운 바람이 머리칼을 쓸고 지나간다. 아무래도 본성까지 부단히 달려서 땀을 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짧은 한숨 뒤에 돌아갈 준비를 하는데 발치에 무언가 툭 걸렸다.

“…?”

그녀는 아래를 내려다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회백색 바닥 위에 곱게 접힌 로브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까 마주친 사제가 제 차림새를 보고 화들짝 놀라더니 고새 옷을 가져다준 건가 싶어, 그녀는 망설임 없이 로브를 주워 입었다.

* * *

라이칸스로프의 털로 만든 눈부신 모피를 입고 기세등등하게 본성으로 돌아온 세레나는 곧장 식당으로 걸음 했다.

사용인들 가운데 그 옷의 원주인이 누군지 모르는 이가 없건만, 그녀는 뻔뻔하게 시선을 받아 내며 상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먹을 것을 내오지 않고 뭘 하는 거야!”

서슬 퍼런 호령에 눈치만 보던 식당 하인들이 허겁지겁 주방으로 달렸다.

세레나는 그 모습을 언짢은 눈으로 노려보다가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아무래도 조만간 사용인들을 죄다 불러세워서 이 성의 안주인이 돌아왔다는 것을 확실하게 각인시켜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본성에 머무는 운영팀은 지금 브레고와 함께 도로 정리에 나갔고, 아침은 간단하게 먹는 한 주임이기에 본성 주방엔 미처 준비된 요리가 없었다.

갑작스러운 세레나의 등장에 사용인들은 불붙은 망아지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빵을 굽고, 닭을 잡고, 햄을 잘랐다.

벌써 족히 3인분은 되는 양을 전부 먹어 치운 그녀는 마치 걸신이라도 들린 사람 같았다.

테이블 위로 올라오는 음식마다 손을 뻗어 입 안에 욱여넣는 장면은 세레나를 기억하고 있던 사용인들에게도 낯선 광경이었다.

극도로 폐쇄된 종교의식을 가지고 있는 델피온에서는 포크가 악마의 삼지창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왕족이라도 맨손으로 식사를 했다.

5년 전 레비탄으로 시집온 세레나는 모국의 관습을 버리고 제국 귀족처럼 식기를 사용했었다. 델피온에서부터 연습을 했는지 손동작은 제법 우아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현재 그녀가 식사하는 모습은, 왕족은커녕 거리의 부랑자나 다를 바가 없었다.

멀쩡히 놓인 스푼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릇째 수프를 후루룩 마시고, 양손으로 살코기를 찢어 입에 넣고, 손가락에 묻은 기름을 쪽쪽 빨아먹기까지 하면서도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쾅 쳐 댔다.

“버터를 잔뜩 바르고 구운 파이를 가져와! 설탕이 듬뿍 들어간 홍차도!”

우물거리면서도 끊임없이 다른 음식을 요구하는 세레나를 망측하게 바라보던 시에나는 차라리 눈을 돌렸다.

때마침 세레나가 그녀를 향해 다른 명령을 내렸다.

“가서 집사장을 불러와.”

시에나는 곧바로 허리를 굽힌 뒤 식당을 빠져나왔다. 게걸스럽게 식사를 하는 모습을 계속 보고 있을 바에야 차라리 심부름이 나았다.

아침부터 호출을 당한 루이자는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고 반듯한 자세로 테이블 옆으로 가서 섰다. 마물이라도 휩쓸고 지나간 것 같은 테이블을 보고 있자니 절로 속이 울렁거렸다.

그사이 식사를 마친 세레나가 언제 그랬냐는 듯 리넨으로 입가를 닦으며 얌전을 떨었다.

“율리안을 데리러 갈 사람은 보냈나?”

“어제 바로 국경 위병소로 전서구를 날렸습니다. 마침 그곳에 트라야누스 용병단이 파견을 나가 있으니 그들이 모셔 올 겁니다. 로엘과 가깝기도 하고요.”

고저 없는 답변에 세레나의 얼굴이 대번에 험악해졌다.

“내 아들을 데리러 가는데 야만족 무리를 보냈다고?”

“파견대 수장은 귀족입니다. 브레고 엘다라는 자로, 제국의 백작 가문이죠.”

“흐음. 귀족이 용병 짓거리라니… 별 미친놈을 다 보겠구나.”

슬그머니 음성이 누그러지는 것을 보고 루이자는 속으로 비웃음을 삼켰다. 그러다가 문득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공주님 말투가 원래 저랬었나? 사용하는 단어들이 뭔가 저속해진 것 같은….’

“아, 그리고.”

차를 물처럼 꿀꺽꿀꺽 삼키던 세레나가 탁 소리가 나게 잔을 내려놓았다.

“이방인들이 쓰고 있는 방을 비워. 보수해서 율리안의 침실과 놀이방, 공부방, 옷방으로 전부 꾸며야겠어.”

“……예?”

“가구, 벽지, 물건들 전부 황실 후손에게 어울릴 만한 격식을 갖춰야 해. 고급품을 취급하는 상단들을 성으로 부르렴. 아! 물론 재단사도.”

순간 시간이라도 역행해서 5년 전으로 돌아온 것만 같은 착각이 일어 루이자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건 불가합니다. 새로 온 이방인들은 임시 기간 동안 본성에 기거한 후 거처를 지정하라는 황자님의 명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세레나라도 야닉의 명령에 반할 수는 없는 법이다.

찻물이라도 냅다 뿌릴 줄 알았던 세레나는 다행히 그 정도 인식은 있는지 그러쥔 주먹만 잘게 떨었다.

루이자는 그녀가 오늘 아침에 한 주임의 옷을 빼앗았다는 시에나의 한탄을 상기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재단사는 부르겠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대부분 나눠 줘서 공주님의 옷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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