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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탄 제국의 최북단과 로엘 왕국의 동북부 지역은 육로가 개방된 지 10년이 채 안 되었다.
로엘의 동북부 해안은 제국이 북부 땅을 내버려 둔 사이 무단으로 점령하여 자국령으로 삼았기에 역사적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이방인 소환의 실마리를 찾고자 고대 문명지인 아크만을 찾은 오웬 1세는 이참에 바닷길을 되찾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무신 로기아 가문에 군대를 내어 주고 북해를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매서운 추위와 몰려드는 마물로 있는 병력마저 줄어드는 와중에 전쟁까지 불사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황실에 추가 병력을 요구하면 취발론 산맥을 넘다가 죽거나 행방불명되는 이가 많아, 군인들은 북부 출정을 곧 사형선고로 받아들였다.
해상 교역을 노리고 사병과 물자를 지원하던 타지의 제후들도 막심한 손실을 겪은 뒤론 하나둘씩 떨어져 나갔다.
그러는 사이 황실의 마법사들이 소환진을 완성해 이방인 소환에 성공하고, 아크만은 또다시 제국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된다.
북부에 버려진 충성스러운 로기아 가문만이 변경백의 명목만 유지한 채 묵묵히 아크만을 지켰다.
그리고 마침내 테오도르 로기아가 가주가 되었을 때, 그는 남아 있는 소수의 영지민들을 위해 아크만을 부흥시키리라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고, 마물 재료나 아크만 특산물을 사 줄 대상이 필요했다.
인근에 위치한 델피온 왕국은 거래 제약이 많고 부유하지 않아 부적절. 그렇다면 남은 것은 서쪽의 로엘 왕국뿐이다.
이때의 제국은 황비 내전을 막 끝내고 어수선한 분위기였던지라 무관심에 가까운 허가가 떨어졌다. 로기아 후작은 지체하지 않고 오랜 냉전을 끝내고 육로를 개방하자는 협상을 로엘에 제안했다.
그의 계획은 제국의 3황자, 야닉 리버스가 아크만에 온 뒤로 더욱 활기를 띠었다.
오자마자 돌연 열병을 앓더니 혼자서 수십, 수백 마리의 마물을 상대할 수 있는 마력을 가지게 된 황자는 그야말로 영지에 엄청난 전력이 되었다.
심지어 그는 머리까지 비상했다. 로기아 후작이 가르치고 알려 주는 모든 것들을 물을 빨아들이는 솜뭉치처럼 습득해 나갔다.
후작이 구상하면 야닉이 살을 붙여 실행에 옮겼다. 두 사람의 호흡은 척척 맞아떨어졌다.
황실에서 버림받다시피 한 3황자는 가장 먼저 숲에 살던 야인들을 제 수족으로 만들고 용병단을 창설해 병력을 키워 나갔다.
영지는 두 사람이 이방인들을 데려오면서부터 점점 더 커지고, 북적대고, 활기를 띠며, 또한 부유해졌다.
야닉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멸족에 가까웠던 드워프까지 찾아내 아크만으로 끌어들였다. 그런 다음 드워프가 만든 무기를 사람들에게 쥐여 주고 훈련을 시켜 마물에 대항하게 했다. 모자란 병력을 영지 자유민으로 충당한 것이다.
영지에 수비군이 정착되자 야닉이 이끄는 용병단은 압도적인 무력을 자랑하며 버려진 땅들을 수복해 나갔다.
오랜 분쟁지역이었던 국경은 두 사람에 의해 그렇게 개간되고, 두 나라를 잇는 어엿한 통행로가 된다.
이 길을 두고 몇몇 이방인들은 아크만의 ‘실크로드’라 명명하며 우스갯소리를 주고받았다.
편편한 포석이 깔린 길 위로 상단들의 짐마차가 줄지어 오가고, 고급 트로이카 마차 한 대가 그 사이를 매끄럽게 굴렀다.
로엘에서 대여한 귀족 전용 마차 안에는 낡은 로브를 입고 있는 아이와 어른 한 명이 마주 앉아 있었다.
커튼을 모두 내린 어두침침한 마차 안에서도 두 사람은 후드를 깊이 눌러 쓴 채였다.
남자는 커튼을 조금 열어 한 움큼 가까워진 절벽 위 첨탑을 확인한 뒤 아이를 향해 엄중하게 물었다.
“잊지 않았겠지, 율리안? 거기 가면 나를 어떻게 불러야 한다고?”
“아버지…가 아니라, 사미 경이요.”
아이는 눈치를 보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남자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더니 다음 질문을 이어 나갔다.
“좋아. 그다음. 네 이름이 뭐지?”
“율리안. 율리안 리버스요.”
“부모님 이름은?”
“어머니는 세레나 리버스. 아버지는 사미…가 아니라 어, 어…….”
율리안이 입을 벌리고 눈을 굴렸다. 그러자 사미 크랩턴이 커다란 손으로 아이의 턱을 거칠게 붙잡고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며칠이나 연습했잖아. 아직도 이름 하나 못 외운 거야?”
아이를 상대로 한껏 무자비한 음성에 율리안의 얼굴이 금세 공포로 뒤덮였다.
“…야, 야닉 리버스요! 아버지 이름은 야닉 리버스예요!”
“쉿! 목소리가 너무 크잖아!”
사미 크랩턴이 형형하게 안광을 빛내며 율리안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 우악스러운 손길에 율리안의 작은 입과 코가 마구 짓눌렸다.
“이봐, 안에 괜찮은 건가?”
곧바로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지면서 누군가 마차 유리를 톡톡 두들겼다.
사미 크랩턴은 다른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고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한 뒤 천천히 손을 떼어 냈다.
“아무 문제 없소!”
큰 소리로 대답하는 통에 앞에서 말을 몰던 김유정이 날카롭게 뒤를 돌아봤다. 그녀는 제 자리로 돌아오는 브레고를 향해 얼른 손을 흔들었다.
“브레고 경! 잠깐만요!”
마차를 대충 확인하고 돌아온 브레고가 김유정 옆에 바짝 말을 붙였다. 김유정은 도끼눈을 뜨고 마차를 노려보다가 잽싸게 물었다.
“저 안에 있는 애가 진짜로 황자님 아들이에요? 진짜 친아들이요?”
“글쎄요. 아마 맞지 않을까요? 왕녀가 만삭일 때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시기를 보면 애 나이가 얼추 맞는데.”
브레고는 대수롭지 않게 턱을 긁적거렸다.
“얼굴은 왕녀랑 판박이라 잘 모르겠고, 일단 머리가 대장님이랑 똑같이 까맣잖아요. 뭘 칠한 흔적도 없고.”
“아니이. 제일 중요한 눈동자가 금색이 아니잖아요!”
김유정이 답답한 제 가슴을 쿵쿵 치며 항변했으나 혹여 마차에 들릴까 한껏 낮춘 음성이었다.
궁에서 마주쳤던 황자, 황녀들은 얼굴이나 머리카락 색은 달라도 하나같이 일관된 금안이었다. 그러나 지금 마차에 타고 있는 아이의 눈동자는 노랑 비슷하기는커녕 오히려 바다에 가까운 파란색이 아니던가.
온갖 의심으로 점철된 김유정과는 달리 브레고는 대수롭지 않은 반응이었다.
그는 건틀릿을 낀 손을 들어 제 눈가를 톡톡 건드렸다.
“모르셨구나. 황족들도 어릴 때는 평범한 색이에요. 그러다가 열 살 전후로 홍채가 황금색으로 바뀌고요.”
전혀 비밀이 아니라는 듯이 일상적인 크기로 말하는 통에 근처에 있던 모든 트라야누스 대원들이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제국 출신 용병들은 모두 상식적으로 알고 있던 것인지 운영팀만 새삼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브레고는 들고 있던 손 그대로 시린 코를 훌쩍이다가 설명을 덧붙였다.
“황가의 시조가 반신(半神)이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보통 사람들이랑은 사알짝 다른 점이 있죠. 자라면서 눈이 노래진다든가, 기본적으로 백 년은 넘게 산다든가.”
“그러면 저 애가 황자님의 친자식이 맞는지 알려면 몇 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는 거네요?”
반대편에 있던 박 차장이 눈을 반짝이며 끼어들었다.
어쩐지 밋밋했던 일상에 재밌는 건수라도 하나 잡은 듯한 쾌활한 음성이다. 한껏 들뜬 그녀의 말에 앞에서 말을 몰던 염 부장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나마 다행이네. 여기서 유전자 검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쨌든 친자 확인은 되는 거니까.”
“와. 한 주임한테 올인한 내 주식은 어떻게 되는 거야, 그러면? 이대로면 우리 완전 나가리 되는 거 아니야?”
공 대리가 예? 예? 하면서 동료들의 공감을 끌어내는 동안, 선두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이한율은 홀로 산뜻한 표정으로 말 옆구리를 걷어찼다.
“얼른 성으로 돌아가죠!”
* * *
드넓은 홀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좌우로 늘어선 사용인들의 낱낱에서는 세레나가 돌아왔을 때 비쳤던 당혹감과는 다른 오묘한 기색이 스쳤다.
그들은 본성에 들어선 율리안의 얼굴을 곁눈질로 흘끔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무언의 신호를 주고받는 것 같았다. 호기심과 의심, 염려와 낙담이 고요히 교차했다.
루이자의 만류에도 고집스레 밖으로 나온 한 주임은 운영팀과 인사를 나눌 생각도 못 하고 율리안에게 지긋한 시선을 꽂았다.
그녀는 다른 하녀들과 마찬가지로 집요한 눈으로 율리안의 눈코입을 하나씩 뜯어 보면서 그 안에 야닉의 얼굴이 있는지 집중하고 있었다.
포라킨의 언질도 있었고 세레나의 행보도 그렇고, 머리로는 아닐 거라 믿으면서도 내심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율리안은 다섯 살치고는 키가 조금 작고 마른 편이었다.
세레나를 닮아 푸른 눈에 각진 코는 율리안이 그녀의 친아들이라는 데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딱 하나,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것 말고는 아이와 야닉이 닮은 구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한 주임은 약간의 안도감을 느끼며 율리안의 옆에 서 있는 호리호리한 체격의 남자에게 눈을 돌렸다.
남자는 건들거리는 자세로 제 기억보다 훨씬 더 화려해진 성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는 중이었다.
몇 군데 올이 나간 녹슨 호버크에 마디마디가 하얗게 닳은 가죽 장갑, 끝이 찌그러진 철 구두는 기사라기보다는 꼭 자유 용병처럼 보였다.
헝클어진 단발머리를 하고 있던 그의 머리카락은 검은색이 아닌 나무껍질 같은 고동색에 가까웠다. 율리안과 같은 흑발이 아니다.
한 주임은 입술 안쪽을 잘근거리면서 불안한 눈으로 두 사람을 응시했다.
이윽고 세레나가 중앙 계단을 총총걸음으로 내려오며 소리쳤다.
“율리안! 내 아들!”
“어머니!”
율리안이 얼른 달려가 세레나에게 폭 안겼다.
모르는 이가 봤다면 감격의 모자 상봉 순간이었겠지만 운영팀과 본성 사람들은 하나같이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아까부터 내내 웃음을 머금고 있는 이한율을 제외하고.
세레나는 부단하게 율리안의 얼굴 이곳저곳을 매만지며 질문을 퍼부었다.
“오는 길은 불편하지 않았니? 식사는? 용병들이 무례하게 굴지는 않았고?”
“이봐요, 왕녀님.”
그녀의 말이 심기가 거슬렸는지 심드렁하게 있던 브레고가 귀를 후비적거리며 걸어 나왔다.
동시에 사미 크랩턴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고 보란 듯이 앞을 막아선다.
이 빠진 날을 저에게 겨누고 있는 황당하기까지 한 광경에 브레고가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집에 찾아가서 귀족 마차를 빌려 대령한 것도 우리고, 사흘 밤낮은 굶은 것 같은 애한테 밥을 사 먹인 것도 다 우리예요. 무례라고? 나 참, 살면서 이렇게 황당한 취급은 또 처음이군.”
“말조심하세요, 브레고 엘다 경. 율리안은 황손이에요!”
세레나가 율리안을 끌어안으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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