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화 〉히로인은 싫어(1) (1/115)



〈 1화 〉히로인은 싫어(1)

“아.”

눈을 뜨자마자 내뱉는 건, 의문 섞인 목소리.  나는 눈을 뜨고 있는 걸까. 애초에 잠을 자려고 누운 것도, 뭘 하다가 쓰러진 것도 아닌데.

잠에서  깨어난  몽롱한 정신, 잠을 자지도 않았건만. 왜 이런 느낌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관자놀이를 꾹 누르고, 정신이 돌아오자 비로소 방금 들은 목소리의 이상이 있음을 깨닫는다. 가늘고, 맑고, 청아하다. 듣다보면 중독될 것만 같은 달콤한 미성. 허나- 그게 왜 내 목에서 나오고 있는 지는 설명이...필요할 것 같다.



“아아.”

다시 입을 열었다. 굵은 목소리가 나오도록 성대를 깔았음에도 불구하고, 들리는 목소리는 한없이 가벼웠다.

“자, 잠깐만...”



어째선지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을 들춰내며, 내 몸을 눈에 담았다. 봉긋이 솟아오른 가슴이 눈에 띄었다. 말캉- 살짝 누르자 기분 좋은 감촉이 전해져 왔다. 돌핀 팬츠를 입어 드러난 새하얀 다리. 매끈하고 얇은 그 다리를 바라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씨발.”

이게  일이래.



#


소설이 있었다. 왕도적인 학원물 배경을 따라가는, 흔하디 흔한 소설. 강력한 힘을 지닌 주인공이 아카데미의 꼭대기에 올라서고, 동료들과 함께 빌런을 퇴치하는 그런 소설.

“이게  인기가 없지?”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리 소재가 흔하다 못해 길바닥에 치인다고 해도, 왕도적인  나름의 맛이 있는 법이다. 괜히 정석이겠는가, 대충 써도 맛있으니까!


하지만 불운하게도,  소설이 재밌던 것은 나뿐이었나 보다.






[작가입니다...]

낯이 익은 공지 제목을 보자마자 알아차렸다. 이 소설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구나, 하고. 200화 넘게 무료로, 그것도  혼자만 보는 소설을 연재해주었다는 것이 고맙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걸 완결까지 쓰라고 하기도 미안했다.

작가도 살아야지, 완결을 못 보는 건 아쉽긴 했지만 이해하기로 했다.


다만 이해할 수 없는 건 공지의 내용이었다.


[이 작품을 봐주신 단 한 분의 독자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이 살짝 뭉클해진다고 해야 하나. 비록 나 하나 보는 소설이었지만, 작가가 이렇게 기억해주는 건 여간 뿌듯한 일이 아니다. 다음 글도 봐줄테니까 어서 쓰라구.

[그리고 감사의 의미로, 선물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선물?”


기포티콘이라도 주는 건가, 대수롭지 않게 아래에 있는 링크를 클릭했을 때, 화면에 나타난 건 까만 화면이었다. 마치 그걸 보고 있는 나를빨아들일 것만 같은, 검은 색의 화면. 어둡고, 캄캄하고, 티끌하나 없이 칠흑을 내비치는 그 화면은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고.

툭-


아무런 전조 없이 의식을 잃었다.

"...근데 이게 뭐냐고."



눈을 떴을 때 나는 여자가 되어 있었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생생한 꿈을 꿀만큼 내가 자각몽에 익숙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예전에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기껏해야 몇  시도한  끝.



엄연한 현실이란 것을 자각했을 때, 돌아오는 충격은 의외로 크지 않았다.


소설의 공지를 보고, 눈을 감았다가 뜨자 잃은 게 한두 가지인가?  성기도 그렇고, 남성성도 그렇고, 집도, 전부 뒤바뀌었다. 어쩌면 너무 확 변한 나머지 놀라는 것을 까먹은 걸지도 모르겠다.

하도 바뀐 게 많아서 그저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멍하니 주변을 둘러봤다.



난생 처음 보는 집, 하지만 내가 전에 살던 곳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충 어딘가 나사가 하나씩 빠져있는 가구하며, 척봐도 풍족하지 않은, 가난한 소시민의 전형적인 단칸방. 방을 보고 알 수 있는 것은- 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건 나랑 비슷하네.”



가뜩이나 좁은 집을 어지럽히다보면, 정신까지 어질어질해지곤 했으니까. 깔끔한 성격은 아니더라도 청소 자체는 자주 했다. 가난한 살림, 자취, 깔끔히 정돈된 집안. 여기까지 봤을 때 무언가 크게 달라졌나, 하는  없었지만.


말캉-


“씨발...”

...여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더럽게 크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항상 상상만 하던 일이었다. 즐겨 보는 소설에서 나오듯, 남자였던 사람이 은발의 14세 미소녀가 되어 인방으로 돈을 쓸어 담는다던지. 러시아에서 환생해 피아노천재가 되어 허스키와 뜨거운 사랑을 나눈다던지.


책임 없는 쾌락!



어차피 내게 일어날 일도 아니니까그냥 즐겼다. 그런데 씨발, 내가 여자가 될 줄이야. 이래선 즐길 수가 없다. 인생을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했던가. 초근접 거리에서 TS를 직관, 아니 체험하게 된 내가 이걸 어떻게 즐기겠는가.

“존나 비극이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늘어져 있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내가 누군지-여기가 무슨 세상인지 정도는 알아야 하니까.



“거울이...”



거울을 찾았다.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다. 기본적으로 미소녀가 된다는 TS공식이 이번에도 통했기를 빌면서, 화장실 문을 열었다.


벌컥-


“...!”

흐익, 내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거울에는  소녀가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입을 자연스레 한손으로 가리며, 허나 그럼에도 그 미모는  숨겨지지 않았다. 길게 늘어진 백금발이 빛을 발했다.붉게 타오르는 석양과 같은 눈동자와 마주한다.


“아, 아니. 잠시만.”

수려하다, 단순히 그런 표현으로는 도저히 감당 불가능한 외모였다. 내가 남자였던 시절에 얼굴을 쳐다봤다면 아마 평생을 잊지 못했을 만큼. 허나 그것보다 놀라운 건, 이 얼굴이 익숙하다는 것이었다.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는, 그녀의 능력과는 상반된 색이었다.
-겨울,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그 차가운 절경에서-백금발이 휘날렸다.
-언뜻 보면 인형을 연상케할 만큼 그녀의 피부는 새하얗다 못해 창백할 지경이었다. 햇빛을 자주 보지 않는 걸까?

“...아이샤.”

야이샤 이리안, 내가 아는- 내가 보던 소설에 나오던 여자. 어떠한 의심의 여지없이, 나는그녀와 너무나도 똑같았다. 그렇다면 나는 소설 속에 빙의된 건가? 그것도 아이샤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나를 괴롭게 만드는 것은,

아이샤가 메인 히로인이라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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