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히로인은 싫어(2)
"아아악..."
뒤늦게 깨달은 사실에 뒷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 눈 앞이 핑하고 돌았다.
히로인, 그것도 메인 히로인이라니.
그렇다면 내가 이 소설의 주인공하고 그...연애를 해야한다는 건가?
"말도 안되지."
여자의 몸을 가지긴 했지만 나는 남자다. 어떻게 남자랑 사귄단 말인가? 차라리 그럴 바엔 혀 깨물고 죽지.
...그렇다 해도, 메인 히로인이라는 포지션은 그저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특히 여타 하렘물과는 달리
아이샤는 비중이 크다 못해 더블주인공 수준 이었으니까.
이름만 하렘이지 사실 순애물이 아니냐- 라는 생각이 들 만큼.
그만큼 박힐 플래그도 많다는 얘기다. 히로인 자리에서 벗어나려면 이런 플래그들을 모조리 피해야 할텐데, 어떻게 해야할까.
지끈 거리며 아파오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나는 거실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오늘이 며칠이지? 아카데미 입학은 했나? 아니, 어쩌면 원작 시작보다 한참 전인가?
사소한 정보라도 좋았다. 뭐라도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띠링-]
그렇게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주머니에서 알림음이 들려왔다.
손을 넣자 잡히는 건 처음보는 파란색의 플라스틱 상자였다. 손으로 쥐면 전부 담기는 작은 크기의 박스.
뒤집어보니 마치 스마트폰 처럼 작은 화면에 시계모양의 아이콘이 떠있었다.
...이게 뭐더라.
스마트폰이 차라리 나을 것 같은데, 이런 조그마한 걸로 뭘 할 수 있을까 싶다.
그나저나 시계모양이면 알람인건가?
대충 화면을 두어번 두드리니 시계모양이 사라지며 그 위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알림입니다. 앞으로 약 1시간 뒤 입학식이 시작되오니 준비를 시작해주십시오.
입학식이라, 아무래도 내가 빙의한 시점은 스토리가 막 시작할 때 즈음 같았다. 주인공의 이야기가 입학식날 시작되니까.
"1시간..."
뭔가 계획을 세우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아마 아카데미 위치 찾는데에만 시간을 꽤 쓸 것 같은데. 교복부터 찾아입는 게 먼저겠지.
#
"흐엑."
교복을 찾자마자 괴이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아이샤의 성별은 여자, 그렇다면 교복또한 여자 교복.
여자 교복이면...역시 치마가 있을 터.
굳건히 내면 속에 자리잡고 있던 남성성이 한 번 크게 흔들렸다. 여자가 된지 이제 고작 10분 지났을 뿐인데...!
치마를 입어야 한다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에 교복을 쥔 내 손이 파르르 떨렸다.
이 무슨 횡포...!
심지어 치마뿐만 아니라 흰 색의 스타킹도 있었다. 일러스트로 볼 때는 좋다고 봤지만, 막상 직접 입어야 한다니...
"하아..."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카데미의 복장 규정은 꽤나 엄격한 편이었으니까. 첫날부터 교복을 입고 가지 않았다가는, 바로 퇴학당할 지도 모른다.
아이샤가 뭐 좋은 가문을 가진 것도 아니고, 딱 가난한 소시민이었으니까. 부모도 없고...그렇다고 든든한 뒷배경이 있는 것도 아니니, 실력을 입증하기 전까지는 적당히 사려야 했다.
눈 꼭 감고 입자, 나중에 바지를 사자...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스타킹을 끌어올렸다.
살과 맞닿는 차가운 감촉에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양말과 비슷하다 해야 하나, 매끈한 피부를 흝고 올라가는 스타킹의 감각은 묘했다.
괜한 죄책감도 들고, 이제 여자니까 정말 쓸데없는 감정이긴 하지만...
"어디까지 올라가는 거야?"
평생 양말만 신다가 스타킹을 신었더니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았다. 무릎까지 올라오다니, 익숙치 않은 감각 탓에 불편하기 그지 없었다.
자주 신으면 익숙해지긴 하겠지만. 별로 익숙해지고 싶은 감각은 아닌데.
"...이쁘긴 하네."
교복을 입고, 거울을 바라보자 아이샤 일러스트를 그대로 박아 놓은 듯한 모습이 보였다.
흰색의 블라우스, 거기에 검은 색의 넥타이와 마이, 검정 체크가 박혀있는 치마 등 수수한 디자인 이었지만, 아이샤의 얼굴은 그마저도 참 잘 소화해 내었다.
"너무 짧은 거 아냐?"
치마를 살짝 들어올리자 허벅지가 그대로 드러났다. 흰색의 스타킹 위에 걸쳐진 치마, 무릎이 훤히 보여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도 허전하고, 걸을 때마다 밑으로 바람이 들어와서 더럽게 신경쓰였다.
아아, 시선. 예전부터 시선이 쏠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당장 이 모습으로 나가면 아마 시선이 쏠리다 못해 이쪽으로 집중되지 않을까.
"...모르겠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살아나가려면 시선은 자연스레 따라올테니, 거기에 적응해야 하기도 하고.
빙의된 게 이쪽 세상이라 다행일 따름이었다. 뭐 막장 아포칼립스 세계나, 게이트가 열려 멸망 직전의 세계도 아니고. 간혹 나타나는 빌런을 제압하면 되는, 그 정도의 세상이니까.
뭐...이제 스토리가 시작되는 지금부터는 그 빌런들의 강도가 조금 세지기야 한다만, 그래도 아예 파멸적인 세계관에 비해서는 훨씬 안정적이고 살만한 세상이었다.
'이능', 모든 사람은 각자의 이능을 지니고 태어난다. 그 강도나, 능력의 형태 같은 것들은 부모의 영향을 크게 받지만 간혹 돌연변이가 나타나곤 했다.
사회 전반적으로 이능중심의 사회가 이뤄지고, 간혹 자신의 이능을 순수한 선의로 돌려 사람들을 지키는 '히어로'가 되거나, 아니면 비틀린 악의를 사람들에게 겨누는 '빌런'이 된다.
아이샤는 히어로 지망생이었다.
그래서 아카데미에 다니고, 입학식에서 주인공과 만나 인연을 다지며 빌런과 맞선다.
이정도가 이 세계의 대략적인 세계관이었고...확실히, 그리 위험하지 않다는 점은 맘에 들었다.
매 순간이 목숨과 직결하는 상황보다야 훨씬 낫지 않은가.
단지 주인공과 엮이지 않겠다는 간단한 목표만 생각하면 되니까.
주먹을 살짝 쥐었다가 펼쳐보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작은 얼음 결정이 피어났다. 여섯 개의 방향으로 피어나는 눈꽃. 따듯한 숨결대신, 당장이라도 얼어붙을 만큼 차가운 숨결이 내뱉어졌다.
"...이제야 조금 체감이 되네."
원래 내가 살던 세상이었다면, 아마 당장 어디론가 끌려가 인체 실험을 받지 않았을까.
이능을 쓰는 감각은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숨을 쉬듯, 주먹을 쥐듯, 걸음을 걷듯 너무나도 당연한 감각. 그저 머릿속으로 형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능은 그 상상을 가능케 했다.
"흐아..."
어째 힘이 쭈욱 빠진다. 입학식까지는 앞으로 30분, 슬슬 출발하긴 해야되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카데미에 도착하면 보게 될 주인공 때문일까. 운명처럼 엮일지도 모른다. 첫눈에 반한다- 라는 웃기지도 않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래도...그렇게 둘 순 없지.
'피하자, 반드시.'
주먹을 불끈 쥐며, 속으로 다짐했다.
나는, 히로인이 되지 않는다.
오직, 나를 위해 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