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상처 주는 건 싫어(5)
방금까지 심각한 표정을 짓던 녀석이 어디 갔는지, 제논은 밝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했던 말을 그렇게나 신경 쓰고 있었던 걸까. 사실 마음이 그리 편치는 않았는데. 뭐, 울상을 짓고 있는 것보다 나으니...좋게 생각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사실 꽤 신경쓰이기도 했고, 전개를 뒤틀려고 한 행동이었지만, 남에게 상처 주면서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보니 요 며칠 꽁해있었던 게 내가 한 말 때문인 게 확실해 보였다.
...원래 저런 성격이었을까.
원작에서도 남의 말에 휘둘리며 삐치거나, 토라지거나 하진 않았는데. 뭔가 조금 유치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살짝색다른 것 같기도 했다. 뭐 때문에 달라진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나저나,
저 하늘 위에 떠 있는 여자. 헤라 카르멘은 내가 만들어낸 요르문간드를 열심히 부수고 있었다. 시간 벌이용도로 만들어 제 위력을 채 못 내긴 하더라도...너무 잘 부수는 거 아냐? 물을 다루는 이능, 어쩌면 나와비슷하다고 볼 수 있었지만 당장 낼 수 있는 위력은 꽤 차이가 났다.
“흐으...”
일어서려 해도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요지부동인 다리를 보며 끙끙거리기를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고개를 들자 제논이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왜 그래?”
“...다리 다쳤어?”
“아니, 그냥 힘이 안 들어가. 무리했나 봐.”
“...미안해.”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모르겠네. 다시금 침울해진 녀석의 얼굴은 뒤로 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를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았다. 요르문간드가 어떻게 잘 버텨주고 있긴 하지만, 그것도 이제 얼마 못 버틸 것 같고. 그럼 방법은 여길 뜨는 건데...
날 죽이겠다는 사람이 과연 순순히 보내줄까.
시선이 끌린 사이에 어떻게 몸을 피하는 거야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움직일 수가 없으니. 불만스러운 나머지 볼을 부풀리며 제논을 바라봤다. 이제는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헤라 카르멘을 살피는 녀석.
중간에 한 번 싸우기라도 했는지 여기저기 긁혀있긴 했지만...그래도 걷거나 뛰는데에는 무리가 없어보였다.
콰가강-
요르문간드의 몸체가 조금 씩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애초에 시간 벌이,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꺼낸 건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빨리 무너지는 걸 바라보는 내 표정이 딱딱히 굳었다. 도망치려면 지금, 당장 도망쳐야겠지.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쉰 뒤, 난 제논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최대한, 진지한 얼굴로. 내 얼굴을 바라보던 제논이 무언가 심각한 얘기가 나올 것임을 짐작했는지 얼굴을 굳혔다.
“제논.”
“듣고 있어.”
“업어줘.”
“...뭐?”
쪽팔리긴 했지만, 당장 방법은 이것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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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조- 좀만 천천히 가!”
“......”
이제 소리 질러도 대답을 안 하네. 붉게 달아오르다 못해 터질 것 마냥 빨개진 제논의 귀를 볼 때마다 정신이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안다, 나도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긴 한데.
...이것 말곤 진짜 방법이 없다.
다리는 안 움직여지고, 이능은 쓸 데로 쓴 탓에 더 이상 얼음이 얼려지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헤라 카르멘을 당장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전략상 후퇴, 그리고 채용한 방법이 단순히 제논에게 업혀 이동하는 것뿐이었다.
기분이 미묘했다.
여자를 업어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업히니까. 등이 아닌 가슴에서 감촉이 느껴지는 게 조금 많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단단한 등에 부드러운 가슴이 짓눌리는 감촉에 순간 눈살을 찌푸리면서도-아직 요르문간드를 상대하고 있는 헤라를 바라보았다.
이제 거의 부서져 기껏해야 머리만 남은 요르문간드. 그래도, 시간벌이는 확실히 한 것 같았다. 저 멀리서 이 쪽을 향해 다가오는 사람들이 보였으니까. 아마 히어로겠지.
“이제야 오네. 도대체 뭘 하다 온 거야?”
내가 투덜거리자, 제논은 꾹 닫혀있던 입을 그제서야 열었다.
“...아마 누나라면, 충분히 통제할 수 있었을 거야. 또 다른 ‘이슈’를 만들어내서, 히어로의 시선을 그 쪽으로 돌려놓은 거지.”
“B지구 사무소처럼?”
“직접 본 게 아니라 뭐라 비교는 못하겠지만. 아마도 그럴 걸.”
그 말대로, 저 멀리서 엄청난 기세로 피어오르는 연기가 보였다. 아까 빌런 들과 싸웠던 거리도, A지구의 히어로 사무소도 아닌 장소. 저 정도면...히어로 한둘이 맡아서 끝날 무언가는 아닌 것 같았다.
“진짜네...”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 건 마찬가지야. 굳이 이렇게 일을 벌일 필요가 있을까.”
빌런 10명이라니, 그렇게 덧붙이며 제논은 눈을 좁혔다. 무언가 석연치 않은 듯, 그리고 업혀있는 나를 향해 작게 중얼거렸다.
“...너도 이젠 알겠지만, 내 아버지는 탑히어로야.”
“...응.”
“그래서 이번 일이 더 이상해. 아무리 독단적이고, 가끔 일반 사람이 상상치도 못하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이긴 하지만...아무리 그래도 빌런을 이용할 생각까지 하지는 않을 텐데.”
확실히, 그 점은 나도 동감하는 바였다. 완결까지 보지 못한 탓에 그 에드윈 카르멘이라는 제논의 아버지에 대해 잘 모르는 건 맞았지만, 그래도 중간중간 드러난 그의 모습을 봤을 때 빌런까지 활용해가며 이런 일을 벌일 것 같진 않았다.
그는 오히려 빌런을 혐오하는 쪽에 가까웠으니.
탑히어로라는 이명이 단지 힘으로 붙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듯, 그는 빌런에 한해서는 자비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민에겐 선량한 히어로, 허나 빌런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무서운 히어로.
그런 그의 딸인 헤라 카르멘이 빌런을 이용했다는 점이, 꽤 거슬린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쐐애액-
그런 상념을 깬 것은, 제논 앞에 꽂힌 물줄기였다. 땅을 향해 떨어지며 콘크리트를 박살낸 물줄기, 그 것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깨닫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기에, 나는 조용히 제논의 등에서 내려왔다.
“괜찮겠어?”
“...서있을 수는 있어.”
믿는 구석은 있었다. 어느덧 벌떼처럼 모여 빌런을 찾아 수색하는 히어로 들이 있었으니, 그녀가 우리에게 온 것도 어디까지나 할 말이 있어서겠지. 내 생각대로, 하늘에서 내려온 헤라 카르멘은 두 손을 살짝 들며 입을 열었다.
“음, 제논. 그렇게 보지 마. 어차피 더 싸울 생각도 없으니까.”
“...그 가면은 또 뭐야?”
그녀는 아까 부쉈던 가면을 언제 고친 건지, 코 위로 오는 흰 가면을 덮은 채 우리를 마주했다.
“굳이 얼굴을 드러낼 필요는 없지. 너무 얼굴 딱딱하게 굳히진 말구. 오늘은 그냥 없던 일로 생각해. 그냥...헤프닝이라 하는 게 좋겠지.”
“헤프닝이라니 그게 무슨...!”
“쉿, 제논.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나 너무 지쳤어. 저기 아이샤가 만든 녀석 때문에 이능을 막 쓰느라, 졸리단 말야.”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댄 헤라는, 나를 보며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떻게 이런 짓을 벌여놓고선 저렇게 웃을 수 있지? 뒤틀렸다, 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며 한참을 노려보자, 헤라는 아쉽다는 듯 입꼬리를 추욱 내리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아쉽지만 이젠 헤어질 시간이야.”
“...아버지는,알고 있어?”
“푸흐...다음에 보자.”
제논의 말을 무시하고 내뱉은 그 인삿말을 끝으로, 그녀는 물에 휩싸여 어디론가로 날아가 사라졌다. 제논은 뭔가 찜찜한 듯 헤라가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나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끝났네.”
“...끝은 아니지?”
다시 보자고 했으니까. 원작에서처럼 헤라 카르멘은 계속 나타날 것이었다. 이젠 내가 모르는 방법으로 오겠지. 내가 전개를 뒤틀어, 완전히 다른 결말을 만들었기에 나타난 결과겠지만. 후회는 없었다.
제논이 블랙홀이라는 이능을 사용하는 빌런을 상대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제논이 상처받는 것도, 그로 인해 한동안 폐인처럼 지내게 되는 것도. 이제는 나만이 아는 일이 되었다.
스윽-
무너진 건물들 사이를 히어로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저 건물들이 무너지는 데에 내 책임 적잖이 있다는 게 양심에 찔리긴 했지만, 뭐...어쩔 수 없지 않은가. 꼼짝 없이 죽을 뻔 했는데. 그래도 위안삼을 만한 건 내가 무너트린 건물 중에 사람이 있었던 건물은 없었다. 전부 기업 소유의 건물, 모든 사람이 퇴근한 시각이었기에 무너지는 정도로 끝난 것이었다.
어느덧 하늘에 동이 트고 있었다. 밤에 시작한 사건이,새벽을 지나, 이제 아침이 되어서야 끝난 건가. 그렇게 생각하자 잔뜩 서려있던 긴장이 풀리며 다리가 휘청였다. 시야가 뒤집히고, 바닥에 넘어지려는 찰나.
무언가가 내 허리를 휘감아 공중에서 붙잡았다.
“...뭐 하냐?”
“......”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이나 가까운 거리, 푸른 눈과 마주함과 동시에, 나는 순간 녀석의 가슴팍을 밀쳐냈다. 힘없이 밀려나는 녀석, 흠칫- 하고 놀란 녀석은 내 시선을 피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그냥 잡아준 건데.”
“...다음부터는 그냥 냅둬.”
왠지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