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동아리는 싫어(1)
지이잉-
머리를 울려대는 진동, 잠깐일거라 생각하며 무시하고 잠에 들려했지만 어째선지 진동은 끊기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불만어린 표정으로 바닥을 더듬거리자 딱딱한 무언가가 손에 집혔다.
우우웅-
쇠의 차갑고도 소름끼치는 감각을 느끼며, 손에 잡힌 무언가가스마트 워치임을 깨닫는 것도 잠시. 도대체 왜, 이 꼭두새벽에 전화가 왔는지 의아하다고 생각했을 때 귓가에 들리는 건 꽤나 다급한 목소리였다.
-아이샤!
마치 무슨 일이라도 생긴 듯 한 프레이의 목소리, 뭔가 있구나 싶어 헛기침을 몇 번 했을 때, 프레이는 꽤나 충격적인 말을 던졌다.
-지각이잖아! 설마 아직 자고 있던 거야?
“...뭐?”
지각이라니, 아직 이렇게 집이 어두운...그제서야 나는 창문을 가리고 있던 커튼을 볼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달빛마저 밝다고 쳐버린 커튼, 그 탓에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집이 어두웠던 것이었다. 순간 등골이 시큰해지며, 가슴에서 무언가가 쿵, 하고 내려앉았다.
딱딱히 굳은 고개를 돌려 시계를 바라봤을 때, 시계는 이미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
망했다.
#
쏴아아-
설상가상으로, 문을 열자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원래라면이능을 사용해서 그냥 뛰어갔을 텐데,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 이능을 사용했다간 미끄러질 때도 있는 터라...사용하기가 꺼려졌다.
“흐으...비는 싫은데.”
어쩔 수 없이 우산을 펴고 걸어가기로 결정. 비를 맞는 건 싫었지만, 그래도 비가 내리는 것을 보는 건 나름 운치 있다고 생각했기에 천천히 걷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지금가나 더 빨리 가나 지각인건 마찬가지였고.
툭-
비를 맞고 목련이 하나둘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어느덧 갈색으로 물들은 목련이 떨어지고, 그 자리를 푸른 나뭇잎이 자리 잡으며 이제는 여름이라고 조금씩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아마 이 비가 그치면 날씨도 확 더워지지 않을까.
우산을 맞고 튕겨나간 빗방울이 바닥에 부딪힌다. 금세 고인 물웅덩이에 파문이 일고,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사라지는 파문과 함께 비춰지는 내 모습을 바라본다.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구나. 여자가 되어 보내는 첫 계절, 무언가 미묘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어쩌면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계속 이 몸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꽤 불편 했을 테니까. 이제 나는 여자다, 예전 같았으면 기겁했을 생각을 떠올리며, 웅덩이를 피해 폴짝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하나, 두울- 뛰어넘는 웅덩이를 하나씩 세면서 걷자 무언가 어릴 때로 돌아온 것만 같아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생각해보면 지금 나는 어리잖아?
17살, 내가 품고 있는 동심이 당연한 거라 여기며 웅덩이를 폴짝거리는 것도 잠시, 뒷 쪽에서 누군가 타다닥, 하고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출근 하는 사람도, 그렇다고 등교하는 사람도 없어 한적한 거리일 텐데. 깨져버린 운치에 불만어린 표정을 지으면서 돌아보자, 저 멀리서 한 사람이 뛰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누구지?”
우산도 없이, 그저 손으로 머리를 가린 채 뛰어오는 사람.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 사람의 머리가 하얀색임을 깨닫자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설마.
그렇게 타이밍 좋게 만날 리가 있나.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내려 고개를 몇 차례 흔든 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제논이라, 그 이름을 떠올리자 어제의 일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헤라 카르멘을 만나고, 빌런들과 싸우고, 이젠 내가 모르는 전개와 마주해야 한다니.
“후우.”
집에 돌아오는 길이 왜 그렇게 먼 건지, 지하철로 1시간이면 가는 거리였건만 그 1시간이 평생이랑 똑같다고 생각할 만큼이나 어제의 난 꽤 지쳐있었다. 이능을 한계까지 쓴 탓도 있고, 빌런 10명과 대치해서 싸우느라 몸이 긴장으로 굳은 것도 있고.
아마 그 것 때문에 지각하게 된 것 같았다. 사람이 너무 지치면, 알람 소리도 듣지 못하고 골아떨어지니까. 아마 내 사정을 말하면 교수님도 조금 참작해주시지 않을까? 어제의 빌런 습격은 꽤 큰 사건이었고, 아까 스마트 워치를 잠깐 봤을 때 베로니카 교수님한테 연락도 몇 번 왔었으니까.
지금 마음이 꽤 편한 이유도 그런 거였고. 지각했다는 걸 깨달은 당시엔 심장이 철렁했지만, 생각해보면 내 지각은 당연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싸웠는데 안 지치면 그게 사람이야? 기계지.
“...학교 가기 싫다.”
무심코 속마음이 튀어 나왔다. 사실 그렇게 잤어도, 전화를 듣고 일어나 부랴부랴 준비한 탓에 피곤한 건 마찬가지. 오늘 수업을 과연 제정신으로 들을 수 있을지 부터가 의문이었다. 마음 같아선 그냥 하루 쉬고 싶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멍하니 걷고 있을 때, 내 근처로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아이샤.”
익숙한, 그리고 살짝 피곤에 절여진 목소리. 고개를 살짝 돌렸을 때, 비에 홀딱 젖은 제논이 머리를 긁적이며 내 옆에 서있었다.
“...그, 우산 좀 같이 써도 될까?”
“하아...”
아까 뛰어오던 사람이 너였구나, 근데 우산도 안가져온 거냐... 마음 같아선 그냥 무시하고 싶었지만, 비에 홀딱 젖은 생쥐 같은 모습, 가뜩이나 머리가 하얀 탓에 더 불쌍해보이는 그 모습에 어쩔 수 없이 우산을 건네주었다.
“자, 네가 들어.”
“고마워. 근데 너도 지각한 거야?”
“...응, 프레이 전화 듣고 깼어.”
“하긴, 어제 너 엄청 피곤해 보였으니까.”
제대로 걷지도 못했잖아, 그렇게 덧붙이며 제논은 우산을 내 쪽에 씌웠다. 나와 제논 사이에 살짝 벌어진 거리, 그리고 완전히 내게 씌워진 우산. 녀석을 살짝 쳐다보자 어깨가 훤히 드러나 젖고 있었다.
“야, 너 어깨.”
“응? 아, 괜찮아. 머리만 안 젖으면 되지.”
괜찮다며, 살짝 미소 짓는 녀석이었지만 가슴 한구석이 찝찝한 건 사실이었다. 기껏 우산 씌워줬는데, 그렇게 젖어버리면 불편하잖아. 힐끗, 녀석과 나 사이에 벌어진 거리를 슬쩍 살폈다. 딱 우산을 서로 쓸 수 있을 만큼의 거리, 다행히 내가 가져온 우산이 약간 큰 편이라. 완전히 붙으면 둘 다 젖지 않고 있을 수 있을 터였다.
흐음.
눈알을 굴리며 고민하기도 잠시,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제논에게 살짝 붙었다.
“...아이샤?”
“어깨 젖잖아. 그냥...있어.”
미안한 것도 있고 말이야. 사실 전에 옥상에서 했던 말이 계속 거슬렸다. 이제는 다 해결된 일이긴 하지만, 당사자도 괜찮다고 했지만. 내가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녀석이 며칠동안 혼이 빠진 모습을 보는 게 솔직히 말해 마음이 편한 일은 아니었고.
비록 히로인이 되는 건 싫었지만, 친구...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얘가 나한테 고백할 것 같지도 않았고. 헤라 카르멘이 일을 벌인 덕에 당분간 녀석은 그 쪽에만 신경 쓸 터였다. 이제는 원작과 꽤 달라진 전개, 연애질하기엔 바쁠 거란 생각이 들었기에.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괜찮아?”
제논이 조심스레입을 열었다. 그 말에 대답하려 고개를 들었는데, 어째 녀석 얼굴을 보자 되려 내가 물어야할 질문 같았다. 그거 살짝 붙었다고 얼굴이 저렇게 빨개지다니, 어지간히 여자에 면역이 없네.
뭐, 원작에서도 그랬으니까 내가 이해해줘야겠지.
“젖는 것보다야 낫잖아. 기껏 우산 씌워줬는데, 젖으면 안 되지.”
“그, 하아. 그래. 네가 그렇다면야.”
체념한 듯,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린 녀석은 다른 것을 물어오기 시작했다. 어제 다친 건 괜찮으냐, 집에 잘 들어갔냐, 뭐 헤라가 따로 뭐라 한 건 없었냐. 하나 둘 대답하다가 지쳐서 입을 꾹 닫자, 그제서야 녀석도 머쓱했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닫았다.
“...이젠 안 잘게.”
“뭐?”
“그냥, 앞으로는 수업 시간에 안 잘 거라고.”
무슨 바람이 들어서 저런 소리를 하는 걸까. 놀란 나머지 녀석을 멍하니 바라보자 제논은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그냥, 앞으로 빌런이랑 싸울 일도 많을 거고. 너랑 헤라가 엮인 것도...내 탓이나 마찬가지니까. 열심히 다녀보겠다는 거야. 정학은...피해야지."
“뭐...다행이긴 한데.”
역시 찜찜한 건 사실이었다. 이제 녀석이 아카데미에 붙어있겠다고 생각했으니 뭐든 열심히 할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방금 한 말이 꼭 나 때문에 아카데미에 남을 거라 하는 것만 같아서.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이제 교문 보인다.”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자, 저 멀리 아카데미의교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 시간은...대충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 제대로 지각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와서 이렇게 지각한 적이 있었나? 아까 스마트 워치로 계속 프레이한테 문자가 오던데.
아카데미에 입학한 뒤로 사소한 실수 하나 한 적이 없던 내가 한 달만에 지각을 했으니, 아마 꽤 신경이 쓰이는 거겠지. 약간 죄책감이 들긴 했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게 교문 앞 작은 건물에 있는 경비 아저씨에게 손을 흔들었다.
“...맨날 그렇게 인사해?”
“어, 고생하시잖아.”
“나도 우산드느라 고생했는데.”
“...어쩌라는 거야?”
“그냥, 그렇다고.”
그렇게 중얼 거리던 녀석은 피식 웃더니, 우산을 내렸다. 갑작스레 내린 터라 놀라 머리를 가렸지만, 이내 제논이 황당하다는 듯 쳐다보는 걸 보고 상황을 알아차렸다.
어느새 그친 비, 방금까지 세차게 쏟아져 내렸던 비의 흔적은 이제 고여있는 웅덩이만 남아, 하늘엔 하얀 구름 사이로 해가 드러나 있었다. 아마 소나기였던 건가.
아무튼, 이제 교실에 가야겠지. 약간 불안한 낌새를 느끼며 나는 제논과 함께 교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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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샤! 걱정했다구.”
“걱정할 것 까지야. 그냥 늦잠 좀 잔 것 뿐인데.”
프레이는 어느 때보다 기운이 넘쳤다. 머리에 달린 더듬이가 쉴 틈 없이 꿈틀 대는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주체할 수 없는 텐션에 여지없이 휘둘리는 차였다. 아마 비가 와서 그런 걸까, 달팽이라는 이능답게 쓸데없이 그런 부분까지 닮아 있었다.
“네가 늦잠을 잘 리가 없잖아! 어제 실기 시험이 힘들었던 거야? 빌런이라도 만났어?”
휙휙-
인형 다루듯 어깨를 붙잡고 마구 흔드는 프레이의 괴력에 휘둘러지기도 잠시, 나는 프레이의 끈적이는 팔을 붙잡고 입을 열었다.
“아으- 프레이, 어지러워. 그만.”
“다 아이샤 잘못이야. 왜 사람을 걱정하게 만들어.”
그나저나 빌런을 만났다는 질문에 답하기엔 조금 곤란했다. 아직 뉴스를 보지 못한 건가? 만약 그런 거라면, 차라리 모르는 쪽이 나을 것 같은데. 프레이는 살짝 나를과하게 걱정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지각했다는 것 하나로, 계속 찰싹 붙어있으니까 말이다.
“뭐...그냥 이런저런 일이 있었어. 심부름 좀 하고, 잡일 좀 하고. 너도 비슷하지 않아?”
“그렇지? 나도 미아 찾아주고 소매치기 잡는 그런 거 말고는 딱히 특별한 건 없었어.”
"소매치기? 얘기 좀 해봐."
소매치기를 잡았다라, 그 얘기는 조금 궁금해서 듣는 와중에- 제논이 어느샌가 다가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아이샤, 교수님이 불러.”
“엇, 제논 이제 괜찮아? 난 네가 곧 죽을 사람이라도 된 줄 알았어.”
“아...이제 괜찮아. 걱정해줘서 고마워, 프레이.”
프레이의 텐션에 적응하지 못하는 건 제논도 마찬가지 였는지, 약간 당황한 듯 나를 힐끔 바라봤다. 그나저나 교수님이 불렀다면...역시 그거겠지.
“너랑 나 부르는 거지?”
“응.”
내 생각대로, 베로니카 교수님의 호출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