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친구 이상은...싫어(4)
아이샤가 된 이후로, 내가 입는 옷은 크게 한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교복, 그게 아니면 후드티와 청바지.
어차피 누구에게 잘 보일 일도 없을테니, 무조건 편한 쪽으로만 입자- 라는 생각이었다.
옷장을 처음 열어 보았을 때도 교복 외엔 특별히 옷이 없었기에, 사복을 장만할 때도 후드티와 청바지만 사는 것이 끝.
이번에도 여름에 입을 반팔이나, 기껏해야 얇은 옷 몇 벌을 사는 거라 생각했지만...
도대체 프레이가 날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가 무엇일까.
“오, 이거 괜찮은데.”
“...아니, 프레이.”
“이건 조금 색깔이 안 맞는다. 아이샤는 어두운 것보다 밝은 쪽이 더 어울려.”
“프레이.”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끊임없이 옷을 내 몸에 가져다 대는 프레이의 어깨를 잡자 그제서야 프레이가 시선을 마주쳤다.
“왜?”
“도대체 여긴 왜 온 거야. 나는 편한옷 좀 사려고 온-”
“아이샤? 너 제논이랑 내일 밥 먹으러 가는 거 아니야?”
“...맞는데.”
그게 여기까지 온 거랑 무슨 상관이지.
그런 의문을 담아 프레이를 빤히 쳐다보자, 프레이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푹, 하고 내쉬며 입을 열었다.
“단둘이 밥 먹으러 가는데, 네가 혼자 반팔티에 반바지만 입고 있다고 생각해봐. 같이 나온 사람 입장에서 어떻겠어.”
“...부끄럽나?”
“아니, 걔는 네가 뭘 입던 좋아하겠지만...아무튼, 그건 예의가 아니야. 설마 너 저번에 아빠 레스토랑 갔을 때 이상한 거 입고 간 거 아니지?”
“교복입고 갔지.”
학교 끝나고 바로 갔으니까.
프레이는 차게 식은 눈으로 날 흘겨보더니, 무언가 다짐한 듯 주먹을 꼬옥, 쥐며 다시금 옷들을 몇 벌 들고 오기 시작했다.
“...프레이?”
“안 되겠다. 이대로 널 놔뒀다간, 네가 앞으로 무슨 옷을 입고 다닐지 모르겠어.”
척, 어느샌가 내 손에 흰색의 원피스를 쥐어준 프레이가 고개를 까딱이며 한 곳을 가리켰다.
“입고 와.”
“이걸...?”
교복 치마야 익숙해졌다지만, 이건...조금 너무 파격적인 거같은데.
그렇게 원피스를 빤히 쳐다보며 망설이기도 잠시,
어느덧 프레이가 내 옆으로 다가와 탈의실로 몸을 밀어난 탓에,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탈의실에 갇힌 꼴이 되어버렸다.
“...에반데.”
거울에 비친 소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원피스를 들고 있었다.
이 것을 과연 입어야 할지를 고민하면서.
프레이가 왜 이렇게까지 나서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말을 들어보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저번에 제논에게 티켓을 주며 자일 레스토랑을 가자고 했을 때, 다른 애들이 그것을 보고 데이트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어쩌면 제논에게 이번에 단둘이가자고 한 것은 데이트...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도있지 않을까.
“데이트...”
내심 의식하고 있진 않았지만, 제논이 내게 보내는 감정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것이 연심인지, 아니면 그저 친구로써의 호감인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알 것 같지만.
워낙 과거사가 음울한 탓에, 소중하다 생각하는 이에겐 꽤나 잘 대해주는 것도 있고.
어쩌면 내가 사복을 그저 편한대로만 입고 다녔던 건, 무의식적으로 그 것을 회피하려 했기 때문이 아닐까.
무심결에, 나는 조심스레 내 피부를 만졌다.
따로 관리하지 않았음에도 잡티 하나 없는 새하얀 피부, 거울을 멍하니 바라보는 선홍색의 눈동자, 윤기 흐르는 화이트 블론드까지.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솔직히 말해 내 또래에 이정도 외모를 지닌 이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만큼이나 아름다운 소녀였다.
아깝다는 생각이 들법했다.
이런 외모를 가진 이가 입는 옷이라곤 고작해야 그런 가벼운 옷차림이라니, 다른 사람이 보기엔 얼굴을썩힌다는 생각이 들겠지.
“...입어볼까.”
반응이 궁금하긴 했다.
만약 내가 정말로 꾸밀 생각을 가지고, 꾸민 얼굴을 프레이나 제논에게 보여준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그런 궁금증.
입고 있던 교복의 마이가, 블라우스가 내려가고.
새하얀 살결 위로 가슴을 덮은 속옷만이 덩그러니 남은 모습을 바라보며, 들고 있던 옷걸이에서 조심스레 원피스를 빼내었다.
한 번 입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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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
탈의실 밖으로 목소리가 들리도록, 나는 조심스레 프레이를 불렀다.
거울로 봐서는 괜찮아 보이는데, 이게 실제로 괜찮아 보일지는 잘 모르니까.
그렇게 내게 불려진 프레이는 기다리는 게 영 지루했는지하품을 한번 내쉬더니, 이내 터벅거리며 이 쪽으로 다가왔다.
“왜 그래?”
“입긴 했는데, 어울리는 잘 모르겠네.”
“입었어?”
반색하는 프레이의 반응에, 나는 속으로 슬쩍 미소를 지었다.
과연 어떨까, 사실 이렇게 차려입는 것도 아이샤가 된 이후로 처음이라. 프레이의 반응이 엄청 궁금하긴 했다.
철컥-
탈의실의 문이 열리고, 나와 눈이 마주친 프레이가 순간 헛, 하고 그 자리에 멈춰섰다.
멍하니, 문을 열었던 손이 허공에 그대로 멈춰있는 것도 모른 채 돌처럼 굳어버린 프레이.
그 모습을 보며 내 머릿속도 같이 혼란스러워졌다.
설마 별로인가? 확실히 인상이 차갑긴 한데, 흰색은 조금 안 어울리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을 때, 프레이의 더듬이가 쫑긋, 하고 움직이더니 이내 하늘 높이 바짝 세워지며 얼굴도 함께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아, 아이샤.”
“별로야...?”
“...몇 개 더 입어보자.”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손에 없었던 새로운 옷 몇 벌을 들이민 프레이는, 어째선지 입가를 손으로 가린 채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안 어울리는 건 아닌 것 같네.
손으로 입가를 가려도 그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 있는게 너무도 잘 보여서, 나는 마지 못해 받는 척하며 옷을 받아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렇게 입고 있는 것 자체에 거부감이 있는 건 아니었다.
여기서 더 이뻐지면 기분이 좋은 게 당연한 게 아닐까.
뭐, 이제 나도 여자고. 외모에 대해 다른 여자들에 비해 관심이 덜 한 거지 그렇다고 아예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원피스를 입고 있는 내 모습을 거울로 바라보며, 괜스레 내 입꼬리도 헤실헤실 올라갔다. 잘 어울리네.
화이트 블론드의 머리카락이 원피스와 맞닿으며, 하얀 빛깔의 옷 색과 퍽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하늘하늘한 재질이라 지금 날씨에 입기도 딱 좋고, 프레이가 모자를 보고 있는 걸 보면 모자까지 쓰게 될 것도 같았다.
그 모습을 상상하자니, 아이샤의 일러스트 하나가 떠올랐다.
그 아이샤의 모습도 백색의 하늘 거리는 원피스에, 챙이 넓은 모자를 쓴 모습이었는데.
내가 그렇게 입게 될 줄이야. 참, 세상일이라는 게 어찌 될 줄 모른다는 말이 딱 맞지 않을까.
그런모습에 어색해하지 않는 나 자신이, 오히려 이렇게 꾸미는 것에 기분 좋아하는 나 자신이 꽤나 신기했다.
이제 고작해야 빙의한지 3달인데, 그 사이에 이렇게 여자 아이가 되어버렸다니. 22년의 세월보다 3개월이 더 큰 걸까.
문득 피식, 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어쩌면 지금 내 삶은, 빙의가 아니라 환생이 아닐까.
남자로 살던 전의 것들은 그저 전생, 아이샤로 살아가는 지금이 새롭게 환생한 이후의 삶.
이제는 소중한 이들을 지킬 힘을 얻었고, 그 힘으로 누군가를 지킬 수 있었다.
후회하지 않을 수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의 삶을 어떻게 생각하냐면, 오히려 행복한 쪽인 것 같았다.
이렇게 친구와 웃고, 약속을 잡고, 옷을 사러 나와 새 옷을 입었을 때 친구의 반응을 기대하는.
딱 그 나잇대의 소녀 같은 행동이면서도, 언제나 내가 꿈꿔왔던 평범한 삶이라는 것이.
매순간이 그저 생생한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행복했다.
비록 아무 생각 없이 살 만큼 평화로운 곳이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늘 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힘없이 스러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던 예전보다야 훨씬 살기 좋은 게 아닐까.
“이건 어때?”
“...왜 진작에 데려올 생각을 못했을까.”
이렇게 프레이의 반응을 보기만 해도 마냥 좋아서, 오늘따라 이상하게 웃음이 자꾸만 새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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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제논이랑 밥만 먹을 거야?”
갑작스런 질문, 그나저나 밥만 먹을 거냐니. 거기서 뭘 더 해야 하는 걸까.
고개를 가로젓자 프레이는 그럴 줄 알았다며 다시금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밥 먹고 뭐 해야 돼?”
“아니...꼭 그렇다는 건 아닌데. 설마 이렇게 단둘이 나가는 거 처음이야?”
“처음이지.”
남자일 때도 딱히 데이트라는 걸 해본 적이 없고, 여자가 된 이후에도 아는 남자애라곤 제논 말고 없었으니.
어째선지 놀란 표정을 지은 프레이를 바라보며, 어깨를 한번 으쓱였다.
원작에서도 아이샤는 제논 말고 아는 남자도, 만나본 남자도 없었으니까. 고증이라면 고증이다.
“...하기야, 만나봤으면 밥 먹고 뭘 해야 할지 물어보진 않았겠지.”
밥 먹고 레이 마이어씨나 한 번 찾아가려고 했는데, 또 뭔가를 해야 하는 걸까.
그렇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게 프레이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자, 여기.”
“이게 뭔데?”
프레이가 내민 것은 익숙한 모양의 티켓이었다.
또 자일 레스토랑의 쿠폰인가, 했지만. 막상 받아보니 식당이 아닌 영화관의 티켓이 아닌가.
그것도 딱 2장, 이게 뭐냐며 되묻자 프레이는 더듬이를 추욱 늘어트리며 입을 열었다.
“원래 너랑 가려했던 건데...어쩔 수 없지.”
“이걸 왜 나한테 줘, 나중에 같이 가면 되잖아.”
“...제논도 뭔가 준비 안했을 거 같아서 주는 거야. 걔도 너랑 똑같으니까. 아마 네가 뭔가 하는 게 아니면 제논도 멍청하게 밥만 먹고 갈 게 뻔할 걸.”
조금 아쉬운 듯, 축 처진 더듬이를 매만지던 프레이는 이내 씨익, 웃으며 내 가슴을 툭 치며 말했다.
“데이트 잘 하고 와.”
“...고마워, 프레이.”
나는 프레이를 마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저 반짝이는 눈동자가 무엇에 대한 기대를 품고 있는지 몰라도, 어쨌든 도와준 건 사실 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