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친구 이상은...싫어(5)
떨리고, 초조했다.
단둘이 백화점에 간다는 둘과 헤어지고, 홀로 집에 도착하자마자 한 것은 다급히 스마트 워치를 켜는 것이었다.
내일, 내일. 오로지 그 말만을 중얼거리곤, 이미 머릿속엔 내일에 대한 기대감으로 꽃밭이 피어났다.
저번과는 다르게, 순수한 목적이 아니던가.
‘데이트’
그 세 글자의 단어가 어찌도 그리 달콤히 들리던지.
숨을 쉴 때마다 폐를 가득 채우는 그 당도에 허우적거리며, 내일에 대한 생각으로 한참을 고민했다.
이 주변에 맛있는 식당이 어디인지, 자연스럽게 같이 갈 만한 곳이 어디일지.
한 번도 이런 걸로 고민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내가 여자 때문에 고민하게 될 줄이야.
여자를 문제 삼아고민한 것이라곤, 어머니에 대한 고민뿐이었다.
주변에서 자신을 좋아한다며 들러붙는 여자들을 무시하고, 쳐내기를 몇 년 동안 해오지 않았던가.
이제는 그저 과거가 되어버린,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아마도 지금쯤 퍼 자고 있을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생긴 것과는 달리 여자 경험이 많은 것이 형이었으니, 꽤 도움이 되지 않을까.
뚜루루-
긴 시간의 통화음, 아마 아직까지 자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 끊으려는 찰나.
졸음에 잠긴 목소리가 너머에서 들려왔다.
-뭐냐...
“잤냐?”
-왜 깨우고 지랄이야...뭔데 또.
“아니, 내일 어...아이샤랑 밥 먹기로 해서.”
-아이샤? 네가 좋아하는 애랑?
“어. 그래서 물어보는 건데-
-내일 정말 밥만먹어야 되냐고?
“어. 어떻게 알았어?”
-네가 씨발 하는 생각이 그렇지 뭐, 잠깐만. 나 정신 좀 차리고 알려줄게.
역시, 이럴 때는 믿음직하지 않은가.
평소에는 조금 호구 같고 멍청하긴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보다도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형이었다.
만약 형마저 없었더라면, 아마 내일 했을 데이트가 엉망이 되진 않았을까.
언제나 좋은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다는 내 욕심이 있었기에, 조금 부끄럽더라도 이렇게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큼큼,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헛기침 소리. 이제는 잠이 좀 깬 듯한 목소리의 형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걔는 왜 또 너랑 밥 먹냐? 네가 한 거야?
“아니, 저번에 간 거는 비즈니스 같은 거라서. 다시 가기로 한 거야.”
-너한테 아주 관심이 없진 않나 보네. 하기야, 다른 건 몰라도 네 얼굴은 좀 괜찮으니까.
“...내가 잘생겼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른 여자들이 내게 호감을 가지는 것을 보았을 때는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지만, 정작 아이샤는 내 외모에 대해 무어라 한 적이 없으니까.
다른 사람의반응은 중요치 않았다. 아이샤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것으로 시작된 고민을 뿌리깊게 내려 점점 내면의심층으로 움직여간다.
별 거 아닌 것 같았던 작은 고민이, 이내 전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 마저 까먹으리만치 심각하게.
아이샤가 나를 대하는 점에서, 다른 사람들과 특별히 차이점을 둘 수 없었다.
친하게 지내는 사람 중 남자가 나만 있다고 한들, 아이샤 옆에 남자가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누구에게나 친절한 사람, 그렇기에 평판도 좋았고 딱히 거리를 둔 사람 없이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편이 아니던가.
그런 모습을 보며 속으로 역정을 내기도 했지만, 그렇다 한들 내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결국 내가 지금 아무리 발버둥 쳐본다 한들, 결국 친구라는 사이가 아니던가.
‘친구’.
단지 그 칭호에 좋아했던 시절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더 가까워지고, 조금 이라도 더 곁에 있고 싶다며 어떻게든 핑계를 대는 사람만 남았을 뿐.
그저 애정을 갈구하는, 동물에 불과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한 걸음 뒤에 있다 아무리 소리쳐 봐도, 결국 인형의 꿈에 지나지 않았다. 닿을 수 없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된다면. 이런 관계가 유지된다면.
뜨겁게 차올랐던 감정이 차갑게 식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어느덧 머릿속의 일부를메운 절망감에 눈살을 찌푸리기도 잠시,
귓가에 들리는 소리에 상념이 깨지며 어느 순간 다시금 현실로 돌아와있었다.
-야, 너 또 망상하고 있지?
“...뭔 소리야.”
-에휴, 일단 해보고 생각하자. 내가 보기엔 걔도 너한테 관심이 아예 없어 보이진 않으니까.
“그걸 어떻게 알아.”
-네가 싫었으면 애초에 같이 가자는 소리도 안했겠지. 병신아.
“...그런가?”
쫑긋, 그 말에 혹해 다시금 귀가 움찔거렸다.
하기야, 내가싫거나 별 감정이 없었더라면. 이렇게 같이,그것도 단둘이 가자는 말도 안했겠지.
그렇게, 머릿속에는 다시금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어쩌면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생각해보면, 저번에 입원했을 때 손을 잡지 않았던가.
그 때의 감촉을 떠올리자 얼굴이 뜨거워졌다. 아마 거울을 보면 새빨갛게 변해 있지 않을까.
그런 사소한 접촉마저, 나를 신경써주는 그런 섬세함마저.
무엇하나 빼놓지 않고 좋아하는 자신을 생각하자또다시 피식, 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미친 새끼.
누가 보면 나를 광인이라 생각할지도 몰랐다.
방금까지만 해도 잔뜩 우울해졌다가, 말 몇마디에 또다시 이렇게 기뻐하는 것을 보면.
그렇게 또 다시 상상한다. 어쩌면 아이샤와 지금보다도 더 깊은 관계가 된다면 하게 될 일들을.
손을 마주잡고, 얼굴을 마주하고, 그렇게 또 웃고. 만약에 아버지에 관한 일들도 해결이 된다면...
물론 지금은 어디까지나 친구 정도에 멈춰있지만, 그렇게 또 친구 이상, 연인 미만. 다시 연인 이상의 관계까지 간다면.
“하아...”
생각만 해도 좋아서, 그렇게 또 혼자 미소 짓는다.
비록 지금은 상상에 지나지 않지만, 비록 지금은 이렇게 음습한 망상에 지나지 않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에휴.
“...미안해 형, 그냥 잠깐 상상해봤어.”
-좆까 병신아. 사귀지도 않았으면서 망상하는 수준.
“아무튼, 내일 밥먹고 뭐해야할까.”
그게 가장 큰 고민이었다. 과연 밥만 먹어야 하는가. 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아무리 데이트라는 것을 처음 해보는 것이지만, 밥만 먹고 그대로 만남을 끝낼 만큼 멍청이가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 여지를 주고, 어떻게 해서든 더 같이 붙어 있어서 호감을 끌어내야 했다.
특히나 아이샤가 내게 무슨 감정을 품고 있는지 조금도 모르는 지금 상태라면.
그렇게 같이 다니다 보면 마음을 알게 되고, 더불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알게 될 터.
처음 생각하는 것은 역시나 영화관이었다.
바로 옆자리, 하나의 팝콘을 두고 이루어지는 시나리오는 소설이나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골 소재였으니.
현실에서도 그만큼의 효용성을 지니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
하지만 문제는 예약이었고, 당연하지만 주말에 영화표를 예약하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이유로, 영화관은 기각.
그렇다면 차라리 같이 산책을 하면 어떨까, 일기예보를 확인 하니 다행히 내일의 강수확률은 10%에 수렴했다.
비가 올 확률은 거의 없다는 거겠지. 하지만 문제는 상대방의 의사였다.
영화를 보는 것과는 달리 걸어야 했기 때문에 아이샤가 어떻게 생각할지도 알아봐야 했으니.
-게다가 지금은 여름이잖아. 여자들 땀나는 거 별로 안 좋아해.
“확실히...”
-아이샤가 화장을 하는지는 몰라도, 화장 지워지는 거 진짜 싫어하니까 잘 알아둬라.
“걔는 화장 안하더라고.”
그럼에도 예쁜 걸 보면 참 대단한 거겠지만. 또 주체하지 못하고 헤실거리는 입꼬리를 손으로 잡아 내리며, 만약 걷게 되면 어디를 가게 될지 고민했다.
생각나는 장소는있긴 한데...가려는 식당과 꽤 거리가 있어 고민 되고.
“어쨌든 이제 대충 어떻게 할지 감이 잡힌다. 고마워 형.”
-사귀면 나한테 연락하지마.
“할건데. 자랑해야지, 평생 갈 거야 아마.”
-지랄. 아무튼 수고해라, 또 내일 울면서 전화하지 말고.
“...그 때도 안 울었어.”
-뭔 소리야, 그때 어디서 술 처먹고 와 가지고 질질 짰잖아 병신아.
“...끊을게.”
툭-
부끄러움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쓸어 내리며, 가볍게 한숨을 내쉰다.
이번엔 정말로, 제대로 차려 입고 가야 할 터. 옷장 문을 열어 젖히는 내 표정은 그야말로 비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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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초여름의 아침은꽤나 한산했다.
이제는 서서히 더위를 되찾아가며, 서서히 땅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도 했으니.
다들 집이나 실내에서 시원한 바람을 찾을 뿐 구태여 약속을 잡고 나가려는 사람을 찾기는 힘들었다.
찌르르-
짝을 찾는 매미가 열정적으로 날개를 비벼 대고, 그에 맞춰 수많은 매미들이 사방에 호소하기 시작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르른 하늘, 그 하늘 아래에서 내 발걸음은 다급히 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옷 고르느라 약속 시간에 늦을 줄이야.
아니, 아직 늦진 않았지만. 아이샤의 성격을생각해보면 약속 시간에 딱 맞춰 가면 꽤나 오래 기다리고 있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렇게 스스로를 자책하며, 조금 더 걸음을 재촉했다.
오늘도 교복을 입었을까? 설령 그렇다 한들, 이번에는 실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정말로 단둘이 있는 날이니, 교복이더라도 좋았다.
그렇게 발걸음을 옮겼을 때, 저 멀리서 한 사람의 인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무 그늘에서 기다리고 있던 걸까. 햇빛이 살짝 부딪혀 주변에 빛이 고여 있는, 그 모습을 보며 다가가기도 잠시.
나풀거리는 옷자락을 발견한 내 발이,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섰다.
“...어.”
순간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는,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튀어나온 일종의 비명이었다.
거대한 아름드리나무 아래, 햇빛이 나뭇잎 사이를 가로질러 은은히 비추는 그 작은 정원 아래에,새하얀 순백의 원피스를 입은한 사람이 눈에 들어온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는 것 뿐이었다.
바람에 모자가 날아가지 않도록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은 채 얼굴을 살풋이 찡그리는 그 표정마저도.
나를 발견하곤 옅게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어주는 그 모습마저도.
왜 오지 않냐며 입 모양으로 불평하는 그 얼굴마저도.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그 외의 것들이 전부 흑백의 모노톤으로 쪼개지고, 오로지 아이샤만이 색채가 가득 담긴 수채화처럼 보여서.
그 모습을 보며, 다시금 깨닫는다.
내가 저 사람을, 너무나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