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경쟁자는 싫어(1)
꿈속에서 어린 내가 만들어냈던 그 풍광을 그대로 지닌 바다가 있다는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그저 가벼운 마음에 던졌던 말이 이렇게 되돌아올 거라곤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여기면 흠...하루 만에 왔다갔다 하긴 힘들 것 같은데.”
“방학이니까 며칠 있어도 되지 않아?”
그러자 제논이 날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뺨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너만 괜찮으면 상관없긴 한데. 괜찮겠어? 단둘이 가는 거잖아.”
“응? 단둘이 가는 게 어때서...어...단둘이...”
음, 단둘이.
그 단어가 무슨 의미를 가졌는지 깨닫자마자 나는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얼굴로 몰려오는 열기에 뺨에 손을 가져다댄 채로 심호흡을 하기도 잠시, 쿡쿡하고 웃는 제논을 쏘아보았다.
“왜 그걸 강조해가지고 사람 무안하게 만들어.”
“별 생각 없었는데, 무슨 상상을 했길래.”
“...이상한 상상 안했거든.”
그냥 거기를 꼭 가야하니까 그렇게 말한 거지. 하기야 단둘이 간다고 해서 무슨 일이 생길까 싶다.
나이의 벽을 훌쩍 뛰어넘어버린 생각의 도약은 무시하고, 내가 굳이 이 바다를 고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거꿈에서 본 것 같거든.”
“그 부모님이 나온 것 같다고 했던 그 꿈?”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꿈의 내용을 이미 들어 알고 있는 제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바다를 살폈다.
“...여명 전투가 일어난 곳이랑은 전혀 상관없는 곳인데.”
“내가 그 꿈에서 얼음으로 만들어낸 풍경이 있었어. 근데 이 바다 사진이 그 풍경이랑 똑같아.”
“여기 가본 적 있어?”
“아니, 나는 한 번도 가본 적 없지. 근데 꿈에서 나왔으니까...”
꿈이라, 생각해보면 꿈에서는 한 번이라도 본 기억만 나온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얇디 얇은 과학지식, 그 중에서도 그나마 뚜렷하게 기억나는 게 그 지식인데.
아이샤가 바다에 가본 적이 없다는 것은 원작에서 나왔던 대사로 알 수 있었다.
제논과 바다에 갔을 때 ‘바다는 처음이야.’이런 식으로 말했었으니까. 설마 기억하지 못하는 5살 이전에 바다를 가보기라도 했던 걸까.
아니면...
“아니, 너무 멀리 갔어.”
“음?”
“아무것도 아니야. 생각이 이상한데까지 뻗어나가는 것 같아서.”
미묘한 생각이 하나 떠오르긴 했지만, 이제 겨우 꿈 한 번 꾼 지금 시점에서 그걸 증명할 방법도, 그렇다고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니라 일단 털어두기로 했다.
“...하아, 마이어씨한테 또 가야하네.”
“힘들어?”
제논이 걱정스러운 듯 머리에 손을 올리며 물었지만, 고개를 저으며 한숨만 푹 내쉬었다.
힘들다, 라고 물으면 솔직히 힘들 부분은 없긴 했다.
다만 부딪힐 때마다 벽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라 해야 할까.
아까 싸운 것도 사실 공방이라 하기에 우스운 싸움이 아니었던가.
전력으로 펼친 니플헤임이 그렇게 녹아내리는 건 아마 브루노가 다시 돌아오더라도 할 수 없을텐데,
단지 몇마디의 말을 내뱉자 불꽃이 치솟아 오르는 그 광경은.
아직 내가 한참 멀었다는 것을 세포 단위로 체감하게 만들었다.
그런 경지에 도달하려면, 내가 7번 검까지 뽑아야 하는 걸까.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는 5번 검까지밖에 안 나왔는데. 6번 과 7번 검의 형태가 어떨지 조금 궁금하긴 했다.
이게 정해진 형태가 있는 건지, 아니면 내가 상상하는 형태로 만들어지는 지.
물론 아직 까마득한 얘기긴 하지만.
그렇게 잡생각을 하며 멍하니 수업하는 교수님을 바라보고 있을 때, 옆에서 제논이 내 몸을 툭툭 건드렸다.
왜 그러냐고 힐끔 바라보자 제논은 공책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볼펜을 들어보였다.
말로 하지 말고 글로 쓰자는 건가.
-왜?
-마이어씨한테 또 갈 거야?
갑자기 이건 왜 묻는 걸까. 약간 의아하긴 했지만, 일단 오늘은 못 갈 것 같다고 적어주었다.
아마 한 번 더 마이어씨랑 맞붙으면 오늘 오후에 있을 대련 수업 때 누워만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못 가. 오후에 대련 있잖아, 그거 해야지.
-그래? 알았어.
-근데 왜 물어본 거야?
-...그냥, 걱정돼서.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닐까 하고.
또 쓸데없는 걱정한다. 제논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리자, 제논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맨날 걱정만 한다니까, 나도 이런 거는 알아서 할 수 있는데 말이야.
그렇다고 이런 걱정이 꼭 싫다는 것만은 아니지만. 걱정하지 말라고 입술을 삐죽 내밀자 제논이 그걸 보며 쿡쿡 웃었다.
오늘은 아침 이후로 리디아도 조용하고, 방학 전까지 쭉 이랬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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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조금만잘게.”
피곤한 듯, 눈을 비비며 책상에 엎드리는 아이샤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학교에서 자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인데. 아무리 쉬는 시간이지만, 그래도 마이어씨와 싸우면서 꽤 체력을 소모한 걸까.
“음.”
엎드린지 얼마나 됐다고 새근거리며 자는 아이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은빛이 넘실거리는 블론드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부드러운 비단과도 같은 머릿결이 손가락 사이사이를 지나치고, 잠이 깨지 않도록 천천히 매만지기도 잠시.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아이샤가 아니라, 내 한심함에 대한 자조였다.
마루더즈의 간부와 싸울 때, 아이샤와의 격차를 몸소 체감했었다.
내가 그토록 힘들어하던 마루더즈의 간부를 단숨에 처리하던 그 힘.
물론 내가 둘을 처리하느라 지쳐있는 상태긴 했지만, 아이샤또한 헤라와 투랄리온을 상대하고 온 상황이었다.
나름 노력했다고 생각했다.
매일 같이 마이어씨에게 찾아가 이능을 훈련하고, 내 이능을 노력한 만큼 활용하면 아이샤를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내가 한 걸음을 내딛었을 때 저 멀리 뛰어가고 있는 아이샤를 발견했을 뿐이었다.
재능이라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내게 있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에 발을 내밀어 그 편린을 바라보는, 그 것은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내 동갑내기 수준에서는 적어도 내 수준의 이능을 지닌 이가 없었으니.
하지만 아이샤를 만나고, 결국 나는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항상 지켜지고, 도움 받기만 했다.
내가 구해줬다며 아이샤가 고마워하긴 했으나 그건 결국 아이샤가 해둔 것을 마무리만 한 것이 아닌가.
“...방법이 있긴 하지.”
지금 이런 식으로 훈련을 계속 해봤자, 결국 아이샤와 간극만 벌어질 터.
나중에는 아이샤의 곁에서 싸우기는커녕 평생 뒤만 바라보고 살 수도 있었다.
강해져야 한다.
그 옆에 걸맞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고민은 짧았고, 어느새 내 발걸음은 마이어씨가 있는 담당실로 향하고 있었다.
담당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보인 것은 평소와는 다른, 완전히 새하얀 타일로 가득한 넓은 공간이었다.
수련실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저 멀리서 마이어씨가 서있는 것이 보였다.
“마이어씨.”
“......”
무언가를 고민하기라도 하듯, 수심에 잠긴 표정의 그녀는 몇 번이나 불렀음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렇게 부르고 싶지는 않았는데.
“할머...”
“닥쳐 제논.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럼 대답을 해주셨어야죠.”
“도대체 50살이 왜 할머니지? 이해할 수가 없어.”
그럼 아줌마라 부를까요, 라고 하려했지만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아 그냥 입을 다물었다.
후우, 한숨을 내쉰 마이어씨가 아까보다 훨씬 수그러든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을 때 입을 열었다.
“훈련 그만두겠습니다.”
“...왜?”
눈살을 찌푸린 마이어씨가 나를 흘겨봤지만,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훈련을 그만둔다고 해서 이제 다 그만둔다는 소리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은 지금보다도 훨씬 높은 경지였다.
“주술식을 이식 받을 겁니다.”
“...다시 말해봐.”
“주술식을 이식...”
“너 미쳤어?”
아까와는 달리 진심으로 분노한 듯, 사납게 으르렁 거리며 그녀가 소리쳤다.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와 멱살을 잡은 그녀는,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입을 열었다.
“주술식을 이식 받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을 텐데.”
“알고 있어요.”
“도대체 이유가 뭐야? 네 재능은 뛰어나,꾸준히 훈련받으면 지금 에드윈 나이가 됐을 때 쯤엔 충분히 대적할 수 있다고 몇 번이나-”
“그렇게 되면, 아이샤는요.”
멱살을 잡은 그녀의 손을 천천히 내리면서,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주술식의 위험성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다만, 아이샤를 조금이나마 따라잡으려면.
앞으로 그녀가 겪을 위험을 조금이나마 막아내려면.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더 이상 아이샤가 카르멘과 엮이게 둘 순 없어요.”
여태 싸워왔던 모든 것은, 결국 아이샤가 있었기에 해낼 수 있던 것들이었다.
헤라를 잡고, 에드윈의 위상에 타격을 입혔다. 거기에 마루더즈라는 대규모 빌런 단체도 잡아냈던 것 까지.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아이샤가 없었으면 하지 못할 것이란 소리였다.
다치고, 또 다쳤다. 아파하고, 또 울었다.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현실은, 내게 너무도 잔혹한 진실이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더 강했더라면, 내가 그 모든 것들을 혼자 짊어졌다면, 그렇게 네가 다칠 일도 없었을 텐데.
“아이샤가 이걸 알면 좋아할 거라 생각해?”
“아니요.”
싫어하겠지.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다치는 것을 아이샤도 끔찍하리만치 싫어한다는 것을.
“그래도 할 거에요.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니까.”
“...병신 새끼.”
그녀의 욕설에, 피식 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모든 것을 혼자 끌어안을 거고, 내가 품은 사람들은 털끝하나 다치게 하지 않을 것이었다.
설령 내 몸이 부서져 다시는 사랑하는 사람을 볼 수 없다하더라도.
내 몸 하나쯤이야, 얼마든지 내줄 수 있었다. 애초에 삶에 대한 미련따위 저버린지 오래였다.
지금 보고 있는 이 현실이 그저 꿈만 같을 따름이었다.
내 옆에서 아이샤가 웃고, 나를 좋아한다 말해주고, 그렇게 서로의 체온을 전해주는 이 현실이.
내게는 그저 환상을 거닐고 있는 것만 같았다.
네가 늘 웃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 눈에서 다시는 눈물이 흐르지 않기를 원했다.
다치지 않고, 항상 좋은 것만 보기를 바랐다.
그렇기에 선택한 길이었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걸 알고 있음에도, 내가 이런 선택을 했다는 걸 알면 아이샤가 얼마나 화를 낼지 알고 있음에도.
“...주술식, 새기겠습니다.”
너를 지키겠다는 이 욕망을, 나는 차마 포기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