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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3화 〉몽환은 싫어(1) (103/115)



〈 103화 〉몽환은 싫어(1)

인간이 이능을 지닌 시점은 언제일까?
수 많은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했으나, 결국 현재에 와서 밝혀진 것은 아마도 호모 에렉투스가 지구를 지배하던 시절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능으로 발현된 불꽃, 그 불꽃으로 처음 인류는 발전을 시작하게 되었으니.

태초의 이능이 원소계라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원소계 이능은 고대부터 각별한 취급을 받아왔다.
원소를 다루는 이능은 지닌 이만이 왕족이, 황족이, 그리고 교황이 될 수 있었으며.
모두가 평등이란 이름 아래에 모인 현대에 와서도 원소계의 취급이 좋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원소계 이능을 대표하는 4개의 가문.

대를 이을 때마다 반드시 하나의 강력한 원소계 이능을 지닌 이가 타고났던 가문인데다,
그 시간이 무려 천 년에 가깝게 이어져 왔기에 현대에 이르러서도 재벌이라는 이명 하에 그들은 군림하고 있었다.

카르멘, 알레리아, 종, 그리고 메네실.

히어로를 중심으로 움직여지는 현재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이름이었으며,
히어로가 아닌  어떤 분야에서도 빠지지 않는 굴지의 존재들이었으니.

[76년만의 가주 회의! 에드윈 카르멘의 흠집이 부른 나비효과인가?]
[가주 회의에서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문제, 4대 가문의 자식들.]
[빌런과 유명 히어로의 협착관계, 과연 진실인가.]

그런 그들이 모였다는 사실은 언론과 사회에 일대의 파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주변이 시끄럽군요.”

노회한 인상을 지닌, 얼핏보면 50대로 보이는 남성이 입을 열자 옆에 있던 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수한 차림, 허나 그와는 완전히 다른 화려한 그녀의 외모는 주변의 이목을 이끌기에 충분했다.

허나 그녀에게 시선이 가는 이유는 단지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팔에 새겨진 하나의 문양, 활과 화살촉이 새겨진 문신은 오직 이 세상에 하나의 이름을 가르켰기 때문이었다.

“가주회의가꽤나 오랜만에 열렸으니까 그렇죠. 아마 제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열렸던 걸로 기억하는데.”
“생각해보면 알레리아의 동냥과 이리 만나는 것은 꽤나 오랜만이군. 그렇지 않은가?”
“동냥이라기엔, 이미 40대가 넘었는걸요.”

알레리아의 가주, 윈드러너가 가볍게 웃자 남자또한 허허로이 웃어보였다.
언뜻 보면 친근해 보이는 그들이었지만, 그렇게 잠깐의 대화를 하는 사이에도 두 눈동자는 날카롭게 부딪혔음을, 오직 그 둘만이 알고 있었다.

“카르멘가나  쪽이나 골치가 꽤나 아프겠군. 후계를 이어받을 아이가 빌런이라니. 참으로 안타까워.”
“...뭐, 어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자식 교육을 잘못 시킨 저희 탓이죠.”
“그대의 탓을 하는  아니네. 다만, 이번 일로 4대 가문의 위상이 깎인 것이 참으로 유감스러울 뿐이야.”

윈드러너의 눈빛이 서늘해지자, 남자는 재빨리 뒷말을 덧붙였다.
반목은 안 되지 반목은,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는  멀리서 다가오는 한 남자를 보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이보게 에드윈!”
“...메네실인가.”

언제 들어도 참으로 서늘하고, 소름끼치는 저음이었다.
한 겨울에 내리는 서리마저 그토록 시리지는 않을 터인데,

그에게 말을 건 남자. 드웨인 메네실은 반갑다는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갑자기 가주 회의를 열다니, 우리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고 있는가? 혹여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자네의 딸 때문이라면, 열었더라도 진즉에 열었어야 했을 텐데.”
“...부를 만한 이유가 있으니 전원을 부른 거다. 뇌가 있으면 생각을 하도록.”
“언제 들어도 참으로 버릇없는 놈이야! 허허, 하지만 그래서 자네가 좋은 거지.”
“늙더니 뇌가 썩은 건가. 아무튼 들어가지, 종가는 이미 안에 있다.”

에드윈 카르멘이 읊조리자, 윈드러너는 그런 그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는  싸늘한 기색을 물씬 풍기며 그를 스쳐지나갔다.
툭, 일부러 에드윈 카르멘의 어깨를 친 그녀였지만,
에드윈 카르멘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시선을 드웨인 메네실을 향해 옮겼다.

“이번에 큰 협력이 필요하다. 메네실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을 거고.”
“큰 협력에는 무엇이 따르는 지 잘 알고 있을 텐데?”
“달을 주겠다.”

달,  말에 드웨인 메네실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가 말하는 달이 하늘 높이 떠있을 달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말이 얼마나 큰 반향을 일으킬지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반짝이며 계산되기 시작했다.

“...진심인가?”
“어차피 우리가 이룰 목표는, 결국 함께 협력해야 이룰  있는 것이니까. 물론 진심이지.”
“크하하하!”


드웨인이 호탕하게 웃어보였음에도, 에드윈 카르멘은 여전히 무감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좋아.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협력해주지. 뭔가, 나에게만 말할 내용인가?”
“아니, 다른 가주들도 전원 알고 있어야 하는 내용이지만...자세한 건 따로 첨부하지.”
“그렇군. 다른 가주들도, 라.”

잠시 턱을 괴며 생각에 잠긴 드웨인이었지만, 이내 괜찮다는 계산에 다시 씨익 미소를 지었다.
따로 첨부한다는 말이 꽤 맘에 들지 않은가. 거기에 달이라니, 어지간히 험한 의뢰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달이 가진 효용성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성국에 영향력을 끼칠 수도 있겠군.’

꽤나 어지러운 상태였던 성국을 떠올린 그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76년만의 가주회의, 어쩌면 단단히 굳어져 있던 히어로 사회에 큰 파문이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아무도 그 내용을 모를, 오직 이 세상에서 단 4명만이 아는 가주 회의가 시작되었다.

#

“흠.”

가주회의라, 스마트 워치 한켠에 ‘속보’라며 올라온 기사를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원작에서도 가주회의가 열리긴 했는데, 어째 시기가 조금 빠른 듯 했다. 조금 다급하게 열렸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소식을 긍정, 부정으로 따지자면 당연히 부정적이었다.

이 이후로 빌런들이 만드는 대규모 조직이 계속해서 등장했고,  등장은 내가 마지막으로 보던 내용이 나올 때까지 이어졌으니까.

“가주회의, 그리고 빌런.”

이 두 개의 연관점을 생각할수록 드는 생각이란,  세계관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암울하다는 것이었다.

“히어로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가문이 사실은 빌런이라니.”

헤라 카르멘가지고 무어라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차라리 아포칼립스라면 싸그리 죽은 상태라 이런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 힘으로 부딪히면 되겠지만,
아쉽게도 이 세계관은 사회와 언론이 건재하게 남아있는 곳이었다.

“단순히 힘으로 때려 박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거겠지.”

그리고 아직 힘이 한참 모자라기도 하지.

“에휴.”

한 차례 한숨을 내뱉은 나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시선이 바닥에 누워있는 한 사람에게 닿았을 때, 걱정으로 얼룩져 있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잘 자네.”

새벽에는 조금 힘들어하더니, 나를 꼭 껴안고서는 아주 잘만 잤다.
혹여 정신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 내가 막으려 했던  때의 트라우마처럼 스트레스가 생기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지금 보면 뭐, 나름잘 해결된 것도 같아 마음이 놓였다.

“눈에서 꿀 떨어진다.”
“까, 깜짝아.”

언제 들어온 건지, 제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린 마이어씨가 씨익 웃으며 제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들어오시면 어떡해요.”
“내 담당실이야. 애초에 여기서 잔 건 너희잖아.”

 껴안고 말이야, 그 말에 내 얼굴이 화악 붉어지자 마이어씨는 키득거리며 입을 손으로 가렸다.

“그래서, 좋았니?”
“...뭐가요.”
“막 그렇게 껴안고 자면 좋냐는 말이야. 막 두근거리고 심장이 쿵쿵 거리고 그러지?”
“아니, 하...”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녀는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방긋방긋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언뜻 보면 놀리고 있는  아닐까 고민이 될 만큼.

내 눈매가 마침내 좁아지자, 그녀는 미소를 차츰 지우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다행이야. 제논이 요 일주일동안 꽤 힘들어 했거든.”
“...그렇다더라구요.”

제논이 말한 것도 있지만, 잠을 자는 제논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들도.
확실히 제논이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잠시 그 기억을 떠올리던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그녀는 그런 나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뭐, 강요는 아니지만. 앞으로도 종종 같이 있어줘. 이제 다 끝나면 꼭 붙어있으려나?”
“...아마 바쁠 걸요.”

가주회의를 생각하며 대답하자,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어머, 벌써 권태기?”
“아, 진짜.”
“장난이야. 사실 나도 제논한테 꽤 미안한 게 많거든.”

부드럽게 시선을 내린 그녀는, 이내 제논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시선이 향하는 것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분명, 미안함이리라.
그녀가 어째서 제논에게 이렇게 미안해하는 건지  수는 없었지만, 그 감정이 사실이라는 것만은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나 강인해보였던 그녀의 눈이, 저토록 흔들릴 리가 없을 테니까.

“네가 잘, 보살펴줄 수 있겠니?”

어쩐지 내게 부탁하는 마이어씨의 모습이, 꼭 부모님을 보는 것만 같아서.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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