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몽환은 싫어(2)
“나 갈게.”
제논을 만나기로 약속한 것도 결국 하루, 이제는 슬슬 집으로 돌아가 원래 계획했던 걸 할 시간이었다. 내가 손을 흔들며 인사하자, 제논은 비몽사몽한 얼굴로 애써 손을 흔들어보였다.
앞으로 3일, 그 시간동안 못 보는 게 조금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이제 자기입으로 괜찮다고 했으니까.
“괜찮은 거지?”
“응.”
어쩐지 아쉬워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나나 제논 모두 알고 있었다. 이제 슬슬 헤어질 때가 되었다는 걸. 어차피 영원히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냥 3일 정도 떨어지는 거니까. 조금 길게 느껴지긴 하겠지만 연락을 할 거고.
“어떻게 참아봐야지.”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는 제논을 향해 피식 웃자, 제논도 따라 웃더니 내게 손을 흔들었다.
“잘 가. 너무 걱정하지 말고.”
“...그래. 걱정 안하게 좀 해줘.”
“내가 애냐.”
그 말에 빈정 상한 듯 제논이 입술을 삐죽였지만, 이내 다시 웃으며 등을 돌렸다. 한 시간이라도 빨리 이능에 익숙해지겠다더니, 진심이었나 보다. 그렇게 제논이 안으로 들어가자 마이어씨가 담배 쥔 손을 휘휘 저었다.
“그래, 나한테 말해주겠다는 건 지금 말 할 거냐?”
“흠, 일단 내일 말씀드릴게요.”
마이어씨한테 전해야 할 얘기는 내가 꿨던 꿈, 원래라면 새벽에 꿈을 확인했어야 했지만 제논과 같이 자게 되는 바람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샜다.
이제 집에 가서 확인해봐야겠지.
그나저나 마이어씨도 꽤 궁금해하지 않을까. 내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라 처음에 말씀드렸으니. 그런 마음에 마이어씨를 쳐다봤지만, 의외로 그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뭐, 그래. 네가 뭘 본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편할 때 말해줘. 가장 궁금한 건 너일테니까.”
“담배는 그만 피시고요.”
“...알았어. 뭐 이런거 까지 참견이야. 치.”
혀를 한 번 찬 마이어씨는 물고 있던 담배를 허공에 휙 던져 사라지게 하며 나를 바라봤다.
“그래, 다음에 보자.”
“네.”
고개를 끄덕이자, 머리에 손이 얹어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색한 손길로 내 머리를 몇 번 쓰다듬은 마이어씨가 이내 살짝 웃자, 나도 따라 웃었다.
이제는, 꿈을 만날 시간이었다.
#
아련을 완성시키자고 결심한 그 순간부터 내 머릿속에 맴돌던 가설은 거의 확신이 되었다. 마치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정답이라는 것처럼, 이능을 사용하는 매 순간마다 미묘한 감각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저번에 제논과 함께 보았던 그 바다.
분명히 꿈 속의 내가 만들어냈던 이능이 보여준 풍경이었다. 마치 사진으로 찍어낸 것만 같은 그 광경이 현실에 남아있다는 것을 본 이상 내가 꾸는 꿈이 현실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거진 확정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아련을 완성시킨 지금.
내가 그 꿈을 다시 꿀 수 있는 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바로 잘까.”
하룻밤을 꼬박 세어 버린 터라 지금 내 얼굴은 그야말로 퀭한 상태였다. 졸음에 짓눌려 눈꺼풀도 반쯤 감겨 있었고, 잠을 잔다면야 당장 잘 수야 있긴 했지만.
혹여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 있을까, 하는 의문에 잠시 잠을 미룬 채 책상에 앉아 있었다. 저번에 꿈을 꿨을 때의 상태. 그 것을 떠올려보면 크게어려운 조건이랄 것도 없었다. 힘의 과도한 사용으로 인한 의식불명 상태, 그리고 새로운 검을 뽑은 상태.
“첫 번째는 해봤는데 아니었고, 남은 건 두 번째인데.”
기절할 때까지 이능을 써본 적이 있었지만, 꿈을 꾸지 않아 아련을 완성시키는 방향으로 돌린 것이었으니. 아마 두 조건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 한 꿈을 꾸는 것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그 외에도 오늘 처리할 약속이 있나 생각해봤지만, 아무래도 떠오르는 것이 없어 곧바로 침대에 몸을 뉘였다.
볼 수 있을까.
사실 내게 별 의미 없는 행동이나 다름없었다. 그저한 순간에 꿈일수도 있었고, 내 진짜 부모님도 아닌 그들은 사실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찾고 싶어 하는 건, 역시 그 ‘부모’라는 것에서 오는 감정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그들의 마지막이 어떻게 된 건지, 그 것을 알아내는 것이 아이샤라는 사람에 대한 도리인 것만 같아서.
나는 그렇게 눈을 감았다.
#
“...아?”
의외로 일찍 떠진 눈에 당황하기도 잠시, 주변을 가린 어둠이 내 방 안에 있던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애초에 내가 잠든 것은 낮시간이었으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볼을 주욱, 당겨봤지만 역시나 볼에서 아릿한 통증이 느껴져 왔다.
“설마.”
꿈 속에 들어온 건가. 저번과는 명확히 다른 감각이 의아하긴 했지만, 애초에 단 한 번 겪었던 경험이니 그 전과는 다를 거라 생각해 그리 당황하지는 않았다. 잠을 자기 전과, 다시 눈을 뜬 지금의 몸의 감각이 완전히 같다는 점은 조금 신기했지만.
그래도 저번처럼 작은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겠는가.
일단 여기가 어떤 장소인지 파악하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에 주변을 더듬거리며 광원을 찾았다. 깜깜한 어둠, 그렇다고 밖은 아닌 것 같고 아무래도 실내인 것 같은데.
그렇게 더듬거리다가 어떤 버튼에 손이 닿자, 이내 딸깍 거리는 소리와 함께 주변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긴 어디야...”
그렇게 눈에 들어온 풍경은 저번의 폐허를 생각했던 내 생각과는 달리 어떤 창고인 것처럼 보였다. 여러 개의 총, 그리고 아마도 탄약으로 보이는 상자는 이 창고가 군용 창고라는 것을 짐작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군용 창고라, 그렇다면 이번에 꿈속에서 볼 장소는 무슨 전쟁이라도 되는 건가.
순간 최근에 들었던 한 전투가 떠오르긴 했지만, 이내 머리를 흔들며 생각을 지웠다. 꿈은 애초에 내가 경험했던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여명 전투면 자기는 태어나기도 전이었는데, 도대체 이걸 내가 무슨 수로 꿈을 꾸나.
그런 생각에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래도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화약, 탄약, 거기에 총도 여러 다발 쌓여있고. 그러다가 한 구석에 쌓여진 신문을 조심스레 들자, 그 맨 위에 큰 글씨로 적힌 것이 보였다.
[이능 급진주의자들이 일으킨 전쟁, 과연 탑히어로는 해결할 수 있을까.]
[탑히어로가 밝히다, 전쟁의 승리를 위한 요건.]
[작전명 ‘여명’, 과연 태양은 뜨는가.]
“...여명.”
그 단어를 발견하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작전명 여명이라면, 내가 알기로는 그런 작전은 단 한 번 밖에 없었다. 레이 마이어씨가, 그리고 내 부모님일수도 있는 샤론, 아이크 이리안이 참전한 전투.
여명 전투 하나 뿐이었으니까.
처음에는 설마, 하는 마음에 다른 가능성을 찾아봤지만. 신문의 발행연도나 탑히어로라며 써진 기사에 언급된 이름을 볼수록 여명 전투가 벌여진 시간대란 것을 부정할 수 밖에 없었다.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본 기억을, 잊고 있던 것을 일깨워주는 그런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이 몽환(夢幻)은, 내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무언가인 것 같았다. 손에 쥐고 있던 신문을 조심스레 품속에 욱여넣고,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 창고에서 더 이상 찾을 정보는 없을 터, 만약 이 창고가 있는 곳이 여명 전투가 벌여졌던 그 장소라면 내가 확인해야 할 게 있었으니까.
“...아이크 이리안, 샤론 이리안.”
이전에 꾸었던 꿈에서 내가 보았던 것은 나와 완전히 닮은 여자였다. 만약 그 사람이 샤론 이리안이라면, 이 전투에서 죽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이 장소가 여명 전투가 일어났던 그 장소인지만 확인된다면, 어떻게든 접촉할 텐데.
그러다가 문득 내 옷을 바라보자, 이전과는 달리 군복으로 변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입고 있던 건 잠옷이었는데, 도대체 언제 바뀐 거지? 어차피 몽환이라 상관없는 걸까. 그런 생각에 거울을 보자 다행히도 얼굴은 그대로였다.
“옷은 바꿔줘서 다행인 건가.”
아무리 그래도 잠옷인 채로 돌아다니면 이상할 테니까.
그런생각을 하며 뒤를 돌아보았을 때,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대체 언제부터? 조심스레 고개를 돌리자, 나를 지켜보던 시선은 꽤 익숙한 사람의 것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늘 그렇듯 차분한 검은색의 눈, 가슴께까지 길게 늘어진 까만 머리카락은 내가 알던 것과 달랐지만 그 몸에서 풍기는 위세는 내가 아는 것과 똑닮아 있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훨씬 더 날카롭고, 차가운 분위기라 해야 할까.
아마 지금 시대에서는 ‘탑히어로’라고 불리고 있을, 레이 마이어를 바라보며 입 안의 부드러운 살을 살짝 깨물었다. 만약 내 정체를 물어본다면, 도대체 무어라 대답해야 하지? 그런 생각에 머릿속이 어지러운 찰나,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상관을 봤음에도 인사를 하지 않는 건가.”
“단결!”
겨우내가 군대에서 썼던 구호를 떠올리며 외쳤지만, 속으로는 아차하는 심정이었다. 여기서도 이 구호를 쓸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레이 마이어는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가볍게 대답했다.
“...단결.”
아무래도, 얻어 걸린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