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13화 (13/102)

00013 3. 불과 바람과 순리에 관하여 =========================

나는 일행으로 합류한 쌍둥이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걸었다. 도중에 아까 나보다 일찍 나가서 제 또래 귀족 아이들과 어울려 놀다가 통금 시간인 자정 직전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던 셀리아를 만나고 나는 불꽃놀이까지 보고 들어가겠다는 말을 대공과 일레인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목적지에 거의 도착할 즈음에, 악마니 뭐니 지껄일 때부터 알아봤지만 아무래도 내게 지대한 관심을 품은 듯한 세크네트가 나를 줄곧 물끄럼하니  쳐다보고 있길래 나도 눈을 맞췄다. 빤한 시선을 막상 마주하자 흠칫 어깨를 들썩이며 난처한 표정을 지은 그는 조심스레 변명했다.

"대공녀께서 제가 아는 누군가와 묘하게 닮으셨길래......헤헤."

어벙하게 웃는 게 그에겐 미안하지만 좀 많이 바보같았다. 의례용 미소를 띄우고 대꾸해줬다.

"아, 그런가요."

"네, 생긴 건 완전히 딴판이시지만 분위기나 말투 같은 게 닮았습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라니아 정도 되는 인간성을 닮기란 쉽지 않을 텐데. 호기심이 드는 김에 물었다.

"저를 닮았다는 분이 누구실지 궁금해지네요."

"쉿. 비밀입니다."

그럼 그렇지. 어차피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정상적인 대답은 기대하지 않았다. 입술에 검지를 갖다대며 씨익 개구지게 웃는 얼굴이 도저히 제 나이대로는 안 보였다. 세크네트야말로 내가 아는 누구랑 닮았군. 물론 그 치가 훨씬 더 영악하지만.

"이런. 제게 이렇게 짓궂은 사촌이 있는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헷. 제가 좀 짓궂죠!"

이 타이밍에 레테일의 제제나 하다못해 타박이나 뒤통수 후려치기라도 등장할 줄 알고 흥미롭게 세크네트를 지켜보던 나는 의외로 아무런 개입을 않는 레테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못마땅한 것 같기도 하고 연민하는 것 같기도 한, 사뭇 복합적인 감정이 어린 눈으로 제 형제를 티 안 나게 째려보고 있었다. 그도 잠시,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시선을 거두었다. 엘피샤는 나처럼 그를 관찰하다가 뭔가 알 필요 없는 것을 알아버렸는지 입술을 잘근 물고 고개를 홱 돌렸다.

근본 없는 궁금증이 밀고 올라와서 필요 이상으로 캐물으려던 찰나, 화약 터지는 소리와 함께 하늘이 밝아져서 무산되었다. 어느새 우리는 황궁 앞 광장에 도착해 있었다. 걸음이 멈추었다.

한국에서 윤이설로서 살 적에도 새해맞이 행사는 요란스럽고 시끌벅적했다. 정확히 자정이 되기 몇 초 전부터 단체로 모여 숫자를 세다가 해가 바뀌는 순간 종을 치고 불꽃놀이를 하는 등 아주 난리도 아니었지.

언젠가 그 분위기에 억지로라도 탑승해볼까 하고 불꽃놀이를 크게 한다던 어느 놀이공원 근처로 엄마와 함께 나들이를 간 적이 있었다. 수직으로 궤적을 그리며 솟아올라 큰 소리를 내며 터지는 색색의 불꽃이 하늘을 밝게 수놓았다. 엄마는 수많은 인파의 머리에 가려 고개를 빳빳이 쳐들어야만 했던 성가신 상황에서도 밝게 웃으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엄마가 기쁘면 그걸로 만족했다. 정작 나 자신은 이 작위적인 축제에 별 의미를 두지 못했대도.

피융! 거대한 빛가루가 황궁 지붕 위를 덮고 부스러졌다. 아까 엘피샤와 만났던 곳 언저리의 광장에 설치된 유서 깊은 종이 뎅뎅 울렸다. 해가 바뀌었다. 사람들이 환호하고 축복한다. 현대와 한참 동떨어진 복식이나 거리 전경을 빼면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다.

"워후! 끝내준다! 작년보다 돈을 더 퍼부었나 본데?"

"그렇게 신나냐? 애도 아니고 스물여섯 살이나 먹은 놈이."

"당연하지! 너야말로 순수한 동심을 잃은 거라고, 레트. 세상에 찌든 내 불쌍한 형제......흑흑."

"손 치워라, 꺾어버리기 전에."

"에이, 내가 내 쌍둥이한테 어깨동무 좀 하겠다는데 왜이리 까칠하게 구시나."

세크네트가 계속 치근덕대자 레테일은 일일히 대응하기도 귀찮아졌는지 저항을 포기했다.

"허......그래, 어디 네 마음대로 해라. 오늘만 봐준다."

꼭 희미한 그 기억 속에서처럼 쌍둥이는 각자의 방식으로 불꽃을 바라보며 축제 속에 합류했다. 들뜬 세크네트는 말할 것도 없고, 제 형제가 무슨 행동을 하든 일관된 반응을 보이는 레테일마저 얼굴 표정이 아까보다 훨씬 부드럽게 풀어졌다. 엘피샤는 불꽃놀이에서 새롭게 선보일 디자인의 영감을 떠올렸다며 즉시 핸드백에서 아이디어 노트를 꺼내 하늘에 펼쳐진 것들의 모양을 배껴 그리기 시작했다.

또 나만 혼자였다. 곁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정작 나는. 섞이지 못한 물과 기름처럼 언제나 일정량의 소외감을 느꼈다. 미처 이 세상에 편입되지 못한 이계의 인물이 내 전생이라 그런가.

그래 봤자 죽어 사라진 전생일 뿐인데. 더 비중을 두어야 할 쪽은 현재의 나, 라니아인데. 내 기본 바탕이 되는 사고방식은 거의 매 순간 라니아가 아니라 윤이설에게서 기인하곤 했다. 이제 단념해야 함을 알면서도, 어디부터가 나의 시작인지 단정짓지 못한 죄로 여지껏 유리되어서.

얼음장같은 바람은 습기 한 점 머금지 않고 자비 없이 몰아쳤다. 그 때, 머리를 단정하게 묶었던 끈이 맥없이 풀려 뒤로 휙 날아갔다. 자유를 얻은 머리카락이 마구 흩날렸다. 급히 손을 들어 정리했다. 그러나 찰나 바람의 방향이 반대로 바뀌어 이번에는 긴 머리카락이 시야를 침범하고 나섰다. 이런, 귀찮게.

입술에 달라붙은 백금발을 떼어내다가, 문득 시리고도 청량한 향이 다가와 뭉근하게 코 끝을 휘감았다. 강한 바람이 금세 흩어냈지만, 혀 끝에 남은 솜사탕의 달콤함처럼 여운은 길었다.

뭘까. 뭐지, 이건.

"아가씨, 여기 머리끈이요!"

마리가 어떻게 잡아챘는지 머리끈을 건넸다. 나는 왜인지 내 뒤쪽 어딘가를 향해 눈을 부라리던 엘피샤의 도움을 받아 머리를 다시 묶었다. 그리고는 생경한 감각이 눈을 뜬 듯한 기묘한 기분에 잠겨 잠시 멍하니 하늘에 눈길을 던졌다. 무언가의 잔상이 머릿속을 바람처럼 훑고 갔다.

"으, 그나저나 바람 진짜 많이 부네. 뭐 하나 날아가겠다."

"벌써 대공녀의 머리끈이 날아갔다가 돌아왔어."

"어이쿠."

레테일이 내 쪽을 곁눈으로 가리켰다. 나는 무의미하게 미소를 띄우고 고개를 까딱여 걱정하는 세크네트에게 문제 없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하지만 장갑 아래 감춰진 왼손 피부가 슬슬 땡기기 시작하는 게, 바람뿐만 아니라 습도도 심히 비정상이었다. 최근 들어 이렇게까지 건조한 적이 있었나. 이때다 싶어 혹시 몰라 챙겨왔던 보습제를 꺼냈다. 장갑을 벗고 적당량 덜어내 골고루 펴발랐더니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만족하며 뚜껑을 덮고 보습제를 팔에 걸린 핸드백에 집어넣으려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눈앞이 휘청 흔들리고 흐려졌다. 날카로운 이명이 귓전을 때렸다.

'아아......악! ......!'

누가 피를 토할 듯 처절하게 소리쳤다. 내 안에서 들리는 환청인지 아니면 어디 멀리서 내지르는 소리인지 구별이 안 갔다.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각각 행사를 즐기기에 바쁜 군중만이 눈에 들어올 뿐 수상한 것은 없었다.

소란스러운 곳에서 너무 오래 있었나.

환청인지 무엇일지 모를 것은 금세 사라졌으므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 또한 얼마 안 가 관심을 끊었다.

어찌어찌 불꽃놀이는 끝까지 구경하게 되었다. 어림잡아 삼십 분은 족히 터뜨리던 화약이 드디어 마지막으로 반구형의 밤하늘 전체를 가득 채우고 희뿌연 연기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뿔뿔히 흩어졌다. 마리는 불꽃놀이가 끝을 맺은 지 한참이 지나도록 황홀경에 젖어 헤어나오지를 못했고, 엘피샤는 훌륭한 아이디어를 얻었다며 좋아하느라 다른 건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로엔세르 외사촌 쌍둥이는 술 한 잔 하러 가겠다며 이만 우리 일행과는 헤어졌다.

유일하게 심리적 변동이 전혀 없었던 나는 엘피샤와 마리를 이끌고 혼잡한 구역을 벗어났다. 이제 할 만한 구경은 다 했으니 저택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엘피샤는 빌데론 거리에 있는 그녀의 의상실에서 아이디어를 정리하며 오늘 밤을 샐 생각이라길래 거기까지만 동행하고 보냈다. 마리는 나와 단 둘이 걸어 한적한 주택가로 들어서서야 조금씩 현실로 돌아오는 눈치였다.

"아가씨, 저를 데리고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것 아냐."

"그래도 제게는 두고두고 기억될 좋은 추억일 거예요. 주제넘지만, 아가씨는 정말 좋으신 주인입니다."

"내가?"

"네, 물론입니다."

생기 도는 동그란 눈이 반달 모양으로 접혔다. 죽은 눈이나 다름없이 냉막한 황가의 적안과는 달리 활기가 넘쳐흘렀다. 산처럼 쌓인 황금 더미에 올라앉아 모두를 내려다보는 오만한 족속들은 저마다의 방에 갇혀 편협한 불행에 휩싸여 사는데, 가진 것 하나 없이 궂은일이나 하며 살아온 평민 하녀는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알고 행복해한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세상에는 찾기 힘들도록 꽁꽁 숨겨진 더러운 진실도, 찬연한 진리도 너무나 많다. 아마 평생을 찾아 헤메도 다 파헤칠 수 없겠지.

"그렇게 말해주다니 고맙다."

그저 닿지 못할 것을 흉내내 웃었다.

새해가 도래한 그 날의 밤은, 해 진 뒤의 모래사막처럼 건조하고 바람이 많이 불었다.

***

1월 6일 늦저녁에는 동업자의 편지가 전서구를 통해 도착했다.

- 에빌에게.

이런 생일 선물은 난생 처음이야. 신선한걸? 역시 내 동업자는 뭔가 달라도 한참 다르다니까. 고맙다. 아, 그리고 수상한 것 아니니 의심 말고 받으라는 전서구 편지는 굳이 보낼 필요 없었는데. 내가 설마 발신자가 너로 되어있는 상자를 폭탄으로 의심하겠냐? 우리 신뢰관계를 재정립할 필요성을 요즘 급격히 느낀다......서운해, 서운하다고.

그나저나 이쯤이면 손의 상처 많이 호전됐어야 할 시점인데. 괜찮냐. 뭐 자기 몸에 희한하게 애착 없는 너야 흉터의 유무는 안중에도 없겠지만. 그래도 관리 잘 하는 게 좋을 거다. 주변 시선이 있잖냐. 아, 잠깐. 내가 어쩌다가 동업자에게 잔소리를 하는 신세가 됐지.

어쨌든, 저 멀리 서부에 틀어박힌 동업자의 생일까지 챙겨주는 너의 친절함에 감동하며, S.M.

PS. 약혼 축하한다. -

꾹꾹 눌러쓴 마지막 문장에 도사린 못마땅함이 느껴진다. 어련하시겠어. 웃음을 흘리며 그것을 세 번째 서랍 안에 던져넣었다.

그리고 내게 남은 일주일은 단 하루를 제외하고 싸그리 방 안에 틀어박혀 뒹굴거리는 데 썼다.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고자 하는 욕구가 인생 최대로 바닥을 찍어서였기도 하고, 할 만한 준비는 일레인과 황실 측 하수인들이 알아서 끝마쳐 놓아서였기도 하고.

시간을 낭비하다가 약혼식 전날에는 르쉬네의 저택에 다녀왔다. 편지를 보고도 모른 척 할 수 있다면 그건 내가 아니지. 이렇게 미련한 게 나다.

반역죄로 가솔 전원이 끔찍하게 사형당한 뒤 출입이 끊긴지 4년. 그렇게나 아름다웠던 숲 속의 검은 벽돌 저택은 그야말로 다 낡아빠진 폐가였다.

가시나무가 곳곳에 을씨년스럽게 자라 저택 주변을 뒤덮고, 말라붙은 담쟁이덤불이 한 술 더 떴다. 관리되지 않은 마당은 그야말로 엉망이었고, 철제 정문은 녹슬었으며, 자그마한 야생동물 몇몇이 내 기척을 느끼고 후다닥 도망갔다. 휑하니 입을 벌린 정문을 지나 저택 1층으로 들어가는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잠금이 풀려 있었던 탓에 쉽게 열렸다.

어두침침한 실내는 더 가관이었다. 퀴퀴한 먼지와 흙 냄새가 났다. 나와 르쉬네를 비롯한 어린 날의 친구들이 한데 모여 체스를 두던 널찍한 공간은 먼지가 두껍게 쌓였고, 지나가는대로 발자국이 찍혔다. 빠르게 직진해서 저택의 후원으로 연결되는 뒷문을 확 열어젖혔다. 햇살이 쨍하니 내리쬔다.

후원은 예상을 빗나가지 않고 망가져 있었다. 이름 모를 죽은 잎파리와 줄기를 헤치고 나아가 볼품없이 변해버린 장미 터널을 건너 계속해서 뒤쪽 구역으로 갔다. 내가 찾는 것은 구기자나무였다. 어디선가 씨앗이 날아왔는지 제멋대로 자리를 잡고 자라던 불청객, 딱히 예쁘지도 않은 자그마한 나무. 빨갛게 열리는 열매를 제외하고는 하등 쓸모없다며 툴툴대던 르쉬네가 기억난다. 지금이라도 저 덤불 뒤에 숨어있다 까르르 웃으면서 튀어나와 나를 놀래킬 것 같은데.

"르쉬네."

추운 겨울, 어느 구석진 갈색 풀밭 사이에서, 나는 조심스럽게 쪼그려 앉았다. 다정히 그 이름을 불러 봤다. 대답은 없다. 손을 뻗어서 못생긴 구기자나무를 쓰다듬듯 매만졌다. 그 때로부터 족히 4년은 지났는데 별반 자라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죽지도 않았다. 앙상한 가지와 그 끝에 분명히 자신이 생존했음을 알리는 작은 잎눈만이 굳건했다.

"파헤칠까요?"

데리고 온 하인이 작게 물었다. 나는 나무 앞에 묻어뒀을 테니 파 보라고 했다. 미리 가져왔던 모종삽으로 얼마 건들지도 않아 젖은 나무상자의 윤곽이 드러났다. 하인은 그걸 잡아 빼내더니 흙을 탁탁 털어 내게 주었다.

뚜껑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선물을 준다더니 정작 안에 들어있는 것은 맥 빠지는 낡은 종이조각 하나였다.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 꽝! 큭큭, 선물일 줄 알고 기대했지? 미안하지만 거짓말이었어. 그렇다고 이거 보고 화나서 나 때리면 안 된다? -

그래, 이게 르쉬네고 이게 나지.

1월 13일, 약혼식 당일. 오전도 모자라 오후까지 잡아먹은 치장 시간 때문에 이른 아침만 간신히 먹은 걸 빼고는 공복 상태다. 덕분에 스트레스 지수가 한계치를 뚫었다.

눈 아프게 새하얀 드레스가 치렁치렁 늘어졌다. 진주를 갈아넣고 다이아몬드를 박아넣은, 드레스가 아니라 보석 덩어리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을 초고가의 옷이었다. 목 아래부터 가슴 위까지와 팔 부분은 화려한 무늬로 실루엣이 들어가고 가슴부터는 바싹 감싸고 허리 라인을 강조했다. A자 라인으로 펼쳐지는 치맛자락이 햇빛을 받아 은하수처럼 반짝였다.

어차피 길어서 질질 끌리는 드레스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신발은 또 어찌나 하이힐인지,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이다. 그 뿐인가. 황실 대대로 내려오는 국보급 다이아몬드와 수정 범벅 티아라가 틀어올린 머리 위에 얹혀있고, 매우 섬세하게 세공된 제국의 문양을 본뜬 사파이어 귀걸이가 귓볼에 매달려있으며, 금과 은으로 엮인 목걸이가 목을 휘감고 있다. 아, 황실 직계 여인에게 주어지는 알 굵은 자수정 반지도 빼먹으면 안되지. 아주 그냥 날 모델로 해서 보석 전시회를 열지 그래? 참다못해 싸늘하게 미소지으며 황실에서 파견 나온 것들에게 화를 내자 연배상 어디 중요한 궁 하나의 시녀장쯤은 되어 보이는 노인이 공손하고 차분하게 딱 한 마디 던지더라.

"언행에 신중을 기해주십시오, 대공녀님."

그대로 욕지거리를 선사할 뻔했지만 한 가닥 남은 이성으로 붙잡았다. 참자, 참아.

일레인이 영 탐탁찮은 얼굴로 나를 배웅했다. 셀리아는 일레인의 허리를 둘러안고 고개만 빼꼼 돌려 울 듯이 나를 쳐다보면서 옷 예쁘다는 칭찬이나 던지고 앉았고, 대공은 딱히 별다른 감정 변화 없이 뒷짐을 질 뿐이었다. 그들은 나를 먼저 보내고 뒤따라 입궁할 것이다.

저택 정문 앞에는 황궁 소유의 격이 다른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내 도착을 인지한 마차 문이 열렸고, 그 안에서 눈밑이 짙은 라인하르트가 나왔다. 너는 내가 이 약혼식을 위해 점심도 굶은 걸 끝까지 모르겠지. 속으로 분통을 터뜨리며 그를 마주보았다. 마지막 자존심으로 인사는 생략했다.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멀뚱히 구경하다가 마찬가지로 인사 없이 손을 내밀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거절하고 싶었는데 귀찮기 짝이 없는 하이힐과 드레스 때문에 혼자 이 높은 마차를 오른다는 건 상상 못할 일이라서. 떨떠름하게 손을 붙잡았다. 라인하르트가 먼저 오르고 내 허리에 팔을 둘렀다. 드레스 자락은 시녀 하나가 들어주었고, 나는 거의 안기듯이 탑승했다.

마주앉아서 황궁까지 향하는 길은 그날따라 길고 지루했다. 유독 피곤한 낯의 라인하르트가 다른 때와는 달리 말을 걸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고, 종래에는 벽에 기대어 잠들어서였다. 긴장감 없는 건 이해하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나.

"라인하르트."

딱딱하게 그를 불렀다. 부스스, 눈을 뜬다.

============================ 작품 후기 ============================

《질문에 대한 리코멘》

•Lynn린 님 : 11화의 본편을 다시 잘 보시면 이해가 되실 거예요. 간단 요약해드리자면 라니아가 황실로 시집을 가서 라니아의 아버지인 2황자 (현 루 할레시온 대공)의 가족이 황태손의 처가로서 방계 황족의 지위마저 박탈당하고 진짜로 그냥 귀족 취급(대공가->공작가로 격하)을 받기 때문에 아예 루 할레시온의 모든 구성원이 황족이 아니게 됩니다! 황족 간의 근친혼이 존재하는 할레시온 황가이기에, 외척이 황족으로서 황위계승권까지 가지고 있으면 너무 위협적이니 이런 제도를 마련해 놓고 있는 겁니다

•버들꽃 님 : 인물 외모 묘사는 작품 설정에 추가해 두었습니다!

•seiren세이렌 님 : 네, 지금 현재는 황족으로서 가져야 할 위세보다는 한미합니다. 단, 이번에 결혼까지 성사되면 대귀족보다도 한미해질 게 분명하다는 뜻이었답니다! 그러므로 황태자가 라니아의 결혼을 성사시켜서 대공가의 힘을 더 없애버리면 처리하기 쉬워질 겁니다. 지금은 황태자라도 명분이 없으니 처리가 어렵죠~

《그냥 후기》

읽어주시는 분들 모두 정말 감사합니다! 투데이베스트도 감사해요! 이틀 연속으로 이럴 줄이야...정말 꿈같네요 8ㅁ8

+작품설정에 인물 외양 묘사가 추가되었습니다. 저번에 올린 황실 계보도는 모바일 버전에서는 그림이 많이 깨지는 것이 확인되었으니 pc버전으로 보세요.

++원래 네 파트로 이루어진 후기였는데 첫 파트는 다시 생각해 보니 적절치 않은 대처였던 것 같아 삭제합니다. 오래 남겨두고 비난하려는 목적이 아니니까요. 여기 쓰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지만 막상 올리고 보니 이것도 작가로서 부적절한 언급이었던 것 같아 후기란에 남겨두지 않기로 했습니다. 혹시 후기 첫 파트를 보신 분들 중에 언짢으신 부분이 있었다면 죄송합니다. 잠시 신중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아람닻별 님 맞춤법 수정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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