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3 Bridge 1. Reinhard Enrique Harlesion : 개기 일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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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빛의 온도를 가까이 가서야 알아차렸다. 찬연한 온기를, 쨍한 햇살을, 황금빛 태양을. 왜 그 날은 오판했던지. 이렇게나 온전한 태양인데.
라인하르트는 다시 이 년이 지난 후에야 라니아가 자신과 다른 존재였음을 깨달았다.
"라니아."
열일곱, 이제는 청년이 다 된 라인하르트가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무구한 얼굴을 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부르면 이렇게 똑바로 쳐다봐 주는 사람이 그의 곁에는 몇 없었다. 기껏해야 그녀와 르쉬네, 에단과 프리드리히, 세크네트가 전부였다.
"응?"
"무얼 그리 봐?"
"아, 별 거 아냐. 그냥 길거리가 예뻐서."
"그건 그렇군."
라인하르트는 가만히 수긍했다. 아까 이 카페로 오기 위해 함께 걸을 때는 거리가 휑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2층의 독립된 테라스석에 마주앉은 그는 푸딩을 조금씩 떠먹는 라니아를 얌전히 지켜보았다.
여덟 살 이후로 칠 년 동안 라니아는 많이 컸다. 물론 그녀의 키보다 그의 키가 훨씬 더 많이 컸지만. 라니아는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는 그의 키를 두고 얄밉다고 칭했었다. 라인하르트는 불퉁한 표정을 짓는 라니아가 얄미웠다. 언제까지고 아이같을 줄만 알았던 그녀와 그와 르쉬네와 에단은 너무 빨리 자라버렸다. 특히나 라니아가. 머리 하나는 차이가 났던 키는 여전히 딱 그 정도 차이가 나지만, 결과적으로 라인하르트의 키가 상당히 훤칠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라니아는 또래 중에서는 큰 편에 속했다. 르쉬네가 꼬집어주고 싶다고 표현했던 통통한 볼살은 어디로 쏙 들어가고 성인 여성에 가까운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세간에서 당대에 손꼽히는 절세가인이자 현 황후인 네피아의 판박이라고 표현할 만큼 미인으로 자라났다.
라인하르트가 보기에도 라니아는 예뻤다. 그 중에서도 웃는 모습이 가장 예뻤다. 보고 싶었다. 충동적으로 다시 이름을 입에 올렸다.
"라니아."
"왜 또 불러? 오늘 이상하다, 너. 평소에는 내가 이거 다 먹을 때까지 아무 말도 않고 멀뚱히 구경만 하더니만. 아, 진짜 그러고보니 너 여기서 만날 때마다 그러더라? 아무것도 안 먹고. 난 네가 뭘 주문하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먹으러 오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그걸 이제 알았어?"
라니아는 자신의 무관심함을 탓하는 듯한 그의 말에 찔리는지 애매하게 웃었다. 아니야, 그거 말고. 그저 꾸밈없이 웃어 줘.
"미안. 난 너처럼 앞에 앉은 사람을 관찰하기에는 이게 너무 좋거든. 너도 먹어볼래?"
"됐다."
"삐지기는. 자, 아 해봐."
"뭐 하는 거야."
"괜찮아. 이건 내가 먼저 먹어서 독 검사 다 마친 거니까. 아 해보라니까?"
"누가 독 때문에 안 먹는대? 못 말린다, 정말."
그는 마지못해 라니아가 주는 것을 받아먹었다. 생각외로 황궁 주방장의 것보다 맛있어서 놀랐고, 그녀의 입이 닿은 숟가락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또 놀랐다. 그러나 겉으로는 태연할 따름이었다. 칠 년간 라니아와 친구로 지내면서 그는 그녀 특유의 뻔뻔함을 배웠다. 라인하르트는 몰랐지만 라니아 역시 그의 냉철하고 이성적인 판단력을 배웠다.
"맛있네."
"거 봐, 좋아하면서."
"좋아하지."
"응?"
"푸딩은 나도 원래 좋아해. 너 먹는 거 보고 황궁에 돌아가서 주방장에게 만들어 달라 한 적이 있었다. 기대는 안 했는데 네가 하도 맛있게 먹기에. 의외로 괜찮더라."
"아하."
라니아는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다시 푸딩에 집중했다. 라인하르트는 어렵게 시간을 내어 만난 자신보다 푸딩이 우선이라는 것이 조금 자존심 상했으나 제국 위에 군림할 황태손답게 티 내지는 않기로 했다.
구석에 걸린 시계의 분침이 소리 없이 스르륵 움직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푸딩 그릇이 말끔히 비워졌을 때, 라인하르트는 예전부터 벼러왔던 것을 묻기로 결심했다.
"라니아."
"와, 벌써 세 번째야. 그래, 이번에는 뭐 때문인데?"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
그녀는 뭘 새삼스러운 것을 묻냐며 피식 웃었다. 순간 말문이 막힐 뻔했지만 라인하르트는 꿋꿋이 말을 이었다.
"그 때 너는 친구가 되면 네 비밀을 말해주겠다 했지."
입가에서 서서히 웃음이 사라진 것은 그 때였다. 라인하르트는 자신이 잘못 물어봤나 싶어 불안해졌다. 그러나 라니아는 곧 다시 입가에 웃음기를 머금고 대꾸했다.
"그랬지."
"칠 년이 지났어. 우리는 이제 친구라고 할 수 있을까?"
"당연히."
라니아는 망설임도 없이 술술 대답했다. 이미 그녀는 머릿속으로 자신의 비밀을 이 세계에서 태어난 이래 두 번째로 말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럼 말해줘. 네 비밀."
"좋아. 한 번만 말해줄 거니까 알아서 잘 기억해."
직원이 들어와 푸딩 그릇을 거둬가고 나서, 라니아는 조곤히 자신의 전생 이야기를 시작했다. 길고 복잡한 십칠 년간의 기억을 줄이고 삭제해서 적당히 이 세계에 뿌리박고 살아가는 그에게 충격을 주지 않을 정도로 갈무리했다. 끝까지 다 듣고 나서도 인상을 약하게 찌푸리고 머리를 굴리던 그가 확인용으로 물었다.
"그러니까......너는 네 전생을 기억한다는 거야? 그 전생의 너는 이 세계가 아니라 다른 세계에서 살았고?"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인 것은 분명했다. 납득은 더더욱 어렵고. 라니아가 굳이 조건을 달고 시간을 끌면서까지 숨겼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라인하르트는 그녀가 옳았다는 것을 인정했다.
"제대로 들었네."
"그래서 나는 누구여야 하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던 거였군. 지금은 답을 찾았어?"
"찾았어. 난 그냥 라니아 에빌 할레시온이라고 결론을 내렸지. 한 이 년 전쯤에. 이 이야기를 제일 먼저 들은 르쉬네가 그랬거든, 현재에 집중하라고."
살며시 턱을 괴고 있던 라니아는 테라스석에 오래 앉아 있어서 추웠는지 팔짱을 꼈다. 완연한 가을이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겨울이 올 터였다. 그녀는 가끔 감기에 걸리는 것 빼고는 언제나 건강했지만, 라인하르트는 걱정이 되어 입고 온 외투를 벗어 내밀었다. 사양하려 했으나 끝내 코트가 그녀를 감쌌다. 아직 그의 온기가 남아있었다. 문득 그의 옷에 밴 장미허브 향이 코 끝에 닿자 라니아는 생소한 감상에 휩싸여야만 했다.
"현명한 결론이다."
라인하르트는 흐뭇하게 미소지었고, 라니아는 혀 끝으로 어쩌면 이 상황에 맞지 않을 말들을 굴리다가 이만 포기하고 그에게로 차례를 넘겼다.
"넌 어때? 황태손으로서의 너와, 라인하르트로서의 너 중에서 선택했어?"
선택했다고 말하면 거짓이 된다. 그러니 대답은 부정의 의미를 담아야 했다.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는 예상했다며 친구의 이름을 언급했다.
"르쉬네가 맞았네, 역시. 그 친구는 네가 답을 고르지 못했을 거라고 예상했어. 그리고 만약 그럴 때 해줄 수 있는 조언까지 내게 대신 전달해줬지. 괜찮다면 들어볼래? 내가 듣기로는 꽤 설득적이던데. 넌 어떨지 모르지만."
"들어보지. 나쁠 건 없으니까."
그의 허락이 떨어졌다. 라니아는 할 말을 나름대로 깔끔하고 간결하게 정리한 뒤에야 여상한 어투로 말을 꺼냈다.
"르쉬네가 말하길, 너는 황태손으로서의 너 쪽을 선택해야 한대."
"왜지?"
어린 날 가졌던 불만이 바람에 불씨가 화르륵 타오르듯 되살아났다. 여전히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었던가. 라인하르트는 내심 자책했다. 그러나 라니아의 다음 말에 모든 생각은 썰물처럼 빠르게 빠져나갔다.
"네가 그렇게나 좋아하고 동경하는 황궁 밖 세상이 계속 아름답게 남아 있으려면 네가 훌륭한 황제가 되어야 하니까."
정곡을 찔렸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을 지금껏 외면하고 간과해 왔기에 그것은 더 따끔한 깨달음을 주는 말이었다. 라니아는 그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평소와는 사뭇 다른 눈을 했다. 언뜻 무감한 듯 보이지만, 실은 그 안에 현실적인 염려와 다정함을 담고 있음을 칠 년 동안 친구로 지내온 라인하르트는 알았다.
"때로는 지켜볼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이 있어, 라인하르트. 내가 꽃을 굳이 꺾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서 감상하는 걸로 끝내듯이. 또한 각자에게는 역할이 있어. 꽃은 다음 생을 기약해야 하는 역할이고, 나는 꽃의 염원을 존중해 주는 역할인 거지."
꽃과 라니아, 제국민과 그.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명쾌했다. 이건 르쉬네가 할 만한 말이 아니다. 적어도 라니아는 되어야 가능했다. 그의 입장을 들여다보듯 훤히 궤뚫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기에 그는 그녀가 자신을 특별히 여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라인하르트가 물었다.
"이거 네가 생각한 말이지?"
"......어떻게 알았어?"
"그냥. 내가 너라도 조언을 해주고 싶을 때 다른 이의 입을 빌릴 것 같아서."
"호오. 너 이젠 나랑 생각하는 방식도 비슷해진 거야?"
"아마도."
라인하르트는 그 순간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어느새, 그는 그녀를 닮아가고 있었다.
*
그 해 늦가을, 라인하르트는 개기 일식을 보았다.
친구 하나를 죽였고, 친구 하나를 잃었다.
르쉬네가 주었던 루드베키아를 무참히 꺾어 내다 버리면서, 그는 참을 수 없는 배신감에 잠겼다.
가장 믿었던 세 명의 친구 중 하나가 3황자를 도와 반역 준비를 주도했다. 힘이 되어주리라고 믿었던 자들이 그 일에 동참했다. 열세 살 무렵 함께 놀던 귀족가 자제들과 친구들을 모아 '모임'으로 정의내리고 귀히 여기기 시작하면서부터 쌓아온 유대가 한순간에 무너졌다.
지켜주고자 했던 꽃들이 그를 공격했다. 라인하르트는 르쉬네를 처형하라 명한 날 이후로 잠을 이전보다 더 이루기 힘들어졌다.
라니아는 반역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그가 잃은 가장 소중한 꽃이었다. 언젠가 그녀에게 선물했던 거울의 상처럼 서로는 들여다보면 볼수록 닮아 있었다. 많은 것을 공유하고, 또 많은 것을 공감하고. 의지했었는데.
르쉬네가 죽고 일주일 정도가 지난 어느날. 라인하르트를 찾아온 라니아는 울면서 그에게 끔찍하다 말했다. 어떻게 친구를 죽일 수 있느냐고, 제정신이냐고 따져물었다. 르쉬네가 자신의 첫 친구였던 건 기억하냐고 묻기도 했다. 당연히 기억했다. 하지만 그게 르쉬네의 처벌을 막는 데 무슨 효력을 가지지? 친구라는 관계가 무고를 증명하지는 않는다. 완전히 별개의 사실을 들먹이는 라니아에게 라인하르트는 다른 종류의 배신감을 느꼈다.
"너만은 내 입장을 알아주리라 생각했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궤뚫고 있다고 믿었다. 왜 소중한 친구를 살려주지 않고 극형에 처해야 했는지, 왜 모임을 파하고 그 구성원 다수로부터 지위와 명예를 비롯해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박탈해야 했는지. 이해해주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착각이었나.
라인하르트는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고개를 숙이고 하염없이 눈물을 떨구는 라니아를 망연히 내려다보았다. 여덟 살의 라니아가 자신에게 처음으로 보여주었던 텅빈 눈, 그 후로도 가끔씩 보이던 그 감정 없는 눈빛이 그에게로 옮겨왔다. 핏빛 적안의 깊숙한 안쪽에 숨겨진 채 폭풍처럼 휘도는 지독한 분노와 아득한 슬픔을, 같은 빛의 눈에 격렬한 아픔만을 흘러 넘치도록 담은 라니아는 발견치 못했다. 단지 울음 섞인 한 문장을 비수 삼아 그의 가슴에 푹 꽂아넣었을 뿐이다.
"르쉬네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 네게 해 줄 위로는 없어, 황태손."
어차피 당시의 그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말이었다. 그렇기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결국 라니아는 그에게 절연을 고했다. 그는 차마 매달리지도 못했다. 수없는 말들과, 끝없는 감정을 굳게 다문 입술로 각자의 마음 속에 눌러담으면서. 마침내 그들은 등을 돌리고 정반대의 길을 향해 한 발짝 내딛었다.
라니아는 떠났다. 그녀가 주저앉아 눈물 흘리던 자리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깊어지는 마음과 힘겹게 거두어냈던 시선들이 후회스러워서, 라인하르트는 뻐근해지는 눈을 꾹 감았다. 그래도 새어나오는 흐느낌은 어찌 막을 방법이 없었다.
*
다시 그로부터 사 년.
얼음 같기도 하고, 불길 같기도 하고, 황금빛 태양 같기도 한 라니아는 이제 뒤섞이고 무뎌져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라니아는 그동안 어른이 되어 사교계에 데뷔까지 마쳤지만 그뿐이었다. 그녀는 칩거했다. 뒤늦게 대화를 청하는 편지를 여러 번 보냈지만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잘못했노라고 말하고 싶었다. 자격 없지만 그녀가 더는 부서지지 않게 할 거라고 말하려 했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그녀로 인해 그러지 못했지만.
그가 직접 추진한 약혼이 결정나고, 이를 알리려 반쯤은 강제로 불러내고 나서야 수 년만에 제대로 마주한 라니아는 차가웠다. 차갑다 못해 냉혹했다.
'살인자 주제에 내게 예전과 같은 관계를 기대하지 마.'
'그 반역 문서는 3황자가 연막책으로 내세운 조작이었어! 제 반란을 들키지 않으려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 거였다고!'
못박힌 증오와 알지 못했던 진실을 뱉어놓고 돌아선 뒷모습이 그를 냉랭하게 질타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당시의 자신이 짚어내지 못한 맹점이 무엇이었는지 깨닫고야 만 라인하르트였다. 또다른 후회와 더 깊게 패인 자괴가 이미 빛이 바랜 추억을 한층 잔인하게 짓밟아버렸다.
우리는 이제 친구라고 할 수 있을까.
그 때의 그 질문을 다시 하면, 그녀는 아니라 대답하겠지. 라인하르트는 이미 그녀를 닮아 있었기에 그녀 입장에서 조금만 생각해보면 낼 수 있는 결론이었다.
그는 절망했다.
카리스티아에서 다시 본 라니아는 처음 만난 날처럼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잘 어울렸다. 근자에 황태자의 경계대상에 포함된 귀족 가문인 멘데로프 백작가의 후계자가 자신 대신 곁에 있는 것이 거슬렸지만, 그것 또한 라니아가 원하는 일이라면 양보할 수 있었다. 저지른 죄가 있으니 큰소리 칠 자격도 안 되었다.
프리드리히의 여동생을 대타 삼아 춤을 추면서, 시선은 올곧게 그녀에게로 향했다. 라니아는 또다시 그 비어버린 눈을 하고 솔지아 궁의 전경을 훑었다. 저럴 때는 시답잖은 농담이라도 건네 줘야 눈빛이 돌아올 텐데. 그는 익숙하게 대처법을 떠올렸다가, 그래줄 수 없음을 상기하고 울적해졌다. 그러다가 생전 안 틀리던 쉬운 동작에서 실수를 하고 말았다. 발을 밟힌 스카일러 영애가 눈을 흘겼다. 그는 멋쩍게 눈짓으로 사과했다.
그러고도 정신을 못 차린 눈은 자꾸만 흘깃 그녀를 훔쳐보았다. 멍하니 가라앉았던 적안이 샤카르 멘데로프의 등장에 거짓말처럼 반짝이며 돌아온 것도 그 와중에 보고야 말았다.
춤 시간이 끝나고, 라니아와 싸움이 붙은 이리스 세이잔이 대치 끝에 유리잔을 날려 상해를 입히는 장면을 목격했다. 놀라 달려갔지만 화를 내기에 한 발 물러서야만 했다. 그는 그 날카로운 반응을 통해 싸움의 주제가 아무래도 자신과 관련된 것 같다는 추측에 접어들었다.
그런 짓을 한 이유야 어쨌든 라인하르트는 그녀만큼이나 화가 나서, 도망치는 이리스 세이잔을 쫓아가 지금껏 한 번도 여자에게 써 본 적 없는 폭력을 행사했다. 난데없이 뺨을 맞은 이리스는 울며 털썩 주저앉았고, 라인하르트는 냉정하게 돌아서서 프리드리히에게 황궁의를 총소집할 것을 명했다. 그들 중 몇이 라니아에게 붙어도, 심지어는 아예 저택까지 따라가 거기서 몇 달이고 기거하며 전담 치료를 맡아도 상관없으니 그녀에게 집중해 달라는 요청도 함께였다. 그가 할 일은 여기까지였다. 더는 감정적인 면에서 곁에 있어줄 수가 없으니.
나중에 받은 보고에 따르면 라니아가 라인하르트 대신 부상을 입은 자신의 곁에 남아 있도록 선택한 자는 샤카르라고 했다.
사 년이 지났다. 그동안 너는 다른 사람을 찾았구나. 안도와 아쉬움을 품은 옅은 한숨이 잇새를 비집고 나왔다. 강한 듯 굳건한 무표정으로 버티고는 있지만, 사실 그 속의 내면은 여리다는 것을 라니아와 칠 년간 교류했고 이후 사 년간 지켜봤던 라인하르트는 모르지 않았다. 자신이 아닌 누구라도 괜찮으니 곁에 한 사람이라도 두었으면 했는데, 그것이 생각보다 빨리 실현되었다는 것만 빼면 샤카르라는 존재의 출현은 다행스러웠다.
그렇게 라니아의 세상에서 제거된 상태로 가만히 있는 대신, 라인하르트는 변한 상황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았다. 그것이 바로 약혼이라는 카드였다.
라니아는 언제까지나 숨어 살 수는 없다. 고귀한 혈통은 존재만으로도 죽음의 위협을 받고, 몰락의 길 앞에 서 있어야 할 운명이니까. 피할 수 없다면 맞서야 한다. 모든 연줄과 관계를 끊고 고립된 채로 살다가는 끊임없이 닥칠 비극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라인하르트는 약혼을 통해 그녀에게 권력을 쥐어주기로 했던 것이다. 가만히 앉아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위험부담을 지더라도 강해져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 하는 편이 낫다. 그 위험부담이야 그와 황태자가 살아있는 한 어차피 언젠가는 루 할레시온 가문이 짊어져야 할 정해진 미래이고,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상 제대로 현실화되지 않을 테니 지금 부여한다고 딱히 더 불리해지지는 않으리라. 자신 또한 쉽게 불온한 자들의 뜻대로 되지 않도록 전적인 지원을 할 생각이고.
그로서는 자신의 잠재적인 적에게 힘을 실어주는 셈이지만 그런 건 아무렴 상관없었다. 지친 사람은 라니아만이 아니었다. 라인하르트도 살아남으려 친인들을 죽이는 자신의 삶에 진절머리가 났다. 라니아의 적이어야 하는 황태손이라는 이름에 환멸을 느꼈다. 사 년 전에 겪었고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겪어야 할 그 끔찍한 후회가, 거대한 죄책감이. 왜 꼭 그의 몫이어야만 하는가? 이것이 정녕 제국을 다스리는 자의 숙명인가? 라인하르트는 현재의 라니아에게 다시 묻고 싶었다. 평생 함께해 온 친척, 친구, 신하의 피를 묻히며 지켜낸 황좌가 진정 황궁 밖의 저 아름다운 풍경을 지켜내는 데 필요하느냐고.
훗날 세력을 키운 라니아가 증오를 담아 휘두른 칼에 죽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차라리 그게 가장 편안한 결말일 것이다. 황제에게 최종으로 제출할 약혼 관련 서류에 직인을 찍던 날, 그는 어렴풋이 웃었다.
대륙력 1062년 1월 13일. 라인하르트는 함께 탄 마차에서 정식으로 그녀를 돕겠다 제의했다. 라니아가 이 말을 어찌 생각할지는 그도 알았다. 아마 속으로 몰염치하고 어이없는 작자라고 비난하고 있겠지. 맞는 소리다. 그는 스스로가 몰염치하고 어이없는 작자라고 인정했으니까. 어쩌면 자각도 없이 그럴듯한 핑계를 대 라니아를 자신의 울타리 안에 가둬두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라니아는 싸늘하게 웃음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것마저도 반가워서, 그는 갈구하듯 그 손을 마주잡았다.
때로는 지켜볼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그녀가 그에게 한 말이었으니 지금이라도 따르는 게 옳았다. 라인하르트는 자신을 불편해하는 라니아와의 직접적인 접촉은 최소화한 채 서신으로의 연락만 드물게 유지하며 숨겨진 조력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이제는 편지를 보내면 비틀린 어조로나마 답장이 돌아왔다. 그는 그것이 기뻤다.
그녀의 곁에 믿을만한 오십현 둘을 붙여 안전을 보장하고, 예기치 못하게 발생한 세이잔 자작가 화재 사건에 휘말리지 않도록 물밑 작업을 했다. 혹여 아직 커지지도 않은 일 때문에 그녀에게 괜한 걱정을 끼칠까 싶어 프리드리히에게는 함구령을 내렸지만 상관을 비웃기라도 하려는지 그는 즉시 라니아에게 조르르 달려가 죄다 토설한 낌새였다. 일전에 이유 없는 경계심이 들었듯이 그는 가까이 할 만한 족속이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카리스티아 이후 혼란에 잠겨 있는 친구 에단에게도 르쉬네 사건에 대한 라니아의 현재 생각이 어떠한지를 귀띔해주었다. 그러나 에단은 오히려 더욱 혼란에 겨워하는 눈치였다.
뭔가 일이 제대로 풀리는 것 같지가 않았다. 갑자기 터진 에네아스의 고발 사건도 그랬다. 누군가의, 아마 카리스티아가 진행되던 중 라니아에게 호의적인 사람이 되어달라 비밀리에 부탁했던 옛 '모임'의 라인하르트 측 일원 세크네트의 머리에서 나온 묘수로 추정되는 발빠른 대처에 의해 어찌어찌 사건이 마무리된 것은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새삼 자신의 역량이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인하르트는 친구 시절의 라니아가 건넨 조언을 충실히 따르고 싶어 그간 많은 노력을 해왔으나 그것이 다 수포로 돌아간 느낌이 들어 무력감에 젖었다. 약혼식 무렵 갑자기 두 번이나 들이닥쳤던 배후 모를 자객들이 라인하르트에게는 자신의 무능함을 조롱하려는 어릿광대들로 받아들여졌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라니아를 필연적인 위험 속에 미리 제 손으로 들여보냈으니 적어도 그녀가 다치지 않게 할 능력은 있어야 하는데. 불안했다. 그래서 잠 못 이루는 늦은 밤 손바닥이 아물 틈도 없이 찢어지고 뭉개지기를 반복할 정도로 검을 휘둘러 상념을 잠재우려 했다.
검날에 베여 조각난 것들이 과연 상념이었을지, 아니면 심장에 잠든 오래된 미련이었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
"그건 저하의 잘못이 아니었어요. 왜 자기 잘못도 아닌 것에 그토록 매달리시는 거예요?"
곁에 친구들을 두고 맞이한 어린 시절의 여름과는 온도가 사뭇 다른, 어느 휑한 날이었다. 그 날, 보고 있자면 왜인지 라니아가 떠오르는 사람이 그의 과거 이야기를 듣고선 그런 말을 했다. 라인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내 잘못이 맞소. 적어도 칼을 쥔 사람은 나였으니."
"살기 위해 잡은 칼이었잖아요."
"......"
"황궁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잡은 칼은, 단지 삶을 이어가기 위한 몸부림의 일환이라고 봐요. 물론 제가 황궁에서 살아본 건 아니지만, 주제넘게 추측해 보자면요."
"......에네아스 영애. 정말로 주제넘군."
"예? 아. 죄,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저하의 무게를 덜어드리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아니, 이 여자에게서 라니아가 떠오른 것은 단지 자신의 이야기를 대강 전해듣고서 내민 첫마디 때문이다. 정말로 닮은 게 아니고. 라인하르트는 자신의 감상을 정정했다. 어지간히도 그런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이해한다고. 어쩔 수 없었다고. 같이 슬퍼하자고.
그러나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용서받을 자격이 없소."
"저하. 하지만."
"동정받을 자격 또한, 없고."
"......"
"그러니 그 이야기는 그만."
언젠가는 모두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고. 가망 없는 믿음이지만 지금껏 간직해왔다. 그것마저 버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니까.
행복했던 날들이 모두 거짓이었다고 생각하게 되니까.
============================ 작품 후기 ============================
그들의 부서진 행복에 관하여. 라인하르트 외전, 끝입니다.
+이번 편의 시간적 배경은 1057년, 1061년, 그리고 작중 현재 시점인 1062년입니다. 1057년 당시 라인하르트 17세, 라니아 15세, 르쉬네 19세였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다음 편은 세크네트 외전입니다. 일요일에 올라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