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8 5. 등장 =========================
4월 10일은 내 생일이다. 그리고 그 날이 바로 오늘이다. 그저께 르쉬네의 저택에 다녀온 이후로 다시 만 하루를 허송세월한 나는 오늘 아침만큼은 부지런하게 시작해야 했다.
생일 파티 같은 건 전생에서도 몇 번 안 해봤는데. 새로 태어난 후로도 열다섯 살까지만 하고 그 뒤로 대충 조용히 넘어갔었다. 스무 살의 생일 파티가 열릴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지난 4년 동안과는 달리 사교 활동에 열과 성을 다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황태손의 약혼자라는 지위를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자리를 최대한 활용해 사교계를 휘어잡고 나아가 파벌을 형성하여 입지를 다지는 것이다. 물론 황태자가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 지금까지의 성적은 준수한 편이다. 황태손이 자기 아버지의 눈을 가리기에 열심이니 난 더 편하게 활동할 수 있었다.
나는 황태자의 편에 선 귀족들을 끌어와 집단을 가르고 정치판을 어지럽힐 것이다. 그리하여 조용히 세력을 키우고, 단물을 다 빼먹은 약혼까지 깨버릴 수 있도록.
이 정도는 해줘야 약혼을 거부하지 않은 보람이 있지.
"아가씨, 편지가 왔습니다."
손에 웬 편지를 들고 방에 들어온 마리가 내게 고했다.
"발신자는?"
"적혀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편지 봉투에 이런 글자가 적혀있어서, 전달해드려야 할 것 같아 들고 왔습니다."
하녀들의 능숙한 손길에 머리카락을 맡기고 있던 나는 손을 내밀어 편지를 받았다. 봉투 왼쪽에 유려하고 힘있는 글씨체로 쓰인 검푸른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 이상한 것 아니니 에빌 대공녀에게 잘 전달해주길 바람.
이건 뭐, 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뻔하군. 혹여나 자신이 잘못한 걸까 싶어 옆에서 손을 모으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마리에게 살짝 웃어보였다.
"고맙다."
표정이 확 핀 마리가 나보다 훨씬 더 자연스런 미소로 화답하고 다른 준비를 하기 위해 밖으로 물러나갔다.
머리카락 일부를 반묶음 해 잘게 땋아내리는 것을 내 앞에 놓인 거울을 통해 한 번 확인하고 편지지를 펼쳤다.
- 에빌에게.
어이, 에빌. 나 왜 초대 안 하냐? 심지어 에단 녀석이랑 세크네트 매형도 초대받았는데! 서운하다, 서운해. 나 그냥 막무가내로 쳐들어갈 거니까 알아서 해라. 설마 동업자로서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문도 안 열어주는 건 아니지? 믿는다, 동업자.
널 위한 생일 선물까지 이미 준비해버려서 안 올 수가 없게 된 너의 5년차 동업자 샤카르가. -
이 인간 왜 한 입으로 두 말하지?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거였다. 그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내 귀로 똑똑히 들은 말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는 더이상 단독으로 행동하지 않고 아버지를 따라 가문의 관할 구역이 있는 옛 에온 왕국의 영토로 돌아갈 거다.'
'별 일이 없으면 내년 카리스티아 즈음에 네 얼굴, 볼 수 있겠지.'
지금이 어딜 봐서 카리스티아 기간인가. 그의 상황을 고려해 일부러 초대하지 않았더니만. 하여간 웃기지도 않는 동업자 같으니라고. 샤카르라는 남자가 원체 이러니 이젠 놀랍지도 않다. 새어나오는 헛웃음을 참으면서 마침 내 옆에 서서 하녀들에게 뭔가를 열심히 지시하고 있는 하녀장에게 말했다.
"하녀장. 오늘 저택 출입 관리 담당이 누군지 알아?"
"저입니다, 아가씨."
"잘됐네. 하녀장, 손님들이 도착할 때 초대장을 소지하지 않은 푸른 머리의 남자가 본인을 샤카르 멘데로프라 소개하면서 입장하려 하면 제지하지 말고 그냥 들여보내. 내 예기치 못한 손님이니까."
"알겠습니다."
서부 에온 지방에서 후계자 노릇이나 하며 살겠다더니 결국 그 방랑벽이 반 년도 지나지 않아 다시 도졌군. 참 여러 의미로 대단한 사람이다. 잠시 후에 만나면 놀려줄 거리가 한가득이겠어.
봄에 어울리게 화사한 톤의 의상과 장신구 그리고 화장이 나를 치장하는 동안, 나는 샤카르를 놀릴 방법에 대해 강구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태양빛이 따사로운 오후 1시, 푸릇한 잔디가 낮고 폭신하게 깔린 저택의 앞마당. 내 생일 파티가 시작되었다. 차양막이 설치되었고, 아주 길고 큰 직사각형 테이블에 수십 명 분의 의자가 늘어섰다. 그 옆의 너른 공간에서 나는 참석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했고, 참석자들은 나와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며 선물을 건넸다.
"대공녀님, 탄신일을 축하드립니다! 자, 여기 저희가 준비한 선물입니다."
"탄신일 축하드립니다. 야, 세트. 작작 해. 애 죽겠다."
"죽긴 뭘 죽어. 무려 3기사단의 2인자인 우리 에단 르웰린께서!"
"쿨럭, 목 졸립니다. 저라고 숨을 안 쉬고 살 수 있는 건 아니니 놓아주십시오. 아, 라니아 대공녀. 생일 축하합니다. 선물은 라임 나무 묘목인데, 켁켁, 아직 화분이 덜 완성돼서 가지고 오지 못했습니다. 내일 보내드리겠습니다."
"와 주셔서 감사해요, 로엔세르 영식들, 그리고 에단. 선물도 고마워요."
세크네트와 레테일 쌍둥이는 뭇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정문으로 요란하게 입장해 내게 다짜고짜 커다란 선물 상자를 안겼다. 물론 레테일보다는 에단의 목에 자신의 팔을 두른 채 들어온 세크네트 때문에 시끄러워진 것이었다. 소란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사람들이 이쪽에 집중하며 수다를 떠는 소리는 군데군데 끊기긴 했지만 용케 뭉개지지 않고 들렸다.
"로엔세르 가 영식들은 사교계에 잘 등장하지 않는다면서요? 그런데 대공녀님의 탄신일 파티에 오시다니."
"대공녀님의 외사촌이셔서 오신 것 아닐까요?"
"소문으로 로엔세르 가와 루 할레시온 가는 대공의 결혼 이후 한참동안 연이 끊겼다가 다시 이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던데요."
"그럼 설마, 철저한 중립과 관망으로 유명한 로엔세르 공작가마저 움직이려는 걸까요?"
"글쎄요, 아직은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어머, 옆에 르웰린 영식도 있어요! 설마 르웰린도 2황자 쪽에 관심을 보이는 걸까요......?"
"쉿, 말씀 조심하세요 부인. 르웰린 영식은 대공녀님의 어린 시절 친구였다고 알려져 있어요. 아마 친분 때문에 참석하신 것 같아요."
"정말요? 신기해라."
굳이 소리 죽여 말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대화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저렇게 어디로 발을 디딜지 고민하는 중립적인 말투로 대화를 나누는 영애와 부인 몇 명이 현재 황태자 쪽 파벌의 대명사인 가문 소속이거든. 이 곳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감시하는 임무를 지닌 그들이 저런 대화를 나눈 스스로를 경계해야 할 귀족가라며 고발하지는 않을 테지.
저 대화는 좋은 징조다. 황태자파가 흔들리고 떨궈져나오고 있다는 뜻이니까. 3개월 간의 노력이 헛된 것은 아니었군. 그래도 적당히 하라고 그 쪽에 시선을 잠깐 주자 냉큼 알아들은 그들이 말소리를 낮추며 마당의 반대쪽 귀퉁이로 옮겨갔다.
세크네트에게 강제 어깨동무를 당하다 겨우 벗어난 에단 또한 저 대화를 들은 것인지 난처한듯 공연히 옷자락을 자꾸 만지작거려 정돈했다. 저들의 대화에 의해 개인적인 친분만으로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은 그 말고는 몇 없다는 것이 새삼 드러난 셈이니 어색하긴 하겠지. 신경쓰지 않게 해주려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에단."
"예, 예?"
"잠시 후에 만찬을 시작할 테니 로엔세르 영식 분들과 놀면서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아......네."
그의 찜찜한 시선이 로엔세르 쌍둥이들을 훑었다. 아까처럼 막 다뤄질까봐 걱정되나 보다. 미안하지만 그들의 장난스런 성격은 내가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서. 그저 슬쩍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곧 다른 손님들이 도착했으므로 그는 어쩔 수 없이 로엔세르 쌍둥이들의 곁으로 가서 대화를 빙자한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와 주셔서 감사해요, 유르웬 영애."
"탄신일을 축하드립니다, 에빌 대공녀. 선물은 하인을 시켜 로비에 전달해 놓도록 해도 될까요? 조금 무거워서 제가 미처 들고 오지를 못했답니다."
"물론이에요. 아, 카인 영애. 참석해주셔서 감사드려요."
"탄신일, 축하드립니다."
"데알 후작부인도 오셨네요. 그간 안녕하셨나요?"
"호호, 네. 아참, 대공녀께서 선물해주신 목걸이를 하고 왔답니다. 어떤가요?"
"잘 어울리세요."
"어머, 정말요? 다행이에요. 대공녀께서 주신 소중한 목걸이가 혹여 제게 맞지 않으면 어쩌나, 많이 걱정했거든요."
나는 줄줄이 정문을 넘어 입장하는 이들을 맞이했다. 부모님과 내가 함께 짰던 인명 리스트 중 얼마나 와줄까 했는데, 이건 기대 이상이었다.
루 할레시온 가에 협조적이거나 중립을 유지하는 가문들은 많이들 초대를 받았고, 웬만하면 왔다. 한 예로 중립파인 데알 후작가에 시집간 선황제의 딸, 3황녀를 들 수 있겠다. 내가 준 목걸이를 하고 왔군. 천문학적인 가격을 자랑하지만, 이걸 기꺼이 저 여자에게 넘김으로써 나는 그만큼의 이득을 얻었으니 아깝지는 않다. 어차피 원래부터 내 것이었던 목걸이도 아니고. 저건 옛날에 내게 구혼했던 귀족 영식 하나가 준 선물이었다.
생일 파티를 성대하게 연 목적이 내게 우호적인 자들을 추려내기 위함인 이상 우리 가족이 그들만 초대했을 리는 없다. 반대 파벌로 분류되어 있는 가문 몇몇에게도 초대장을 돌렸는데, 그로 인해 지금 내 뒤쪽에는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프리드리히 스카일러가 있었다. 그 뿐인가? 황태자와 아주 밀접한 혈연을 맺은 르웰린 후작가의 후계자인 에단도 아까 만났고, 카인 공작가의 아넬 영애와 유르웬 백작가의 세리야 영애도 왔다.
황태자파 참석자들의 대외적인 컨셉은 '감시자'인 것으로 보였다. 여기서 무슨 수상한 결탁이 이루어지지 않을지 감시하겠다는 건데, 모인 자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실상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요새 들어 황태자가 극도로 팽창한 귀족가의 세력을 견제하는 정책을 펴려고 한다더니, 그것 때문에 이들도 불만이 있는 모양이다. 결과적으로 우리 가문에는 이득이었다.
시간이 얼마간 더 흐른 후. 파티 시작이 임박하고, 대부분 다 도착해 정문이 다시 한산해졌다. 나는 혹시 몰라 계속 정문 가까이에서 서 있었다. 빌데론 거리 한 켠에서 갈라져나와 얕은 숲을 가로지르는 조금은 외진 오솔길을 지나야 나오는 저택인지라 처음 오는 사람들은 길을 못 찾고 헤멜 수도 있어서.
오솔길을 덮은 집 앞의 얕은 숲에서 꽃잎 몇 개가 날아와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등 뒤로는 시끌벅적한 귀족들이 한가득이고, 머리 위로는 해가 반짝인다. 날씨 좋네.
잠깐은. 아주 잠깐은 열세 살의 생일이 생각났다. 아직 어렸던 날의 나와 황태손과 르쉬네와 에단, 그리고 3황자의 아들 율리시즈 하센 할레시온, 리에트 소네카 후작 영애, 아넬 카인 공작 영애, 알피어스 하시펜도 자작 영식, 그 밖에 몇몇 귀족들이 5년 전의 이 앞마당에서 웃고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규모도 작고 조촐한 파티였지만, 모임의 일원들만 모였기에 분위기는 좋았다. 조각 구름이 파란 하늘물에 동동 떠다니고, 뭉근한 햇빛이 각자의 얼굴에 미소를 피웠다. 딱 오늘처럼 맑고 따쓰한 날이었다. 나는 라인하르트가 새벽부터 일어나 황태손궁의 주방장을 직접 닦달해 만들어 왔다는 대형 케이크의 초를 불었고, 율리시즈는 검지손가락에 케이크 크림을 찍어 내 코에 바르려다가 에단에게 조용히 제지당했다.
르쉬네는 자신이 정성껏 가꾼 후원에서 내 탄생화인 빙카를 뽑아 만든 화분을 내밀었다.
'빙카의 꽃말은 즐거운 추억! 오늘이 네게 즐거운 추억이 되길 바래, 내 소중한 친구.'
나는 자그마한 화분을 조심스레 받아들었다. 이어서 에단이 머쓱하게 웃으며 책 한 권을 내밀었다.
'뜨개질 지침서입니다. 요즘 황자비 저하를 따라 뜨개질을 배우기 시작하셨다기에......'
그 책은 아직도 저택 서재에 있다. 이제는 아무도 보지 않게 되었지만.
리에트와 아넬은 둘이 같이 가서 샀다며 고급 찻잎을 선물했고, 율리시즈는 정치론이라는 제목의 책을 선물했다. 혹시 에단과 같이 가서 샀냐 했더니 역시나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었지. 그것도 현재 내 서재에 있다. 그는 내가 황자의 맏딸이니 나중에 정계에 진출할 테고, 그게 아니더라도 황족으로서 기본적인 지식은 있어야 한다는 둥 선물로 저 책을 선정한 이유에 대해 주절주절 설명을 늘어놓으며 시간을 잡아먹다가 결국 알피어스에게 핀잔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라인하르트는 거울을 선물했다. 외모 관리 좀 하라는 뜻이냐며 눈을 흘기자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넌 나를 닮았으니까.'
'뭐라는 거야. 알아듣게 말해.'
'넌 조용히 해라, 율리시즈.'
'내가 왜?'
'이게 진짜......'
내가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끼어든 율리시즈 때문에 방해받은 라인하르트는 결국 혀를 쏙 빼어물고 도망치는 그를 잡으러 추격전을 벌여 마당을 휘젓고 다녔다. 보다 못한 에단이 얼굴을 살풋 구기며 율리시즈의 목덜미를 낚아채 멈춰세우고, 라인하르트가 그에게 황태손으로서 내리는 벌이랍시고 딱밤을 먹이고 나서야 소란이 종식됐다.
그러고선 다들 테이블에 둘러앉아 만찬을 즐겼다. 고기만 집어먹는 에단과, 그렇게 편식하다가는 나중에 르쉬네보다 키가 작아지는 수가 있다고 장난스레 충고하는 알피어스를 째릿 쏘아보는 르쉬네. 아까 추격전을 벌인 여파가 아직 남아있는지 마주앉아 전투적으로 샐러드를 씹어먹으며 서로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는 등 은근히 신경전을 벌이는 라인하르트와 율리시즈. 호호 웃으며 조곤조곤 수다를 떠는 리에트와 아넬, 그리고 다른 영애와 영식들.
마지막으로 그들과 함께였던 나.
그 때, 참 좋았는데.
"대공녀님."
누가 나를 불러 뒤돌았다. 회상이 깨져나간 자리에는 프리드리히가 특유의 의뭉스런 미소를 지으며 홀로 서 있었다. 다들 입장한 이후로는 저들끼리 알아서 잘 떠들더만. 왜 이 자만 나를 잡고 늘어지는가.
"스카일러 영식. 왜 부르시나요?"
마지못해 대꾸했다. 칵테일 한 잔을 든 그는 줄곧 나를 보고 있었는지 자신이 느낀 바를 말했다.
"생각에 지나치게 잠기신 것 같습니다. 방금 입장한 하시펜도 자작 영식이 대공녀님과의 인사 없이 그냥 지나가게 두시다니."
"......몰랐네요. 하지만 그 편이 그에게도 저에게도 차라리 나은 일이니 괜찮아요."
에단과는 의도치 않았지만 최근 들어서 예전의 관계를 조금은 회복했다. 그러나 다른 이들과의 결말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르쉬네는 죽었고, 같은 이유로 율리시즈와 그의 아버지 3황자도 죽었다. 나중에 샤카르의 조사 덕에 알았는데, 르쉬네의 아버지가 조작된 문서에 의해 반역자라는 누명을 벗기 어렵게 되자 처형 직전 3황자가 반역의 주동자였고 자신은 조력자였을 뿐이라고 자백했다고 한다. 그는 3황자가 이 모든 흉계를 꾸몄음을 눈치챈 것이다. 일종의 물귀신 작전이었던 거지. 거기까지 예상할 만큼 명민하지 않았던 3황자는 허무하게 당했다.
율리시즈도 그 반역에 가담했는지는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으나, 그 인간 정도 되는 성격이라면 필시 어디 한 쪽에는 발을 걸치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모임 주위에 보이지 않는 그물을 천천히 깔고 자신은 모른 척 하면서 우리를 기만했겠지. 어쩌면 내게 정치론이라는 책을 주던 날 이미 그는 황태손에게 등을 돌린 후였을지도.
3황자 쪽 파벌이었던 리에트의 집안은 덩달아 엮여 작위를 한 단계 강등당하고 추운 북부 지방으로 강제 이사를 갔다. 좌천당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황태자 쪽 파벌인 아넬은 나와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어 오늘처럼 부득이하게 만나도 사교용 미소나 지으며 대강 인사나 하는 게 전부다. 내 쪽으로 옮겨붙으려는 계산을 한창 하고 있는 듯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가문의 일이지 감정적인 회복은 아니다. 중립파인 알피어스의 가문 또한 무사했지만 반역 사건을 계기로 황족들과의 연을 끊었다. 언제 어떤 황족의 반역 동조자에 이름이 올라 목이 떨어질지 모른다며 진저리치던 그의 마지막 모습이 참 강렬한 인상을 남겼었지.
라인하르트야 뭐, 더 설명할 필요도 없고. 그는 오늘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다. 그의 아버지로 인해 무너진 거나 다름없는 루 할레시온 가 사람들의 저택에서 열리는 파티다. 미치지 않고서야 여기 발을 들이는 짓은 하지 않지. 그는 그냥 약혼자의 체면을 손상시키지만 않도록 중요한 일 때문에 못 가서 미안하다는 편지와 큼지막하고 값비싼 보석들을 내 편에 보내는 걸로 퉁쳤다.
결말이 이러니 알피어스 하시펜도와 내가 마주치는 것은 서로의 기분을 상하게 할 뿐이다. 그런 그가 왜 초대받았다고 냉큼 여기에 왔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이 사정을 공유받지 못한 프리드리히는 고개를 기울일 뿐이었다.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는데, 혹 제가 모르는 과거의 일인지 묻고 싶군요."
"맞아요."
"흐음. 알겠습니다. 그럼 하나 묻지요. 그 사정에 멘데로프 영식과 히엘로 공도 포함되어 있습니까?"
"아니요. 그들은 왜 갑자기 언급하시나요?"
프리드리히의 눈길이 향한 곳이 살짝 불안한데. 그는 어느새 정문 쪽을 흥미롭다는 듯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와 같은 곳을 보았다.
"그 분들을 맞이하지 못할 이유가 없으시다면 인사를 나누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서 말입니다."
그의 미소어린 말은 대충 흘려듣고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눈앞의 광경이 진짜인지에 대한 확인이 필요해서.
"정말이지, 저 인간 친화력은 어디까지인지 실험해보고 싶을 지경이야."
나는 무의식중에 중얼거리며 잇새로 웃음을 뱉었다.
샤카르 멘데로프가 큰 보폭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시원스레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려 리데르흐 히엘로에게 무어라 말을 건네면서. 리데르흐 히엘로는, 시안은 조용히 미소하며 잠자코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들은 나란히 정문을 넘어 내게 가까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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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은 제가 생각해도 엔딩 부분 잘 끊은 것 같아요(자뻑
+읽어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