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7 5. 등장 =========================
집에 돌아온 후로도 그 묘한 분위기를, 모호한 미소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존재조차 신경쓰지 않았던 인물이 알고 보니 꽤나 오래전부터 나와 연관되어 있었다니. 이 세상도 예외없이 좁다.
자정 즈음, 자기 직전이었다. 씻어서 좋은 향기가 나는 백금발을 매만지며 십이현에게 저 높은 책장에 꽂힌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비밀들'을 꺼내달라고 부탁했다. 사다리도 없이 어렵지 않게 훌쩍 뛰어올라 정확히 책을 집어들고 내려온 그녀는 내게 책을 내밀었다. 사현은 수도를 세우더니 날렵하게 책 위로 휘저어 먼지를 털어냈다. 어째 심각한 암살 사건보다는 내 사소한 일상의 수발을 들어주는 역할로 전락하고 만 것 같은 호위들이었다.
그런데, 따지고보면 그들은 황가에 속한 비밀 조직인 오십현으로서 업무상 금서에 접근이 허가된 몇 안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비사록의 존재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고, 이게 라인하르트 같은 주요 황족이 아닌 이상 구경도 할 수 없는 책이란 걸 분명 모르지 않을 텐데 그들은 이걸 보고도 아무 제지나 질문도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내 의문을 입 밖에 냈더니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희는 주군께 절대 충성하는 존재입니다. 절대 충성이란 말 그대로 선악의 관련 없이 무조건 따른다는 뜻. 그러므로 주군의 과실마저도 덮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사현께선 원칙대로 말씀하셨으니 저는 약간 융통성 있게 말하겠습니다. 주군께선 어차피 그걸 가지고 무언가를 하시지는 않을 분이라 판단해 그냥 두고자 합니다."
십이현은 내가 조용한 삶을 최고로 여기는 사람이라는 걸 벌써 알아낸 모양이다. 하지만 이미 불구덩이 한복판에 떨궈진 나는 그 조용한 삶으로 되돌아가는데 도움이 된다면 이 책의 내용을 활용할 생각이 충분히 있는데 말이지. 아무튼 그렇게 품에 들어온 책에는 르쉬네의 로즈마리 향이 미약하게 배어 있었다. 나는 두꺼운 책이 르쉬네라도 되는 양 표지를 손으로 느릿하게 쓸었다. 그런 나를 가만 살피던 십이현이 알려주었다.
"슬퍼 보이십니다."
요새 내 감정 변화를 감지하고 입 밖에 내는 걸 자주 하는 십이현이었다. 마치 나를 통해서 감정을 습득하려는 듯이. 실제로 사현이고 십이현이고 하나같이 감정이 거진 거세된 것 같아 보였기 때문에 마침 잘됐다 싶어 그냥 두었다.
"책에서 로즈마리 향이 나서. 그리운 향기거든."
"그냥 로즈 향이 아니고 로즈마리 향입니까?"
"응?"
"제가 맡기로는 장미 냄새가 더 많이 납니다."
"장미......? 잘 모르겠는데."
"주군의 향입니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먼지를 터는 일을 수행하고 나서 구석진 자리로 돌아가 벽에 기대서 있던 사현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녀도 이제 내 앞에서 항시 각 잡고 서 있지 않고, 대화에 참여할 만큼은 발전했다.
"내 향기?"
물끄러미 책을 내려다보았다. 스스로의 체향은 느끼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 그럼 르쉬네도 이 책에서 자신의 향이 아닌 내 향을 맡았을까. 내가 그러듯이.
"본래 장미의 향보다는 조금 옅습니다."
"그렇구나."
'몰랐던 것은 때로 예상치 못한 곳에서 알게 되기도 한다.' 이 황궁 비사록의 서문에 적힌 글이다. 르쉬네가 마법 편지를 이 책 옆에 숨겨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지저에 잠긴 비밀을 하나씩 캐내어 수록한 책과, 비밀 이야기를 담은 편지와, 그 모든 것을 감싸는 이제는 과거 속에 남은 로즈마리 향. 참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금세 이것저것 치고 올라올려는 상념을 접고 책을 펼쳤다. 오늘 밤은 이걸로 때우다가 자련다. 잠이 안 와서. 사현과 십이현은 대화가 끝났다는 것을 인지하고 알아서 그들을 위해 넓은 방 한 켠, 책상 앞 공간에 마련해 둔 쇼파로 가 앉았다.
금서답게 제 1장부터 애인을 스무 명이나 두었다는 이백 년 전의 황제 함벨라드 4세의 이야기였다. 그는 타고난 바람둥이인 데다가 수려하기 그지없는 외모를 가진 덕에 귀족이고 평민이고 할 것 없이 자기 애인 삼다가 결국 황후 엘레나인에게 이혼 요구서를 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안일하게 생각했던 함벨라드 4세는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었고, 곧 애인들이 황후 자리를 놓고 맹렬하게 다투기 시작했다. 결국 새 황후는 뒷배가 탄탄해 어느 누구와의 싸움에서도 밀리지 않았던 스카일러 후작가의 금지옥엽 아리안느라는 여자가 되었고, 이에 절망한 황궁 시녀 출신의 총애받던 애인 제나 멘데로프가 '가질 수 없다면 부숴버리겠어'를 시전하며 새 황후를 들인 후에도 여전히 애인들과의 관계를 끊지 않은 함벨라드 4세를 잠자리에서 살해함으로써 파란만장했던 궁궐 암투사는 막을 내렸다. 현재 세간에는 함벨라드 4세가 살해당한 게 아니라 원인 모를 급사로 알려져 있다.
막장이군. 결국 불쌍한 건 엘레나인 전 황후다. 예전에 가정 교사에게 역사 시간에 배웠는데, 그녀는 종교국가적 색채가 짙은 리우네아의 공주였고 이혼 후 고국으로 돌아갔다. 신기하게도 귀국하고 나서 얼마 안 있어 리우네아의 왕가에 승계되는 고유 마법능력인 예언이 뒤늦게 강력하게 발현되어서 이후 대신전의 최고사제가 되었다고. 또한 그녀가 나이가 비슷한 오촌형제와 근친혼을 하고 마법 능력을 승계받은 아이를 낳음으로써 명맥이 끊길 위기였던 리우네아의 마법은 위기를 넘겼다. 현 왕인 레비욘 가셋수트도 그녀의 직계 후손으로, 역시 드물지만 예언을 하는 예언가다. 참, 얼마 전에 마리가 스쳐가듯 읽어준 신문에서 그가 20년 만에 예언을 했다던 것 같은데. 나중에 찾아봐야겠다.
좀 웃긴 건 황후 자리를 놓고 암투를 벌였던 여자들의 성에 스카일러와 멘데로프가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사이가 썩 좋지만은 않은 두 가문인데, 이백 년 전부터 쌓인 앙금이었던 건가. 이런저런 생각을 전개하며 가벼운 소설을 읽는 마음으로 책장을 팔랑팔랑 넘겼다.
제 5장쯤 가니 슬슬 아주 민감한 주제가 나오기 시작했다. 외교, 숙청, 전쟁, 반역 등등. 개중에는 내 증조부인 아렌도스 2세의 무자비한 국내외적인 정복전쟁에 대한 상세한 내용도 있었다. 그가 차례로 정복한 카슈테르, 시힐레, 프리제, 에온 네 국가의 멸망 과정과 그들 왕가의 참혹한 비극이 아무런 여과도 없이 그대로 적혔다.
카슈테르의 대장군이 반란을 일으켜 영토를 떼어내 자신만의 왕국 할레시온을 세웠다. 그게 오늘의 대제국 할레시온의 시작인 건 누구나 다 안다. 아렌도스 2세는 모국과도 다름없는 카슈테르의 뒤통수를 한 번 더 쳤다. 뿌리가 같은 나라이니 동맹을 맺자고 제안해 놓고 혼인동맹까지 맺고서는 방심한 틈을 타서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그 때 죄없는 양국의 결혼 교환된 여인 두 명은 아렌도스 2세의 손에 모두 죽임당했다. 한 명은 그의 부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그의 여동생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렇게 1017년, 첫 망국이 발생했다.
이에 만족할 수 없었던 아렌도스 2세는 이어서 시힐레를 노렸다. 첫 망국 이후로 6년 만에 두 번째 멸망이었다. 다시 12년 후에는 프리제가, 아렌도스 2세의 집권 마지막 해인 1044년에는 에온이 지도에서 사라졌다. 수많은 망국의 백성들이 칼과 창에 궤뚫려 시체의 산을 이루었고, 그것을 거름 삼아 할레시온은 강대해졌다. 카슈테르의 왕가는 정복 즉시 방계까지 전부 말살되었고, 시힐레의 왕가는 비굴하게 엎드려 복종을 표한 덕에 살아남아 후작가가 되었다. 프리제는 왕실의 직계 일원 전체가 수도의 마지막 방어선이 뚫린 직후 음독자살했다. 에온은 저항이 심해 역시 카슈테르처럼 방계까지 멸해졌다. 사라진 나라의 옛 구심점을 죽기 직전까지 확실하게 처리해놓고 간 아렌도스 2세였다.
"마법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없었던 할레시온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타국의 마법 승계가 약해지거나 끊어지기만을 기다린 것입니다. 그동안 군부는 마법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면서 적의 심장을 노릴 방법을 강구했습니다. 그렇기에 단기간에 이런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이고요."
쇼파에서 차나 홀짝이며 허송세월하다 심심해서 안 되겠는지 그나마 사현보다는 말상대가 되는 내 곁에 와 앉은 십이현이 함께 책을 보다가 주석을 달듯 설명했다. 나는 의자 손잡이에 팔꿈치를 대고 손으로 턱을 비스듬히 괴면서 책장을 넘겼다.
"정복왕 칭호가 아깝지 않은 증조부님인 것만은 틀림없어. 하지만 생전에 열심히 이룩해 놓은 것을 정작 당신은 제대로 누리지도 못하고 가셨으니 이 얼마나 애석한 일이야?"
"선황께서 채 다 처리하지 못하고 가신 에온 왕가 멸문까지 황위를 승계받자마자 마저 정리하셨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독에 당하신 이래 지금까지 정신이 온전치 않으신 황제 폐하도 안타깝습니다."
"뭐? 독에 당해? 그 소리는 처음 듣는데."
나는 사현이 내 말을 받아 이례적으로 긴 대꾸를 해 줬다는 것에도 놀라고, 그 내용에도 놀랐다. 툭 던지듯 내놓았던 자신의 발언이 뒤늦게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른 숨겨진 진실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현이 제 실수에 미간을 짚었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쇼파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 책의 마지막 장에 선황 말기부터 현 황제 폐하의 집권 초기까지의 비사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알고 싶으시다면 읽어 보십시오."
그녀의 말대로 34장에 오벨 3세의 이름이 언급된 장이 있었다. 망국 에온의 마지막 왕세자가 오벨 3세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 처형 전 감옥에서 만남을 가졌는데, 그 때 어떻게 가지고 있었는지 공기중으로 퍼지는 독을 뿌렸다고 한다. 독에 대한 설명을 대충 보니 바로 죽는 종류가 아니라 천천히 정신을 파괴하는 독성을 지녔다는 것 같다. 기억을 잃는 것부터 시작해서 최후에는 생명 유지 기능도 할 수 없게끔 망가뜨리는 독이라니. 저질이군. 차라리 깔끔하게 한 방에 보내버리지.
"1044년의 일이면 사현도 열여덟 살 정도밖에 안 되던 때인데. 혹시 그 당시에 폐하 곁에 있었어?"
"없었습니다. 그 독에 당했다면 전 지금쯤 폐하와 비슷한 상태였을 겁니다. 그 날 곁에 있었던 분들은 모두 사망했습니다."
"충격이 컸겠네."
"충격보다는 차라리......"
사현이 눈을 가늘게 내려떴다. 항상 싸늘한 무표정 내지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던 사현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지는 걸 실시간으로 목격한 나야말로 좀 충격이었다.
"분노가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사현."
움찔한 내가 겉으로는 변화 없이 그녀를 물끄러미 관찰하고 있자 보다 못한 십이현이 가명을 불러 이성을 되돌려 놓았다. 사현이 부서져라 쥔 주먹을 간신히 펴고 내게 고개를 깊숙히 숙였다.
"송구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괜찮아. 뭔가 사정이 있었겠지."
"바세야프 남작가가 빚 때문에 망해갈 때 아버지는 어리고 쓸모없었던 저를 낯선 길거리에 버렸습니다. 거지처럼 떠돌던 저는 거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른 거지들과 싸움을 벌였고, 잠행을 나오셨던 황태자 전하, 지금의 황제 폐하이신 분께서 이를 우연히 목격하시고 제 눈빛이 마음에 드신다며 기사단에 들이셨습니다."
기대도 안 했는데 사현이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십이현이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다. 이미 나와 어느 정도는 친해졌고 황궁 비사도 다 까발려진 마당에 거리낄 게 없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서른여섯 해 평생 한 번도 제대로 내비치지 않았을 속내가 실은 그렇게까지 무뚝뚝하지는 않을 수도 있겠다,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여기사들에게 무예를 배우고, 남기사들에게 학문적인 교육을 받으며 기사단에서 키워지다시피 한 저는 열여섯 살이 되던 해 정식으로 입단 시험을 치고 8기사단에 배정되었다가 1년 후 3기사단으로 옮겨졌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오십현에 직접 들이시고 황후 폐하의 곁을 지키도록 하신 겁니다."
"돈독했던 군신 관계가 이제는 그저 추억으로 남은 거구나."
"예."
삶의 전부를 잃은 에온의 왕세자는 복수에 성공했다. 그러나 삶의 전부를 만들어 준 주군을 잃은 충성스런 기사는 무슨 죄란 말인가? 한 사람이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벌인 일에 무고한 누군가는 늘 상처입는다. 르쉬네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헬렌 바세야프도 그렇다.
자비 없는 세계 같으니.
"나랑 닮았네."
"예?"
"아, 별 말 아니야. 해서, 복수할 생각이야? 아까 반응 보니 당장 그러고도 남을 것 같던데."
"......"
둘러대기 위해 급하게 한 화제 전환이었다. 사현은 의문이 미약하게 비치는 검은 눈을 슥 굴려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 나는 그 진심이 담긴 눈빛을 마주하고서야 내 실책을 깨달았다. 에온의 왕세자는 자결했다. 뭐라 말이라도 해서 수습하려 했지만 사현이 덤덤하게 선수를 쳤다.
"복수할 대상이 사라졌기에 더 잊혀지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복수할 대상이 있기라도 한 게 차라리 낫겠지. 갈 곳 잃은 화는 스스로에게로 다시 돌아갈 테니까. 결국 나는 사현에게 짤막하게 사과하고 책을 덮었다. 벌써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
십이현은 사현의 눈치를 살살 보다가 내게 잘 주무시라는 인사를 건네고선 사현을 데리고 방 밖으로 나갔다. 나는 침대에 앉아서 굳게 닫힌 방문을 괜히 몇 분 더 바라보다가 이불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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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들꽃 님께서 르쉬네 팬아트를 그려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번 화의 대사 하나가 수정됐습니다. 아악 설정오류 아악(머리 쥐어뜯
++심심풀이로 인터넷 검색해서 mbti성격검사를 하다가 악살다 아이들이 생각나서 걔네들 것도 해봤습니다. 결과는 다음과 같아용 (세부 성격 설명은 너무 길어서 첨부 안 했습니다. 혹시 궁금하신 분 있으시면 저 네 개짜리 알파벳 조합을 인터넷에 검색해주세요 바로 나옵니다
ENFP-A : 재기발랄한 활동가=르쉬네/ ENTP-A : 뜨거운 논쟁을 즐기는 변론가=세크네트/ INTP : 논리적인 사색가=레테일/ ISTJ-T : 청렴결백한 논리주의자=라니아=라인하르트/ ESTJ-T : 엄격한 관리자=프리드리히/ ISFJ-T : 용감한 수호자=리데르흐(시안)/ ESFJ-A : 사교적인 외교관=샤카르/ INFJ : 선의의 옹호자=에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