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3 6. 꽃의 사슬 =========================
프리드리히는 나와 가까이 있기도 껄끄러운지 슬쩍 멀리 떨어져 자리를 지키고 섰다. 나야 반가운 짓이다. 나 또한 저 자와 상종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나무 벤치가 있는 곳은 꽃나무가 심어진 구역이다. 예전에 휠리안 궁에서 놀 때도 여기 자주 왔었지. 봄철이 되면 가장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라서.
어린 날의 봄, 나는 이 벤치에 앉아서 땅에 닿지 않는 다리를 앞뒤로 까딱이며 꽃향기가 함뿍 실린 바람을 음미했다. 옅푸른 하늘과 그 위에 뽀얗게 뭉개진 구름, 생명을 노래하는 새와 청량하고도 따쓰한 공기. 눈을 살며시 감으면 바람소리만이 귓가를 스친다. 휘파람 같은 그 소리를 제하고 남는 것은 오로지 고요. 봄의 감성은 활기차고 동시에 정적이다. 오후 햇살에 비친 천천히 부유하는 먼지조각처럼.
그것들만은 그대로 시간을 뛰어넘어 스무 살의 내게로 왔다.
사월 중순 즈음에 절정에 이르렀던 봄꽃의 만개는 이제 과거의 일이 되었다. 사월 후순, 꽃은 진다.
뺨에 무엇인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무심결에 손으로 그것을 집어들었다. 꽉 잡으면 물기가 묻어나오는 엷은 분홍빛 꽃잎이었다. 이 주위에 즐비한 벚꽃이다. 나무가 제 역할을 다한 꽃잎을 눈물처럼 떨궈내고 있었다.
고개를 들었다. 사방에서 꽃잎이 사슬처럼 줄줄이 이어 떨어진다. 비가 내리는 광경과도 얼추 비슷했다. 바람이 휙 부니 정갈하게 땅에 몸을 뉘이던 잎이 공기 흐름을 좇아 팔랑이고 휘청인다. 쉬다가 불려나와 어지러이 솟구쳐오르고, 휘날리고, 끝내 하늘마저 분홍색으로 덮어 물들인다.
그 속에 내가 있었다. 이 정도면 정말 좋은 대기 장소다. 원래 목적을 헌납하고서라도 더 구경하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아이린을 보낸 라인하르트가 내 앞에 왔다. 홀로 꽃놀이에 빠져 있느라 아이린은 못 만나게 되었다. 그녀의 태도가 어떠한지 알아내야 하는데. 오늘은 날이 아닌가보다.
"모두 물러가 있으라."
나를 직시하며 꺼낸 첫 마디는 주변에 포진한 그의 수행원들을 향한 지시였다. 프리드리히를 포함한 모두는 정원 밖으로 물러났다. 라인하르트는 애써 눈을 접어 미소했다.
"이런 날에 굳이 가시 새장에 입성할 네가 아닌데. 역시 그 통보를 하러 왔구나."
나직이, 마치 혼잣말처럼 흐르는 말씨였다. 나는 살얼음을 깨듯 거리감을 두고 웃음지었다.
"눈치 빠르네. 예전보다 훨씬. 정치판에서 눈칫밥 많이 먹었나 봐?"
"뻔한 추리 정도는 눈치 없이도 할 수 있다. 아마 넌 사현을 통해 황제 폐하의 병환에 대해 전해들었겠지. 그리고 더 위험해지기 전에 나와의 약혼을 없던 일로 돌리기로 결심한 거야. 이미 유용한 것은 다 얻었으니까. 내가 틀렸나?"
"아니. 맞아. 다행이다. 말이 통하니 얘기가 쉽겠네."
굉장히 이기적인 처사임에는 분명했다. 그러나 애초에 라인하르트가 마음껏 써먹으라고 제의한 약혼이었으니 그는 할 말 없다. 바람이 잦아든 틈을 타 벤치에서 일어났다. 제복과 비슷한 복색을 한 그는 이렇다 할 표정 변화 없이 내게 물었다.
"약혼의 파기 조건이 무엇인지는 숙지하고 있어?"
나는 주저 없이 읊었다.
"할레시온 제국 황제의 윤허와 종친회 원로 5인 중 3인 이상의 동의, 7개 공작가 중 네 가문 이상의 찬성, 마지막으로 당사자들의 합의."
거침없기로는 라인하르트도 마찬가지였다.
"황제 폐하께서는 병중이시나 의식은 때때로 돌아오시니 내가 찾아가 허가 서류에 도장만 찍게 하면 될 거다. 너와 나의 합의는 이미 약혼식 당일 완료되었고. 하지만 황태자 전하의 아들인 내가 도울 수 있는 범위는 여기까지다. 종친회 원로와 일곱 공작가의 찬성은 네가 이끌어내야 돼."
오만하게 웃었다. 그 정도야 겸사겸사 성실하게 준비해두었지. 세력을 키우는 데 보탬이 되고 동시에 내 약혼도 깨 줄 사람들을.
"우선 종친회 원로 다섯 명은 카넬린 황태후, 네피아 황후, 말페스 황녀 부군, 알레노르 2황녀, 데알 후작부인. 황태후 폐하는 스카일러 후작가 출신이라 반대할 게 뻔해서 아예 접촉도 안 했어. 다른 분들께는 안전장치 삼아 두어 달 전에 각각 따로 만나 말씀드렸었는데, 내 손을 들어주겠다고 하셨고."
네피아 황후는 네가 설계한 이 약혼의 의도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또 선황제의 외조카인 말페스 황녀 부군과 선황제의 딸인 알레노르 2황녀는 근친혼을 해서 서로 부부관계인데, 결혼 생활이 그닥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말 꺼내기 무섭게 동의하겠단다. 별 생각 없어 보이던 데알 후작부인에게는 그녀가 구하고 싶어하던 희귀한 목걸이 하나 선물해줬고.
종친회 원로는 황제와의 촌수가 가까운 순서에 상관없이 나이가 많은 순서대로 다섯 명 선정된다. 그들은 섣부른 의사 표명을 삼가지만 결정적일 때 단 한 마디만 던져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조언자의 위치에 있다. 내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유일한 구역이었는데 생각외로 쉽게 해결돼서 한시름 덜었지.
"공작가 쪽은?"
"찬성으로 기운 가문은 로엔세르, 아레스티제, 히엘로. 황태자파인 카인은 기대도 안 했는데 저번에 만나 보니 의외로 찬성할 것 같기도 해."
"나머지는 어떻고?"
"확실한 반대는 미르엔과 퓌세앙. 애매한 게 나인하트야."
"카인과 나인하트가 쟁점이라는 거군."
"그렇지."
잠시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는 듯하던 그는 검은색을 바탕으로 고풍스런 금색이 장식처럼 들어간 옷을 툭툭 털어 꽃잎을 치웠다. 그리고 확언했다.
"나인하트는 내가 맡지."
"어쩌려고?"
"그들이 원하는 것 하나를 내가 내어줄 수 있다."
"무엇인지 알 것 같은데, 내 착각일까?"
"착각은 아닐 거다."
"라인하르트. 후견 가문은 아무나 지정하는 게 아니야. 네가 황제가 되기 전까지 사사건건 네 일에 간섭할지도 모르고, 과도한 권력을 갖게 될 수도 있어. 귀족 중에 특출하게 강한 가문이 생긴다면 결국 너도 나도 황족인 이상 이득이 아니라는 걸 알 텐데."
"나인하트 공작가만큼은 황태자 전하가 아닌 나의 가문으로 만들어야 한다. 어차피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적당히 생색 낼 수 있는 시점에 후견 가문 자리를 줄 생각이었어."
"황태자 전하와 너는 다른 노선을 걸을 거라는 소리야?"
눈매를 찡그렸다. 다섯 해 전만 해도 황태자의 그늘에서 황태자만을 따르며 살아가던 그였다. 심경에 변화라도 생긴 걸까.
이제 보니 진짜 이상하네. 약혼 체결이면 몰라도 약혼 파기에 이토록 협조적인 것부터 수상하다고 생각했어야 했다. 황태자파인 가문을 내 쪽으로 데려가려는 시도도 막아세웠어야 정상이다. 그는 황태자의 하나뿐인 아들이니까. 아무리 내게 도움을 주고 싶어한대도 미래의 자기 기반을 깎아먹으면서까지 그럴 리가 없잖아. 미치지 않고서야 자살 행위를 하겠어?
"그럴 셈이다."
미쳤군. 한 번 이기적이었으면 끝까지 그대로 갈 것이지, 왜 갑자기 이런 바보짓을 한단 말인가. 물론 죽을 때까지 이기적인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 내게는 좋은 일이지만, 어쨌든. 안 그러던 인간이 저러니 괜히 의심스럽다. 반쯤 빈정거리듯 말했다.
"얼마 안 가서 누구 하난 죽겠네."
"그 전에 네가 날 죽여줘도 괜찮고."
"뭐?"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정말 미쳤구나, 너."
뜨악한 얼굴이 된 내가 욕처럼 뱉어낸 말에도 아랑곳없이 라인하르트가 설핏 웃었다. 근 몇 년 동안 제대로 웃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요즘에는 또 예전처럼 웃네.
"네가 그렇듯이 나도 꼭두각시처럼 상식선을 따라가기만 하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죽여달라는 게 단순히 상식선만 벗어난 말은 아니지 않아?"
"이제 용건 다 끝났으니 집에 돌아갈 거지?"
그는 뜬금없이 말을 돌렸다. 얼굴을 구기고 따져물을까 했다가 관뒀다. 내가 라인하르트의 정신 상태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그냥 그가 바라는대로 바뀐 대화 흐름에 응했다.
"황궁 도서관에 잠시 들렀다 갈 거야. 찾을 책이 있어서."
"어떤 책?"
"리우네아의 예언 기록서."
"아, 그거. 18구역 10번 책장에 있을 거다."
"너도 찾아본 적 있어? 자세하게 아네."
"황족에게만 열람이 허락되는 높은 등급의 서적은 18구역부터 20구역까지 모여 있고, 외국 서적일 경우 10번 이상의 번호를 단 책장에 꽂히니까. 예언 기록서라면 분류상 아주 기밀 서적은 아니니 18구역, 그 중에서도 가장 앞 번호 책장에 있을 확률이 높다."
황궁 도서관에 많이 들락거렸나. 내 기억 속 그가 그다지 독서광은 아니었는데. 내 머릿속을 고스란히 읽어내기라도 한 것인지 그가 놀랄 만큼 의문을 정확히 짚어냈다.
"네 기억에 없는 시간 속의 나는 황궁 도서관에서 꽤나 많은 시간을 보냈다. 구역 분류는 대강 외우고 있어."
"그래? 어쨌든 유용한 정보 고마워. 난 이만 가 볼게."
내 동요를 숨기려고 다소 빠르게 마무리하고 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그의 옆에 다다른 순간, 교차하는 방향을 말로써 잠시간 붙잡혔다.
"조만간 나인하트 공작가 회유에 대한 성공 여부를 편지로 띄울 테니 찢지 말고 받아."
"농담으로 하는 소리야? 미안하지만 전혀 안 웃겨."
"웃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알았어."
나는 공적인 신분을 생각해 가볍게 목례하고 그를 지나쳐 꽃비 속으로 걸어갔다.
향기가 짙다. 바람을 따라 물오른 연분홍 꽃잎이 수많은 나비처럼 쉼없이 날아올랐다. 꽃길을 지나 황궁 서쪽의 도서관까지 가는 내내 나는 옷에 밴 달콤한 향을 느꼈다.
어느새 도착한 황궁 도서관의 정문은 내가 있는 쪽의 반대편에 있었다. 별 수 없이 돌아가야 했다.
거대한 황궁 도서관의 둘레를 반 정도 돌았을까. 내 키의 몇 배나 되는 큼지막하고 높은 아치형 창문 너머에서 익숙한 색감의 머리카락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춰 자세히 살폈다.
좀 흐릿하긴 한데, 열람실 한 구석에서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은 내가 아는 인물인 것 같았다. 구석에 비치된 의자에 편히 기대앉아 두꺼운 책을 들고 찬찬히 읽어내리는 남자의 머리카락은 연청색이었다. 나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아직 잘 안 보인다. 더, 더 가까이. 남자의 옆모습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도록.
그러다 창틀에 거의 붙다시피 하게 되었다. 그제서야 수려한 옆얼굴이 그나마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깨닫고 무심결에 이름을 입 밖에 내놓았다.
"시안 공?"
이런. 소리가 좀 컸는데. 안에까지 들렸으려나. 뒤늦게 입술을 물고 내 실책을 탓하는 와중 남자가 문득 책에서 눈을 떼고 창문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물기를 머금은 것마냥 흐릿하게 일렁이는 순한 눈이다.
'대공녀?'
시안이 입모양으로 말했다. 망했다. 완전히 빼도박도 못하게 되었잖아. 하는 수 없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시안이 부드럽게 미소했다. 손을 살짝 들어 흔든다.
'반갑습니다.'
"네. 저도요."
나도 이번에는 작게 소리를 조절해 말하며 입모양만 분명하게 했다. 시안이 자신이 읽고 있던 책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책을 읽으러 오셨습니까?'
"읽는다기보단 찾으러 왔어요."
'그러시다면 들어오세요. 참고로 제가 있는 구역은 18구역입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칫했다. 잠깐, 18구역? 거긴 방금 라인하르트가 말한 곳인데. 황족 이상 출입 가능 구역이라던.
내가 수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창문 안의 남자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눈을 곱게 접어 웃기만 했다. 결국 나는 창문을 사이에 둔 대화를 종료하고 정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건물 내부는 꼭 유럽 최대 규모의 역사 깊은 도서관 같았다. 나는 어릴 때 르쉬네를 따라 몇 번 온 것 말고는 황궁 도서관에 잘 오질 않아서 이곳이 조금 어색했다. 원하는 책이 있으면 대부분 사거나 일레인이 구해다 줬으니까. 저택에 큰 서재가 있기도 하고. 1층이 하도 넓어서 조금 헤매다가 사서의 도움을 받아 18구역을 찾았다. 입구에서 신분 증명까지 마치고 나서야 문이 열렸다.
오래된 책 냄새와 먼지 냄새가 섞여 났다. 루 할레시온 가 저택의 서재와 비슷한 냄새다. 입구 바로 앞에서 책장이 시작되기에 우선 예언 기록서부터 찾기로 했다. 라인하르트가 10번 책장에 있을 거랬지. 10번을 찾아 안으로 들어가 열심히 책들을 살피니 과연 맨 윗 칸에 리우네아 예언 기록서가 있었다.
으음, 맨 윗 칸이라. 여긴 사다리가 없나. 이렇게 큰 구역에 설마 없겠어? 안일하게 생각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사다리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 다른 곳에 치워둔 모양이다. 아님 부서졌나? 아무튼 곤란했다. 손으로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해결책을 강구한 끝에, 그냥 입구에 있는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사다리를 가져오게 하거나 나 대신 꺼내 달라고 하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돌아서는 찰나였다.
"어느 책인가요?"
시안이 어디선가 사다리를 구해 내 앞에 나타났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합니다.
+요즘 연재 주기가 박살난 건 전적으로 제 슬럼프와 무기력증 탓입니다. 봄방학까지라도 최대한 자주 연재하기로 다짐했으나 생각보다 어렵네요 ㅠㅠ 죄송합니다......
++참고로 남주 후보...라고 부를 수 있는 인물은 총 세 명입니다. 뭐 이건 너무 뻔해서 다들 아시겠지만^^
+++앞으로 작품 소개글은 몇 편 뒤에 연재될 내용을 일부 떼어낸 것이 메인 소개글 아래로 들어갈 거예요. 그 '몇 편 뒤'가 어느 정도의 뒤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없게끔 조심스럽게 잘라내야겠지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