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허.”
녀석의 대답에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아니, 솔직히 감탄했다.
‘안톤, 이 녀석.’
검만 잘 쓰는 게 아니다.
생각보다 머리가 잘 굴러가는 녀석이다.
‘내가 마리 유모에게 나름 마음을 쓴다는 걸 대체 어디서 주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리의 동생을 조원으로 추천해서, 나와 마리 두 사람 모두에게 점수를 따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설사 내가 그 제안을 거절하더라도…….’
자신을 향한 평가를 높일 수 있으니 손해는 아니다.
꽤 정략적인 수였다.
‘하긴, 당연한 건가?’
고작 검술 실력만으로 황금 사자가 되기에는, 녀석의 발목에 묶인 고아 출신이라는 족쇄가 무겁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리텐슈노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이런저런 능력을 키우게 된 것이겠지.
나는 안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안톤은 바짝 얼어붙은 채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진짜로 겁을 먹은 건지, 아니면 연기를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비슷하네.’
전생의 나와 같은 놈이 분명했다.
피식하고 절로 웃음이 나왔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녀석을 마지막 조원으로 하지, 뭐.”
“……!!”
설마 내가 단번에 수락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는지, 내 대답에 안톤이 흠칫 몸을 떨었다. 성공했다는 흥분을 숨기려는 태도가 역력했다.
‘아직은 어리숙하네.’
상관 없다. 그 정도야 내가 잘 이끌어 주면 되겠지.
“일단 데리고 와. 교관들한테 조를 완성했다고 보고해야 하니까.”
“네!”
“……그런데 네가 불러오면 당장 오는 건 맞지? 허탕 치는 거면 곤란해.”
“아닙니다! 카를도 분명 도련님을 모시는 걸 영광으로 생각할 겁니다! 당장 데려오겠습니다!”
안톤은 그렇게 소리치고는 재빨리 수련생들 틈바구니로 허겁지겁 사라졌다. 절로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마치 과거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물론, 난 더 조심스럽게 접근했겠지만.’
[거참, 그 나이에 벌써부터 속이 시커먼 게 뭐 그리 자랑이라고 떠드는 것이냐? 하여튼 쥐방울만한 꼬맹이 주제에 하는 짓만 보면 능구렁이가 따로 없어.]
내 속마음을 읽은 데우스가 뭐라고 구시렁거렸지만, 나는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다. 이 변태 드래곤과 몇 달 넘게 부대끼며 내가 깨우친 것이 하나 있었다.
‘굳이 유익하지 않은 이야기를 할 땐 무시하는 게 상책이지.’
[땍! 또 그 눈빛! 이놈, 네 녀석이 그런 눈을 할 때마다 나를 하찮게 보는 걸 내가 모를 줄 아느냐!]
난 땍땍거리는 데우스의 타박을 무시하며, 안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안톤이 키가 작은 소년 한 명과 함께 돌아왔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몇 살이야, 이거?’
안톤이 데리고 온 카를 브라운은 내 생각보다 더 어려 보이는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여덟 살? 아니, 솔직히 그것도 많이 쳐줬다고 할 수 있는 앳된 외모.
‘나이를 속였을 리는 없는데.’
순간적으로 혹시라도 마리 유모가 자신의 힘으로 어린 동생을 수련동 수련생으로 집어넣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마리 유모가 아무리 리텐슈노프의 혈족을 담당하는 전속 유모라지만, 나 같은 끈 떨어진 연 같은 리텐슈노프를 담당한다면 그 권력은 그다지 크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최소한 진짜 나이가 여덟 살이 넘는다는 건데…… 저 외모로 그게 말이 되나?’
절로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안톤이 카를을 소개하는 순간 더더욱 커졌다.
“카를은 실력도 그렇고 제 친구 중에서는 가장 믿을만한 녀석입니다. 수련동 교관분들 평가에서 언제나 상위권을 받았거든요.”
“안녕하십니까, 드레커 도련님! 카를 브라운이라고 합니다!”
카를은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다. 초롱초롱 반짝이는 눈이 나와 한 조가 된다는 게 감격스러운 모양.
하지만 난 안톤의 설명에 귀를 의심했다.
“친구? 친구라고?”
저 얼굴이 열 살이라고?
나는 다시금 카를을 돌아보았다.
……아무리 봐도 열 살은커녕 나보다도 더 어려 보였다. 저 몸으로 검을 제대로 잡을 수는 있나?
데우스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지, 그는 심각한 목소리로 조용히 무어라 중얼거렸다.
[세상에, 진짜 어마어마한 동안이 틀림없군. 얼굴도 반반하게 생긴 게, 조금만 더 자라면 아가씨들 심금 여럿 울리겠는걸? 내 젊은 시절을 쏙 빼닮았어!]
‘…….’
다시금 말하지만.
데우스가 헛소리를 할 때는, 무시하는 게 상책이다.
* * * * *
나는 교관들에게 조 편성이 완료되었다고 보고했다.
아직 우리를 제외하면 5인 1조를 짜는 데 성공한 수련생 무리는 없었다. 그렇기에 교관들에게 가산점은 충분히 받을 수 있어 보였다.
“조 편성을 끝마쳤…… 음. 드레커 도련님이 조장이십니까? 역시…… 일단 이쪽으로 오시죠.”
까칠하던 교관은 내가 조장인 걸 확인하자마자 태도가 바뀌었다. 훨씬 공손해진 그는 수십 개의 배낭이 가득 쌓여 있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여기 있는 보급품을 들고 산속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조 깃발입니다. 깃발을 빼앗기시면 지금까지 모아온 점수를 전부 잃게 되시니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교관은 그렇게 말하며 숫자 1이 수놓아진 하얀 깃발을 내게 건네주었다. 아무래도 첫 번째로 조를 짜는 데 성공했기에 1번인 모양이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다른 수련생들에게 호통을 치는 교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들려왔다.
“편성이 완료된 조는 여기 있는 보급품과 깃발을 받고 아르페리움 산속으로 먼저 들어갈 수 있다! 늦게 조를 짤수록, 늦게 들어가게 되니까 서두르도록!”
아무래도 아직도 5인 1조를 완성하는 데 성공한 수련생이 없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먼저 출발하는 모습을 보았으니, 천천히 한둘씩 수련생들이 뭉치기 시작할 테지.
늦장 부릴 시간은 없었다.
“받아.”
난 깃발을 안톤에게 맡기고 보급품 배낭을 확인했다. 배낭 속에 든 것은 하루 치 건량과 침낭, 약간의 야영용 도구들이었다.
물론 모든 필수 도구가 다 들어 있는 건 아니었다.
부족한 물건은 아르페리움 산속에서 수련생들이 스스로 획득해야 했다. 식량 또한 겨우 하루 치. 그 이상은 사냥과 채집으로 수련생이 알아서 구해야 한다.
‘그때랑 달라진 건 없군.’
나는 배낭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이 전생과 차이가 없다는 걸 확인했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 또한 그때와 다를 게 없을 거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전부 어디서 어떻게 얻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좋아.”
가볍게 배낭을 짊어졌다. 안톤, 루시엘, 갈롯, 그리고 카를 또한 배낭을 등에 메고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출발하시면 됩니다, 드레커 도련님. 건투를 빕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교관을 뒤로한 채, 우리는 눈보라가 치는 산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 *
아르페리움 산은 지극히 위험한 곳이다.
사시사철 눈보라가 그치지 않는 이 고산지대에는 극한의 자연환경에 걸맞게 강대한 몬스터가 득실거렸다.
‘7급 몬스터가 등장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니까.’
그렇기에 웬만큼 자신의 강함에 자신이 있는 실력자들도 아르페리움 산속으로 들어오기를 꺼렸다. 아무리 고위 기사나 마법사라고 해도 이런 환경에서 몬스터와 싸우는 건 피하고 싶을 테니까 말이다.
물론 리텐슈노프의 수련생들이 종합 평가를 치를 때에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종합 평가 기간이 다가오면, 리텐슈노프 가문에서 토벌대를 파견해 전격적으로 산에 있는 고위 등급 몬스터를 쓸어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고위 몬스터를 처치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종합 평가에 필요한 3급 이하 몬스터가 부족하면 일부러 다른 곳에서 몬스터를 잡아 와 풀어놓기도 했다.
‘그리고 이곳에 풀어놓는 몬스터의 종류는 정해져 있지.’
하급반 종합 평가를 위해 교관들이 풀어놓는 몬스터의 조건은 언제나 똑같았다.
이 지독한 혹한 속에서도 어느 정도 제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어야 하고, 하급반 수련생들의 실력으로도 충분히 힘을 합치면 사냥이 가능해야만 했다.
‘거기에 추가적으로, 필요할 때 충분한 숫자를 확보할 수 있는 몬스터여야만 하지.’
이러한 조건에 딱 들어맞는 몬스터는 그다지 많지 않다.
설산 고블린, 빙하 늑대, 아이스팽, 다크 오크 등등…….
그리고 나는 그 몬스터들의 사냥법을 전부 다 숙지하고 있었다. 몬스터가 가진 약점부터, 지금은 아직 아무도 모르는 몬스터들의 습관과 행동 패턴 등등.
‘지금 이 산에 풀어놓은 몬스터 중에서 내가 잡을 수 없는 녀석은 한 마리도 없다.’
현재 내 객관적인 실력은 2성 기사 정도.
이 정도면 하급반 최상위권을 넘어, 중급반에서 중간 정도의 실력이다. 그리고 그 정도의 실력과 더불어, 몬스터의 대처법을 전부 다 알고 있다면 종합 평가는 솔직히 식은 스프 먹기나 다름없었다.
‘오히려 내가 신경써야 하는 건…….’
내가 가진 진짜 실력을, 종합 평가를 감독하는 기사나 교관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숨기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내 삼촌들 중 어느 누구도 나를 신경쓰지 않고 있다.’
나는 고작 해봐야 가문의 막내. 그것도 이제 겨우 하급반 1년 차에 불과하다. 다른 사촌 형제들과 비교한다면, 이제 막 능력을 드러내는 시점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계속 시험 따위에서 뛰어난 성과를 내고, 꾸준히 강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삼촌들도 내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직은 괜찮겠지만.’
그래도 일부러 큰 관심을 끌 필요는 없다.
나름 뛰어나지만, 압도적이라는 평가는 받지 않게.
그 정도의 실력만을 드러낸다면 삼촌들은 나를 경계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나를 회유하려고 들겠지.
‘쓸만한 칼은 많이 확보해 둘수록 좋으니까 말이지.’
그러니 지금은 내가 가진 진짜 실력은 최대한 숨기고, 그 대신 내 조원들을 잘 이끌어서 종합 평가를 치르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뒤따라오는 안톤과 가롯에게 소리쳤다.
“흔적은 잘 지우고 있지?”
“네, 도련님!”
그 둘은 아까 전부터 내 지시를 따라서 우리 1조가 움직인 흔적을 전부 지우는 중이었다.
물론 아직 어리숙한 면이 있는 만큼 전부 다 제거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상관 없다.
‘진짜 날씨 한 번 지랄맞은 산이라니까. 뭐, 그것 때문에 우리는 편하지만.’
어차피 엄청난 눈보라가 자잘한 흔적 따위는 전부 쓸어버릴 테니까. 조금만 신경써 준다면 하급반 수련생들의 실력으로는 절대로 우릴 추적할 수 없다.
“좋아. 그럼 다음은…… 루시엘!”
“네!”
“저쪽에 있는 절벽 보이지? 저 절벽에 은신처로 삼을 만한 동굴이 있는지 정찰하고 와. 나머지는 이곳에서 주변을 경계하면서 땔감이 될 만한 걸 모은다.”
“알겠습니다!”
내 명령을 끝으로 모두가 흩어졌다. 그래도 다들 수련동 하급반 상위권 답게, 서로가 서로의 시야 범위 밖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래, 이게 진짜 팀이지.’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전 삶의 하급반 종합 평가 때는 얼마나 고생했던가?
무조건 자기 말이 옳다는 녀석, 제멋대로 쏘다니다가 몬스터를 몰고오는 녀석, 조장 말을 개똥으로 아는 녀석 등등…….
개개인의 실력은 다들 준수했지만, 팀워크 면에서는 최악이었다. 그 덕분에 전생에는 그놈들과 단체로 싸잡혀서 하위권의 점수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떨어진 점수를 만회 못해서 결국 쇠매 기사단에 쳐박혀서 개고생을 했었지? 젠장할, 지금 그 놈들도 이 산 어딘가에 있을 텐데, 마주치기만 해봐라.’
흠씬 두들겨 패줘야겠어.
그렇게 다짐하는 순간, 어떤 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용의 심장으로 강화된 육체가 아니었다면 놓칠 정도로 작은 소리.
-컹!
하지만 나는 곧바로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
분명했다. 이건 몬스터의 울음소리였다.
“이런…….”
그리고, 그 소리는 루시엘이 향한 절벽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