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뭐라?”
철혈궁, 가주의 집무실.
아자르가 실시간으로 올린 보고에 마그너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곧 노인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었다.
“허허! 허허허! 영지라니. 고 녀석, 임무를 하라고 보냈더니 영지를 뜯어와? 정말 말도 안 되는구만!”
마그너스가 책상을 탕탕 치며 쾌활하게 웃음 지었다. 그 모습에 아자르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아시스라고, 지역 소호족 중 하나의 영지를 빼앗은 거 같은데, 멜의 보고한 바에 따르면 정당한 대가라고 합니다.”
아자르의 보고에 마그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정당한 대가라면 충분하지. 힘으로 빼앗았어도 뭐, 상관은 없겠지만.”
그렇게 말하고는 껄껄 웃는 마그너스.
타 가문과의 마찰에 전혀 거리낌이 없는 모습이다.
그 대답에 아자르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주군…….”
“알고 있네. 그쪽이 시빌라와 아이스본의 이권 충돌 지대라는 것 정도는. 하나, 우리 쪽과도 가깝지 않은가? 이빨을 조금 들이밀어도 큰 문제는…….”
마그너스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 모습에 아자르는 설마 싶은 마음에 재빨리 대답했다.
“다행히 항의 서한은 날아오지 않았습니다만, 만약 조금이라도 더 많은 영지를 빼앗아 왔다면 분명 문제가 되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 마그너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확히 항의를 당하지 않을 만큼의 영지만 빼앗아 왔다고?
“그건 조금 이상하군. 아무리 드레커가 대단한 아이라지만, 그 나이에 그 정도의 균형 감각을 지니고 있다고?”
“드레커 도련님은 아니고, 이번에 도련님께서 거둔 노예가 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아측에서 분석한 결과, 아주 적절하게 영지를 분배한 모양입니다.”
“아래 있는 사람이 이룬 것도 윗사람의 능력이지.”
그 말에 마그너스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본인의 능력으로 이룬 성과였다면 그것도 좋고, 수하를 잘 둔 덕에 먹었다면 그것도 좋다.
어쨌든 수하 또한 본인이 품은 것 아닌가?
마그너스가 볼 때는, 그것 또한 본인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습니까…….”
그 말에 어차피 어떤 식으로 얻어냈든, 마그너스는 드레커를 칭찬했을 것이라고 아자르는 생각했다.
마그너스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이내 아자르의 눈을 마주보았다.
“그래, 일단 알겠네. 그럼 시빌라 쪽에는 자네가 가서 잘 다독이게. 아이스본은 내가 직접 갈 테니까.”
그 말에 아자르가 눈을 크게 떴다.
“주군께서 직접, 말씀이십니까?”
놀랄 만한 일이었다.
그 마그너스가 직접 움직인다고?
고작 이 정도 일로?
“그래, 손주 놈이 없어서 못 먹을 땅덩이를 뜯어왔는데, 직접 단도리 쳐주는 수고 정도는 해 줘야지.”
마그너스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 말에 아자르의 마음이 착잡해졌다.
‘역시 주군께서는…….’
드레커 리텐슈노프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다.
‘이제 슬슬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아자르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편, 한참을 흡족한 얼굴로 턱을 쓰다듬던 마그너스가, 이내 품속에서 궐련을 한 개비 꺼내 물었다.
손끝으로 궐련에 불을 붙이려던 마그너스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손을 튕기며 아자르를 돌아보았다.
“아, 맞아. 그래서, 드레커 그 녀석이 영지를 몇 개 얻었다고 했지?”
* * * * *
“네 개?”
“네, 그렇습니다. 대부분이 알짜입니다. 각 영지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여기, 여기에 있습니다.”
델리우스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 서류철을 넘겼다. 묵직한 서류의 무게를 느끼며 나는 생각했다.
‘……명불허전이라더니.’
역시 델리우스 게인이다.
영지 일곱 개 중 네 개를 대가로 받아오다니!
말 그대로 절반 이상을 뜯어온 셈이다.
[저 희멀건 놈, 생각보다 대단한 녀석이었구나? 네가 이 고생을 하면서까지 데려가려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도다. 협상력이 어마어마해!]
“허허.”
데우스의 감탄을 듣고 있으니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영지를 그만큼이나 빼앗아 온 델리우스도 대단하지만, 그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영지를 갖다 바치는 아시스 백작의 처신도 대단하게 느껴졌다.
‘아들이라는 놈이 하는 꼴을 보면 그 아비도 그다지 별 볼일 없을 것 같았는데.’
그래도 백작이라는 지위를 어디 포커판에서 딴 건 아니라는 뜻인가? 아니면 가신 중에 정신 멀쩡히 박혀 있는 녀석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건 차차 알아보도록 하고.’
나는 눈앞에서 임무의 평가를 기다리는 델리우스 게인을 바라보았다. 당당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약간 긴장한 기색이 있었다.
“영지는 그렇다 치고, 기사들은?”
“아시스 백작이 직접 기사를 이끌고 참전하기로 했습니다. 백작의 실력은 4성이라고 합니다.”
“호오.”
생각보다 성과가 컸다.
아니, 큰 정도가 아니라 엄청났다.
‘대체 어떻게 협상을 했길래 영주가 직접 무거운 엉덩이를 이끌고 나오게 할 수 있는 걸까?’
그 점이 궁금했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주인 된 자의 좋은 점이 뭔가?
이런 사소하고 자잘한 일 따위에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사사로운 것 따위는 아랫것들이 신경 쓸 일이다. 주인은 결과만 보고 받으면 된다.
“좋아. 합격.”
“여, 역시. 예상했습니다.”
내 통과 선언에 델리우스가 양 팔을 번쩍 들며 말했다. 말과 행동이 안 맞는 모습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손부터 내리고 말하지?”
“아, 아하하.”
델리우스는 어색한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일단 합격은 했지만, 앞으로 계속 지켜볼 거야. 일단은 내 영지로 가서 교육을 받도록.”
“알겠습니다.”
“바르헴 영지로 가면 마리라고, 그곳을 지금 총괄하는 사람이 있을 거야. 그 사람의 인솔을 받아서 교육을 받고, 영지 관리를 좀 도우면서 대기하면 돼.”
“그, 마리라는 분은…….”
“내 유모.”
내 단호한 대답에 델리우스가 눈을 반짝였다.
“아, 알겠습니다. 선임으로 모시겠습니다.”
곧바로 내 휘하의 권력관계를 이해한 모습.
역시 머리가 잘 돌아간다.
나는 가볍게 박수를 짝 쳤다.
“좋아. 그럼 곧장 출발하라고.”
내 말에 델리우스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떨렸다.
“고, 곧장 말입니까? 설마 지금?”
“그럼, 여기서 더 할 게 남았어?”
“그건 아니지만…….”
델리우스가 어째서인지 말을 흐렸다.
설마 일하기가 귀찮아서 그러는 걸까?
성격 상 그럴 리는 없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뭐, 딱히 중요한 일 아니면 가서 일 해. 오늘 출발하는 가장 빠른 칠로포다 열차를 타고 가면 될 거야. 어차피 바르헴 근처까지 직통이니까.”
그 말에 델리우스가 창백한 얼굴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내가 번복하지 않을 기세라는 걸 깨닫고는 포기한 듯 한숨을 쉬었다.
“……알겠습니다.”
내 말에 델리우스가 힘없이 대꾸했다.
곧, 그는 축 늘어진 채 밖으로 나갔다.
“왜 저래?”
나는 떠나가는 델리우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의문에 대한 답은 데우스에게서 나왔다.
[아무래도 너랑 같은 이유 같구나.]
‘같은 이유요?’
[멀미.]
아.
설마 진짜 그런 이유 때문인가?
하긴, 전생에도 그는 마차를 고집하긴 했다.
아이스본에서 마도공학열차를 만들어 보급한 이후에도 그랬다. 편의성에서는 마도공학열차를 따라올 게 없었는데(최소한 칠로포다도 먹이는 줘야 했다) 언제나 마차만 타는 그 행태에 아덴도 골머리를 앓았었지.
‘그때는 그냥 취향이 확고한 줄 알았는데…….’
사실 나와 같은 이유였다니.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부분에서 델리우스와 동질감이 느껴졌다.
‘흐음.’
의외로 전생에도 나름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나 곧 나는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과거는 과거다.’
지금의 나는 비루한 사냥개가 아니라, 리텐슈노프 가문의 드레커다. 전생의 기억은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 사용하고, 그 외는 전부 접어서 치워버려야 했다.
그래야만 진정한 리텐슈노프가 될 수 있었다.
‘……아니, 미래인가?’
실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응접실로 돌아왔다.
응접실에는 아멜리아가 앉아 있었다.
“왔어?”
나를 보곤 가볍게 손을 흔드는 소녀.
“어때, 할 일은 다 끝낸 거야?”
암청빛 눈이 호선을 그리며 웃는다.
그 미소를 보고 있으니 뭔가 기분이 묘하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그녀 앞에 앉았다.
“일은 다 처리했다.”
“어머, 빠르기도 해라.”
그녀가 웃으며 가볍게 박수를 쳤다.
그 작위적이고 연기 톤인 반응을 보고 있으니 묘하게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대충 손을 휘저었다.
“집어치워. 애 취급하는 것 같잖아.”
“애잖아?”
아멜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
[뭐, 틀린 말은 아니구나. 열두 살이니까.]
하나, 곧 나는 한숨을 푹 쉬고는 테이블에 놓인 차를 들었다. 은은하게 잘 타인 녹차였다.
“아이스본의 특산품인가?”
“우리 쪽 차가 좀 맛이 좋긴 하지만, 아냐. 이건 시빌라 쪽에서 생산된 차거든. 아이스본보다는 질이 떨어지지만, 그래도 명가는 명가니 맛은 나쁘지 않아.”
그 말에 나는 차를 홀짝였다.
그녀 말대로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나는 녹빛의 액체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번 일의 성과는 나쁘지 않다.’
영지나 델리우스를 얻은 거야 말할 것도 없고, 중요한 건 처음으로 받은 중급 임무를 완벽하게 완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혼자서 말이지.’
물론 실질적으로 이번 임무를 수행한 건 나 혼자가 아니다. 아시스의 기사들과 백작까지 동행하니까.
하나, 그 모든 건 나 혼자 힘으로 이루어 낸 것이다.
‘리텐슈노프에서 보는 건 결과다.’
어찌되었든, 나 혼자 임무를 받아서 가문 소속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임무를 수행했다는 게 중요한 거다.
나를 도와 협상을 수행한 델리우스?
그를 통해서 내가 끌어온 아시스 백작의 세력?
상관없다.
‘그거야 전부 내가 잘난 덕분에 이룬 결과니까.’
이런 게 아니꼬우면 다른 놈들도 자기 힘으로 사람 차출해서 임무 수행하면 된다. 리텐슈노프에서 딱히 그걸 금지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호엔슈타펠과는 다르게, 리텐슈노프는 융통성이 있으니까.’
강자존의 가문 리텐슈노프에서 개인의 힘이란, 이런 것도 포괄하는 거대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걸 증명했다.
상급반의 첫 발걸음을 제대로 내딪은 것이다.
‘이제부터 들어오는 견제는 지금까지와는 다를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주 경쟁자가 모두 모인 상급반이니까 말이다.
‘거기에 더불어…….’
그 부모 세대.
내 큰아버지들까지 이제는 날 주목하겠지.
‘수라장이 펼쳐질 거다.’
한 치 앞도 가늠하기 힘든 험한 길이 이어지리라.
하지만.
“할 수 있다.”
“응? 뭐라고?”
차를 홀짝이던 아멜리아가 힐끗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려 주고는, 손에 쥔 찻잔 속 녹차를 노려보았다.
찻물에 비친 내 두 눈에서 귀화가 이는 게 보였다.
‘이제…….’
진짜 후계 경쟁, 시작이다.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