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어째서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불만을 가득 품은 아멜리아를 달랜 뒤, 곧바로 마법 준비를 시작했다.
데우스에게 들은 대로 그녀가 시전해야 할 마법을 대략적으로 설명하자 아멜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이건?”
“왜?”
그녀가 미간을 곱게 좁히며 중얼거렸다.
“아니, 뭐라고 해야 하나…… 좀 예스러운 마법이네.”
예스럽다고?
“그게 무슨 뜻이지?”
내 물음에 아멜리아는 턱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요즘 마법은 이런 식으로 구성을 안 하거든. 이런 느낌이면 정말 아주 옛날 마법인 거 같은데……. 대체 이런 먼지 풀풀 나는 걸 어디서 찾아낸 거야?”
그 말에 무의식적으로 풋 하고 웃음이 터졌다.
[웃지 말거라. 기분이 나쁘도다.]
‘아니, 뭐가요. 또.’
[그야 꼬맹이, 너. 지금 또 나를 늙은이라고 놀리려고 했잖느냐. 나는 다 알 수 있느니라.]
‘그럴리가요.’
꼰대라고 놀렸으면 놀렸지, 늙은이는 아니다.
[거짓말을 할 거라면 입에 침이라도 바르거라.]
‘앞으로는 그렇게 하죠, 뭐.’
[뭐라?]
내 대답에 기분이 상한 데우스가 궁시렁거렸지만, 나는 그런 것에 신경쓸 틈은 없었다.
이제 마법을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것 좀 치워 줘.”
나는 방 한가운데 놓인 탁상을 치웠다.
그러자 그녀가 품 속에서 분필 한 자루를 꺼내, 객실 한복판에 마법진을 슥슥 그렸다. 여러 개의 상형 문자와 함께 수많은 선이 바닥에 죽죽 그어졌다.
그렇게 한참 동안 선을 그었을까.
마법진을 완성한 아멜리아가 허리를 폈다.
“다 됐어.”
“그래?”
나는 완성된 마법진을 살폈다.
물론 마법에 조예가 없는 나는 봐도 저게 무엇인지, 제대로 완성된 것인지 구분할 능력이 없었다.
[다 되었더냐?]
하나 상관 없었다.
‘데우스 님이 보면 알겠죠. 제가 어찌 압니까?’
어차피 완성의 판단은 데우스가 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고작 판독기로 쓰려 한다는 걸 눈치 챈 데우스가 또다시 쓸데없이 투덜거렸으나,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은 우리 둘 모두 알고 있었다.
잠시 마법진을 살핀 데우스가 중얼거렸다.
[제대로 그렸구나. 역시 네 연인이 일을 잘 해.]
‘애인 아니라니까요.’
[그럼 아내로 하려무나.]
‘뭐라는 거야, 이 미친 노친네 드래곤이!’
정신을 사납게 하는 데우스의 공격에 내가 뚱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아멜리아가 내게 물었다.
“드레커.”
“어? 왜.”
“이게 무슨 마법인지는 말해줄 생각이 없지?”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마법이 어떤 것인지 설명을 하려면 데우스와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
‘그럴 수는 없지.’
그녀가 내게 보이는 호의는 고마운 일이지만, 나는 아직 아멜리아를 믿지 않았다.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전생에 그녀가 보여준 모습은, 경계를 할 수밖에 없게 했으니까.
“에휴.”
내 대답에 아멜리아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정말……. 드레커, 너는 나 같은 친구를 사귄 걸 감사히 여겨야 해. 이렇게 가타부타 말없이 도와주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겠니?”
묘하게 가슴을 찌르는 말.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어색하게 대꾸했다.
“그래, 그건 고마워.”
“말은 잘하네.”
아멜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리고는 곧 분필을 품속에 넣고,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암청빛 눈동자가 나를 마주한다. 그녀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거, 안전한 거 맞지?”
“어…… 안전할 거야.”
나에게 작동하는 마법인 만큼, 시전자인 아멜리아가 무언가 리바운드를 겪을 리는 없었다. 만일 무언가 잘못되어(예를 들면, 데우스가 치매가 와서 마법진을 잘못 봤다던가) 반동이 찾아온다고 해도 나를 향하리라.
그러나 아멜리아가 물어본 건 그게 아니었다.
“네가 안전한 마법이냐고.”
“……안전할거야. 아니, 안전해.”
그 대답을 듣고야 그녀는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과장된 행동이 껄끄러워 나는 시선을 피했다.
“알았어. 이제 그럼 준비할게.”
“응.”
그녀의 말에 나는 마법진 한 가운데로 가 앉았다.
마법진의 가운데에 정좌한 채 명상하듯 심호흡하고 있으니 아멜리아가 진의 한쪽 구석에 두 손을 올려두었다. 곧 천천히 그녀가 마나를 진 안에 불어 넣었다.
그러자 곧바로 마법진이 하얗게 빛났다.
빛기둥이 아스라이 사방에서 올라오기 시작한다.
묘하게 아름다운 모습.
[예상대로 네 정인은 실패하지 않았구나. 진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도다.]
데우스가 마법의 성공을 말했다.
나는 아멜리아를 살폈다.
별로 어려운 마법이 아니라는 데우스의 설명과는 다르게, 생각보다 쉬운 것은 아니었는지 아멜리아는 한껏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땀 한 방울이 바닥에 툭 떨어진다.
동시에 마법진이 휘황찬란한 빛을 발했다.
순간적으로 무언가 몸을 짓누르는 듯한 감각이 느껴진다.
동시에 시야가 좁아지며, 세상이 한 점으로 압축된다.
순식간에 사방이 밀려나며 저 멀리 사라지고, 작은 빛줄기가 주변을 스치듯 지나쳤다.
그 아름다우면서도 신비로운 광경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순간.
“……싶지 않아.”
무언가, 들렸다.
절망이 가득 담긴 가냘픈 목소리.
“그런 운명…… 싫…….”
마치 세상을 저주하듯, 짓씹으며 내뱉는 목소리.
“왜 내가…… 제…… 되야 하는 거야?”
울먹임 섞인 그 음성은.
“도와줘.”
누군가의 것을 닮아 있었다.
* * * * *
-쿵!
순간적으로 세상이 흔들린다.
동시에 사위에 어둠이 가득 들어찼다.
나는 조심스레 눈을 깜빡였다.
‘방금…… 뭐였지?’
무언가,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의아한 마음에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서 누군가가 어둠을 뚫고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제복을 입은 늙은 노인이었다.
마치 사자 갈기처럼 늘어진 수염과 머리칼은 수북해, 어찌 보면 지저분하게 느껴졌다. 주름 가득한 얼굴과는 반대로 육신은 건장했고 풍채가 좋았다.
내 앞에서 멈추어 선 노인이 씩 웃었다.
[드디어 제대로 마주하는구나, 꼬맹아.]
익숙한 목소리.
절로 눈이 커졌다.
“데우스 님?”
[그래, 나다.]
노인, 데우스는 나를 웃음기 섞인 눈으로 지그시 나를 바라보았다.
곧, 그가 스윽 손을 들었다.
그리고는 곧장 내 머리를 콱 쥐어박았다.
“악!”
갑작스러운 행동에 그대로 머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니, 뭐 하십니까?”
[내가 만나면 한 대 쥐어박아 준다고 그리 호언장담하지 않았더냐. 나는 약속을 지켰을 뿐이도다.]
쪼잔하긴 진짜.
“그걸 꼭 지금 해야 했습니까?”
내가 정수리를 문지르며 항의하자, 데우스는 껄껄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이 좋은 기회를 그냥 보내라는 게냐?]
흐뭇한 표정을 짓는 데우스.
절로 심술이 퐁퐁 솟아오른다.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일부러 그의 수북한 머리칼을 지그시 바라보며, 심드렁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머리 위에 그건 가발입니까?”
[……무, 무어가 어쩌고 어째? 가, 가발이라니! 이건 본디 내 머리칼이 맞도다!]
내 회심의 일격에 데우스가 펄쩍 뛰며 소리쳤다.
“당황하시는 걸 보니, 최소한 가발, 또는 그와 비슷한 속임수라는 건 알겠네요.”
[이 쥐방울만한 꼬맹이가 진짜……!]
다시금 내 머리를 쥐어박으려는 손길을 피해낸 뒤, 나는 두어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쩝니까?”
[무어가 무어라는 것이더냐.]
“고대의 영웅들과 싸울 수 있다면서요.”
나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황량하기 그지없는 어둠의 공간. 나와 데우스를 제외하면 이곳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 것도 없는데요?”
[거, 성질 한 번 참 급하구나.]
그런 내 물음에, 데우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당연히 지금은 아무 것도 없어야지. 내가 기억을 읽을 수 있게 허락하지 않았잖느냐? 설마 네 녀석이 나의 기억을 마음대로 엿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느냐?]
“그럼 허락 좀 해 주시죠.”
[좀 더 공손하게 말해보거라.]
“싫습니다.”
[개똥같은 꼬맹이 같으니…….]
데우스는 툴툴거리더니, 이내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황금으로 장식된 왕좌가 갑자기 허공에서 툭 떨어졌다. 데우스는 자연스럽게 그 왕좌에 앉고는, 이내 턱을 괸 채 물었다.
[어떤 상대가 좋더냐.]
“상대 말입니까?”
상대를 고르라고 해도 말이지…….
“누굴 고를 수 있는지 모르는데요?”
역사적 영웅이라고 하면 너무 광범위하다.
[그럼 대충 내가 내보내는 녀석이랑 싸우거라. 어차피 네 수준에서는 그게 그거일 터이니까 말이다.]
“정말 대충이시네요.”
[시끄럽도다.]
데우스는 휘적휘적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다시금 공간이 뒤흔들렸다.
동시에 세상이 빠르게 뒤바뀌었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에서 갑자기 누런 벽돌이 휙휙 날아오더니 제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거뭇하던 하늘에는 푸른 빛이 돌았고, 없던 해가 떠올랐다. 석제 기둥이 땅을 울리며 솟아오르고, 사물들이 생겨났다.
다음 순간.
나는 거대한 연무장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사방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울려퍼진다.
고개를 돌리자 수백, 수천 명이 넘는 관중이 연무장 객석에 앉아서 환호하고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는 과거 고대인들의 축제 장소이니라.]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시선을 돌렸다. 연무장의 한켠. 화려하게 장식된, 상석으로 보이는 자리에 앉아 있는 데우스가 내게 말했다.
[사람이 싸우는 것을 지켜보며 시민들이 즐기던 곳이지. 고대인들은 죽고 죽이는 혈투를 유희 거리로 삼았도다. 미개하다고 욕하기에는 요즘 시대도 별 반 차이는 없으니 너도 대충 어떤 분위기인지 알 것이다.]
“콜로세움이군요.”
[그렇지.]
그렇다면 저 반대편 입구 안에 내 상대가 있겠군.
그리고 그가, 고대의 영웅일 것이다.
나는 콜로세움 내부를 둘러보았다.
나를 보며 주먹을 휘두르는 관객만이 눈에 들어온다. 만일 이게 진짜 현실이었다면, 저들 중 일부는 내 목숨에 돈을 걸었으리라.
그 사실이 은근히 거슬리는 기분이다.
“이거, 은근 정신 사납네요.”
[이런 장소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던 검투사들이 대단한 것이지. 너도 이제 그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게다.]
그 순간.
-끼이이익!
반대편 입구의 철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기름칠을 안 하기라도 한 건지, 철문은 끔찍한 비명을 질러대며 천천히 움직였다.
아마 일부러 저런 소리가 나도록 하여, 검투사들이 긴장하도록 만들었으리라.
그리고 곧, 문이 열리고.
나는 한 청년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여자 여럿 울릴 것 같이 생긴 청년이었다.
단지, 작은 흠이 있다면 얼굴에 걸맞지 않게 우락부락하게 솟아난 근육이랄까. 마치 돌덩이를 잔뜩 몸뚱이에 붙여놓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나는 데우스를 힐끔 바라보았다.
“누구인지는 알려주실 거죠?”
그 물음에 데우스가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알려주고 말고.]
그 순간.
근육질 청년이 오른손을 들었다.
엄지와 검지가 서로 꽉 맞물린 채, 비틀리는 손가락.
최근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광경이었다.
‘이거, 분명 멜의…….’
기억이 떠오른 순간, 내 얼굴이 창백해졌고.
[네 상대는…….]
데우스의 끌끌 웃는 목소리가 귓전을 찔렀다.
[암즈의 초대 가주. 아가레스 암즈이니라.]
다음 순간.
-쾅!
아가레스의 손가락이 튕겼고.
동시에 엄청난 충격이 몸을 덮쳤다.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