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호주 오픈
경기가 끝나자 코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리포터가 상기된 얼굴로 다가왔다.
그러자 코트 주변에 배치되어있는 카메라들이 지혁의 얼굴을 찍기 위해 일제히 움직였다.
[리, 당신은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만들어 냈어요. 정말 대단한 경기였어요.]
리포터는 이번 호주 오픈에서 이변을 일으키고 있는 지혁에게 반짝이는 눈빛으로 말했다.
인터뷰가 시작하려고 하자 시끄럽던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관중들도 어린 테니스 선수가 어떤 말을 할지 궁금했던 것이다.
[제가 알기로 리의 나이는 아직 16살밖에 되지 않는 걸로 알아요. 게다가 이번 호주 오픈이 그랜드 슬램 첫 참가죠. 그런데 2라운드에서 바브린카를 꺾고 3:2로 승리하셨네요. 5시간이 넘는 경기였는데 어떻게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가요?]
“저도 경기가 5세트까지 갈 줄은 예상하지 못했어요. 마지막까지 버틴 건 아무래도 포기하기 싫었기 때문이죠. 첫 그랜드 슬램을 기권으로 마무리 할 수는 없잖아요.”
승부욕이 담긴 지혁의 말에 관중들은 가볍게 웃었다.
어린 선수 특유의 고집이 담겨있는 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희는 리의 경기력에 정말 감탄했어요. 굉장히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주셨는데요. 어떻게 그런 포핸드를 칠 수 있는 거죠? 마치 나달이 코트에 서있는 것 같았어요.]
“예전부터 나달의 경기를 보면서 참고를 많이 했어요. 나달은 제 이상향에 가장 가까운 선수거든요.”
[리는 2:0으로 앞서다가 바브린카에게 역전당해서 결국 5세트 듀스 상황까지 갔죠. 그때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최대한 빨리 끝내야 된다고 생각했죠. 경기를 보셨으면 알겠지만 저는 거의 한계였어요.”
지혁의 말처럼 5세트가 10-8으로 끝나서 다행이지 만약 마지막 챌린지가 실패했다면 지금 인터뷰를 하고 있는 건 높은 확률로 바브린카였을 것이다.
[리가 프로에 데뷔한 건 작년 4월인데 아직까지 공식 경기에서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어요. 언제까지 전승을 이어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전승이라···. 딱히 생각해보진 않았는데 가능하면 호주 오픈에서도 그 기록을 이어가고 싶네요.”
지혁이 전승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자 원래 그에 대해 잘 모르고 있던 관중들은 놀란 얼굴을 했다.
아무리 경력이 1년밖에 안 됐지만 그랜드 슬램에 참가한 선수가 아직까지 패배가 없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낯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지혁의 인터뷰를 보고 있던 시청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틀 뒤면 32강에 진출한 마린 칠리치와 경기를 할 건데요. 리는 그를 상대로 어떤 준비를 할 건가요?]
“일단 호텔로 가서 그냥 푹 쉬려고 해요. 오늘 경기가 너무 힘들었거든요.”
지혁은 아직도 떨리는 자신의 다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몸이 회복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전략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리의 상태를 보니 그래야 될 것 같네요.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없나요? 분명히 당신의 말을 듣고 싶어 할 거예요.]
“지금 방송을 보고 있는 모든 팬 여러분. 제 경기를 봐주셔서 정말 감사하고 32강에서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릴 테니까 계속 응원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마지막 멘트를 하자 마침내 인터뷰가 끝났다.
지혁이 경기장 출구로 비틀거리며 걸어가자 다시 한 번 박수가 쏟아졌다.
오늘 있었던 경기와 지혁의 인터뷰가 관중들에게 커다란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고 있던 테니스 관계자들은 오랜 경험으로 물건이 나타났음을 직감했다.
나이, 외모, 실력 등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재료들이 지혁에게는 넘쳐 보였던 것이다.
돈 냄새를 맡은 그들은 곧바로 휴대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했다.
아직 가치가 낮을 때 계약을 따내기 위해서였다.
***
한국 반응.
지혁의 경기를 중계하고 있는 SBC 스포츠는 평균 시청률 6%를 달성했다.
드라마나 예능에 비해 그리 높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5시간이 넘는 경기 시간을 생각하면 이건 절대 작은 수치가 아니다.
보통 올림픽이나 월드컵이 아니면 스포츠로 시청률 5%를 넘기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혁이 짜릿한 역전승으로 호주 오픈 32강에 진출하는 게 확정되자 한국에서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흘렀다.
예상하지 못한 결과에 설마 하는 생각이 사람들 사이에서 퍼졌던 것이다.
그걸 증명하듯이 포털 사이트 검색어는 지혁에 대한 키워드로 점령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스포츠 스타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폭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론사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사를 쏟아냈다.
[이지혁(만 16세), 바브린카를 꺾고 호주 오픈 32강 진출.]
[더 이상 유망주라고 부를 수 없는 이지혁. 과연 호주 오픈에서 새로운 전설을 쓸 수 있을까?]
[연전연승! 패배를 모르는 천재 테니스 선수.]
[프로 데뷔 후 아직까지 무패인 이지혁, 호주 오픈에서도 그 실력을 보여 주다.]
[SBC 스포츠, 이지혁 효과로 최고 시청률 8% 달성. 스포츠계의 새로운 블루칩으로 떠오르다.]
[호주 오픈 32강 상대는 랭킹 마린 칠리치, 전문가들이 본 이지혁의 승률은?]
-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냐? 분명 지는 경기였는데 어떻게 역전한 거지?
- 진짜 명경기였다. 못 본 사람 꼭 다시 봐라.
- 지혁좌 주니어 대회부터 지켜봤는데 너무 감동적이었음 ㅠㅠ
- 경기 끝나고 휘청거리는 거 봤음? 그거 보고 눈물 나더라. 얼마나 힘들었을 까.
- 무패 우승 가즈아!!!
- 호주 오픈 32강??? 이제 이지혁이 한국에서 제일 테니스 잘하는 거 아니냐?
- 한국 최고 기록이 이형석의 16강 아님? 이번에 잘하면 깰 수 있을 것 같다.
- 인터뷰 하는 거 보니까 영어도 유창하네. 대체 못하는 게 뭐냐. ㄷㄷ
- 이지혁 이제 돈 방석에 앉겠네 ;; 16살에 이 정도 활약이면 스폰서들이 미친 듯이 달려들 건데.
- ㄹㅇ 성장 가능성을 생각하면 나라도 지금 달려들지 지금 포텐셜 생각하면 먼저 잡는 사람이 임자다.
***
호주 오픈 64강이 끝나고 하루 뒤.
지혁의 아버지, 성민은 밀려드는 전화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소식이 끊겼던 먼 친척, 사촌, 지인들에게 쉴 틈도 없이 안부 전화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단지 순수한 축하라면 관심을 가져줘서 그도 고맙다는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사를 핑계로 사업 제안이나 돈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왔다.
“성민아 이번에 좋은 사업 아이템이···.”
“아, 형님. 지금 바빠서 나중에 연락드릴게요.”
“그러지 말고 이번에 지혁이가 한국에 들어오면 우리 직접 만나서 이야기 해보자. 가족 좋다는 게 뭐냐······.”
뚜 뚜 뚜.
성민은 이미 몇 번이나 들었던 식상한 소리에 대답을 하지 않고 연결을 끊었다.
더 이상 들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분명 예의가 없다고 욕을 먹겠지만 이제 일일이 거절하는 것도 지쳤다.
“후··· 연락도 없던 사람이 갑자기 뭔 사업이야. 이런 방식으로 말하면 정말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로또에 당첨되거나 돈 벼락을 맞았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난 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접근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하루 사이에 이런 흑심이 담겨있는 전화만 벌써 백 통이 넘는다.
“허, 내가 이렇게 아는 사람이 많았나.”
지잉-
그러기도 잠시 다시 휴대폰이 진동했다.
“······네. 스폰서는 이번 대회가 끝나고 받으려고 합니다. 일단 제안서부터 보내주세요.”
성민은 유명한 스포츠 회사의 제안을 미루면서 전화를 끊었다.
쓸모없는 연락이 쏟아지는 중에서도 이런 전화가 왔기 때문에 이때까지 휴대폰 전원을 끄지 않고 있었다.
“4억이라···.”
일반인이라면 평생 벌어보지 못할 액수 제안이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온다.
하루 전에 이런 말을 들었다면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겠지만 이미 비슷한 제안을 몇 번이나 받은 후라서 이젠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계약을 하려면 혼자서는 안 되겠는데.”
금액이 한두 푼이면 모르겠는데 이 정도 규모면 이제 개인이 처리할 수준이 아니다.
게다가 당장은 억 단위의 제안이 왔다갔다하고 있지만.
만약 지혁이 이번 32강에서 이기고 16강에 진출한다면 지금보다 몸값이 최소 두 배 이상 뛸 것이다.
지잉- 지잉-
다시 진동하는 휴대폰에 성민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매니지먼트를 구하기 전까지는 이런 생활을 계속 이어나가야 할 것 같다.
아들의 의견도 들어보고 회사를 정해야 할 테니 적어도 호주 오픈이 끝나야 여유가 생길 것이다.
“그럼 적어도 보름 동안은 이 짓거리를 더 해야겠구나···.”
***
기다리고 있던 호주 오픈 32강.
지혁은 이전보다 부쩍 늘어난 관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 선수인 마린 칠리치도 도착했다.
‘여전히 키가 크구나···.’
이전에 경기를 해 본적이 있었지만 언제 봐도 압박감이 느껴지는 체구다.
저 거대한 몸으로 치는 강서브를 받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위가 쓰려지는 것 같았다.
‘아마 마린 칠리치의 서브 최고 속도가 235km였지?’
워낙 당한 게 많아서 정확하게 기억난다.
마린 칠리치는 랭킹 10위 권 이하의 선수들에게 사신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독 빅3에게 죽을 쓰는 것도 인상적이었고 말이다.
아마 지혁이 기억하기로 그의 빅3 통산 승률이 24전 3승 21패였던 걸로 기억한다.
전형적으로 양학을 하는 선수였던 것이다.
‘서브만 잘 처리하면 어렵지 않은 선수이긴 한데.’
지혁은 작년 US오픈에서 마린 칠리치가 델 포트로에게 3-1로 패배하는 걸 직접 직관했다.
그때도 서브가 먹히지 않으니까 허무하게 무너진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 서브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것이다.
‘일단 경기를 해보자.’
얼마나 대응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다.
그럴 듯한 대처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략도 스트로크가 이어져야 통하지 에이스로 게임이 끝나는데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플레이어 레디.]
곧이어 체어 엠파이어의 콜이 떨어졌다.
마린 칠리치의 서브로 시작된 경기.
쾅!!
[피프틴 러브.]
처음부터 210km가 넘는 서브가 T존에 꽂히자 지혁은 아무것도 못 하고 점수를 내주었다.
속도도 빨랐지만 코스가 정말 절묘하다. 속히 말해서 알아도 못 치는 서브.
[게임 칠리치 1-0.]
결국 지혁은 아무것도 못하고 첫 게임을 내줬다.
‘컨디션이 좋은 것 같네···.’
이전에 봤을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몸 상태가 최상인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아무리 마린 칠리치가 대단하다지만 베이글 게임이 나올 리가 없었다.
예상했던 것 중에 가장 최악의 상황이지만 지혁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한 번이라도 브레이크를 당하면 세트를 통째로 뺏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