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성장
“지···지연아, 저기 있는 사람 이지혁 선수 맞지?”
현주는 지혁이 있는 방향을 힐끔힐끔 훔쳐보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무래도 지금 상황이 제대로 실감이 나지 않는 모양이다.
사실 그녀는 아카데미에서 지혁을 보는 걸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호주 오픈이 끝나고 보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이때까지 방문했다는 소식을 한 번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이렇게 아카데미에서 마주친 걸 보면 아무래도 그 생각은 틀렸던 것 같았다.
“네. 언니도 호주 오픈 중계를 봤잖아요? 지혁 오빠 얼굴이 방송과 다른 것 같아요? 저는 비슷한 거 같은데······.”
“아니···그게 아니라 너무 잘생겨서, 실물이 훨씬 더 멋있는 거 같아······.”
현주는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지혁을 직접 만나기만 하면 꼬실 수 있다고 장담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기억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지 상당히 자신 없는 모습을 보였다.
연예인보다 잘생긴 지혁의 외모에 목소리가 개미처럼 작아진 것이다.
항상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여주던 그녀를 생각하면 조금 의외의 모습이다.
“음······. 그러고 보니 한 달 전부터 지혁 오빠하고 얘기하고 싶다고 말했었죠? 지금 소개 시켜드릴까요?”
지연은 평소와 분위기가 달라진 현주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들었던 말이 생각났는지 수건으로 땀을 닦고 있는 지혁을 가리키며 현주에게 제안했다.
만약 훈련 중이었다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휴식을 취하는 중이라 방해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으···응.”
갑작스러운 지연의 제안에 당황한 현주.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긍정의 답을 내놓았다.
혹시 이번 기회에 지혁과 친분을 쌓을 수 있을 거라는 얄팍한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지혁처럼 실력이 뛰어나고 유명한 사람과 인맥을 가질 수 있다면 앞으로 선수 생활을 하는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간단한 기술 코칭이나 투어에 필요한 조언을 들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저벅저벅.
잠시 후, 두 여자들이 지혁이 앉아 있는 의자로 걸어왔다.
“오빠, 소개시켜줄 사람이 있어요.”
“응? 혹시 옆에 있는 분을 말하는 거야?”
“네. 이번에 수강생으로 들어온 현주 언니에요. 저랑 같은 고등부 선수구요.”
“······안녕하세요? 작년 주니어 그랜드슬램부터 경기 정말 잘 봤어요. 진짜 팬이에요.”
“아, 네. 안녕하세요.”
이전에 안면이 없던 현주가 접근하자 지혁은 형식적으로 인사를 받았다.
만약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면 예쁘장한 현주가 호감 있는 표정으로 인사했을 때 상당한 호의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팬을 자청하는 사람을 질릴 정도로 많이 겪어 봤기 때문에 지혁은 감각이 상당히 무뎌져 있었다.
하루에 적어도 수십 명씩 사인을 해주다보면 누구라도 지금처럼 변할 것이다.
그렇게 20분 여분 쯤 시간이 흘렀을까.
대화가 제법 이어지면서 현주는 어느 정도 긴장이 풀린 건지 슬슬 친근한 태도로 말을 걸어왔다.
“지연이랑 했던 것처럼 저도 같이 경기······.”
지혁은 예상했던 대로 부탁을 듣게 되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역시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분명 크게 어렵지 않은 요구다.
하지만 지혁은 괜히 모르는 사람에게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기는 싫었다.
괜히 부탁을 들어주었다가 나중에 더 큰 부탁을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보다 더 귀찮아 질 수도 있다.
‘이 녀석이 소개시켜준 사람만 아니면 단 번에 잘라냈을 건데······.’
지혁은 옆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지연을 골치 아픈 표정으로 봤다.
가식적이지 않고 순수한 면이 좋기는 한데 정말 가끔 눈치가 없는 것 같았다.
이런 골칫덩이를 데리고 오다니.
“오늘은 훈련이 남아있어서요. 나중에 시간이 되면 해드릴게요.”
이대로 내버려두면 현주가 계속 은근한 부탁을 할 것 같자 지혁은 훈련 핑계를 대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녀의 요청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등 뒤에서 아쉬운 눈빛이 느껴졌지만 괜한 시간을 낭비 하기는 싫었다.
게다가 정말로 남은 훈련이 있었으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다.
***
라켓을 챙겨 코트 위로 올라가는 지혁.
지연과 현주는 훈련하는 모습이 궁금한지 방해되지 않을 거리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녀들도 오늘 소화해야 할 스케줄이 있지만 그걸 조금 미루더라도 지혁의 훈련이 보고 싶은 모양이다.
“흐읍!”
쾅!!
잠시 후, 시작 된 지혁의 서브 훈련.
지연과 경기를 하면서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전력을 다한 플랫 서브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굉음과 함께 엄청난 속도로 서비스 코트에 내려꽂히는 공.
‘220km 초중반 정도인가?’
위력을 보니 1시간 동안 경기를 하면서 워밍업이 되었는지 몸이 대부분 풀린 것 같았다.
이 정도 속도면 지금 낼 수 있는 최대 속도와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
무덤덤한 지혁의 표정과는 다르게 구경하고 있던 두 여자들의 입은 떡하고 벌어졌다.
국내에서 볼 수 없는 엄청난 위력의 서브를 보고 깜짝 놀란 것이다.
그녀들도 나름 테니스 선수로 뛰고있지만 이렇게 빠른 공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한국에서 서브가 강점인 선수는 많아봐야 한, 두 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지연아, 아까 이지혁 선수랑 경기했다고 하지 않았어? 넌 저런 서브를 받을 수 있는 거야?”
“······저런 공을 사람이 어떻게 리턴해요. 그런데 서브가 더 빨라진 거 같아요. 분명 한 달 전에는 저렇게 빠르지 않았는데···.”
쾅!! 쾅!! 쾅!!
그렇게 그녀들은 훈련이 끝날 때 동안 멍한 표정으로 지혁을 지켜봤다.
굉음과 엄청난 속도가 시선을 사로잡았던 이유도 있지만, 그의 서브가 눈을 땔 수 없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눈앞에 자신들이 꿈꾸던 이상적인 서브가 있는데 테니스 선수라면 시선을 빼앗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배우는 점이 상당히 많았으니 말이다.
아마 지금 모습을 제대로 기억한다면 서브 자세를 교정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
아카데미에서 지연을 만나고 며칠의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지혁은 3월까지 ATP250과 ATP500에 불참한다고 주변에 전달했다.
속으로만 생각하던 계획을 마침내 밝힌 것이다.
처음 그 결정을 듣게 된 매니지먼트와 코치들은 부상이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정밀검사를 받아보자고 재촉했었다.
호주 오픈에서 탈진할 정도로 무리했던 여파가 드디어 나타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한 번도 그랜드슬램을 경험해보지 못한 어린 선수가 5시간이 넘는 경기를 몇 차례 치르면서 부상을 당한다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지혁보다 프로 활동 기간이 더 긴 선수들도 이런 문제에 자유롭지 못했으니 말이다.
걱정을 받으며 병원을 방문해서 각종 검사를 받은 결과는, 사람들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지혁의 몸 상태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나왔던 것이다.
‘정확하게 따지면 오히려 더 좋아졌지.’
어플을 사용해서 신체 능력을 올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몸 상태가 멀쩡하다는 것이 증명되자 주변에서는 이상한 시선을 보냈다.
한참 잘 나가고 있는 상황에 갑자기 활동을 중단한 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탕하게 노느라 테니스에 관심이 줄어들었으면 납득은 못했더라도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이유는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도 빠짐없이 매일매일 훈련을 소화하는 것을 보면 그런 유혹에 빠진 것도 아니었다.
한동안 주변에서 지혁을 설득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결국 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아무래도 강제할 방법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인디언 웰스 오픈은 참가한다고 하니까 생각보다 반발이 적었어.’
만약 마스터즈까지 불참한다고 했으면 지금처럼 쉽게 넘어가지는 못했을 거다.
그렇게 매니지먼트와 코치들이 어느 정도 상황을 받아들이자 지혁은 본격적으로 훈련을 시작했다.
이제까지 하던 개인 훈련의 비중을 줄이고 트레이너와 코치들의 도움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지혁아, 이제 들어가자.”
그때 S증권 코치가 지혁에게 말을 걸었다.
‘벌써 시간이 다 됐나.’
오늘은 S증권 실업팀 선수들과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물론 공식적인 대회는 아니다.
지혁은 이미 랭킹 50위 안에 진입한 후라서 국내에서 참가할 수 있는 ATP 주관 대회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찾아보면 실업팀 선수들이 참가하는 자잘한 국내 대회가 몇 개 있긴 하겠지만, 그런 곳은 우승 상금이 오백 만 원도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도움은 전혀 되지 않고 가치를 깎아 먹는 일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참가하면 양학하러 나왔다고 욕이나 먹겠지.’
아마 대회 관련자들은 아주 좋아할 가능성이 높다.
엄청난 홍보효과를 누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지혁은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며 남 좋은 일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탕! 탕! 탕!
S증권 실업팀 훈련장 근처에 도착하자 건물로 들어가기 전부터 익숙한 임팩트 소리가 들린다.
“음······.”
그러자 벌써부터 몸에서 짜릿한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실력자들과 경기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몸이 저절로 반응한 것이다.
달칵.
그렇게 훈련장의 문이 열리자 다섯 명의 남자가 보였다.
복장은 운동복이라 다들 비슷하지만 나이 대를 보면 현역 선수들은 2명인 것 같았다.
‘다 아는 얼굴들이네.’
이대희, 권동현.
둘 다 한국에서 나름 한가닥하는 선수들이다.
‘권동현은 작년에 만났었지?’
과연 일 년 동안 얼마나 실력이 늘었을까.
아직 전성기를 맞이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일렀지만 재능을 생각하면 제법 진전이 있을 것이다.
‘재밌겠는데.’
“아! 이지혁 선수 오셨어요!”
문 앞에서 잠깐 동안 두 선수들을 지켜보고 있자 기척을 느낀 것인지 코치 한 명이 아는 채를 한다.
나이가 30대 후반은 되는 것 같은데 상당히 깍듯한 말투다.
지혁의 등장에 급하게 종료되는 훈련.
코치들과 선수들은 신기한 생물을 보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요즘 유명한 천재의 등장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오늘 경기를 할 선수들은 이 녀석들입니다. 이름은······.”
“알고 있어요. 이대희 선수, 권동현 선수죠?”
자신들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지혁의 반응에 두 선수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과거에 그렇게 부딪쳤는데 내가 어떻게 까먹겠어.’
비록 지금은 격차가 엄청나게 벌어졌지만 예전에는 이들과 국내 대회에서 자주 경기를 했었다.
물론 그 당시에도 대부분의 승리는 지혁이 차지했지만 말이다.
‘이대희라······.’
정말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다.
지혁이 알기로 이대희의 나이는 올해 한국 나이로 24살이다.
랭킹은 300위 초중반.
최근 만났던 탑랭커들과 비교하면 귀여운 랭킹이지만 이래봬도 그는 현재 국내 테니스 랭킹 3위의 선수였다.
그리고 그건 지혁이라는 이레귤러가 없었다면 국내 2번 째 순위를 가지게 되었을 거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