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S증권 실업팀
“오랜만이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대단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엄청난 사고를 쳤구나. 그랜드슬램 4강이라니······아직도 믿기지 않네.”
“일 년 만이죠? 작년 6월쯤에 짧게 경기를 했었잖아요.”
“아, 기억하고 있었구나. 시간이 꽤 지나서 까먹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날 경기가 저한테 꽤 인상적이었거든요. 형처럼 피지컬이 좋은 사람은 박용규 선수를 제외하고 한국에 없잖아요.”
“윽···그렇게 좋은 모습을 보여준 것 같지는 않은데······.”
지혁의 말에 동현은 갑자기 작년의 패배가 떠올랐는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졌던 게 또 다시 자존심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랭킹 차이를 생각하면 일방적인 결과가 나오는 게 당연한 일이었지만, 항상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동현에게 그 당시 패배는 하늘이 무너질 정도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만약 프로 경력이 많은 선수였다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혁을 자신과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아직 동현은 프로 경력이 1년도 채 되지 않은 21살의 선수였다.
지금 실력은 부족하지만 앞으로 경험이 쌓이면 얼마든지 지혁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동현은 지혁에게 처참하게 패배한 이후, 뼈를 깎는 노력 끝에 랭킹을 엄청나게 상승시킬 수 있었다.
작년까지 고작 750위였던 랭킹을 400위 중반까지 끌어올렸던 것이다.
비록 지혁이라는 생태계 교란종이 있어서 그 성과가 많이 묻히긴 했지만, 그래도 그의 빠른 성장 속도는 국내 실업팀 사이에서는 한동안 큰 화제였다.
간만에 투어 선수로 성장할 만한 유망주가 나온 게 아니냐는 평가가 업계에서 소문처럼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동현아, 너 이지혁 선수랑 알고 지내는 사이였어? 나한테는 그런 소리한 적 없잖아.”
지혁과 동현이 제법 친근하게 대화하는 것 같자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대희가 자연스럽게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는 동현에게 이런 인맥이 있을 줄 몰랐다는 듯, 의외라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 선배. 그냥 얼굴만 아는 사이에요. 작년에 딱 한 번 경기한 게 전부거든요. 그것도 2세트 뿐이었구요.”
“······네가 이지혁 선수랑 경기를 한 적이 있다고? 그런데 왜 이때까지 얘기를 안했어?”
S증권 실업팀의 선수들은 지혁이 참가했던 호주 오픈을 하나도 빠짐없이 생방송으로 챙겨봤었다.
아무래도 테니스를 업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보니 1년에 4번 밖에 없는 그랜드슬램을 습관처럼 시청한 것이다.
그 당시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난 지혁을 소재로 얼마나 많은 토론을 했는지 모른다.
어린 선수답지 않은 능숙한 기술 숙련도와 심리전, 말도 안 되는 성장 속도 등.
지혁은 프로 선수들에게도 매력적인 점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당연히 동현도 끼어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지혁을 알고 있는 듯한 낌새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지혁이 호주 오픈 준결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해 선수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됐을 때도 말이다.
“······경기를 이긴 것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자랑해요.”
“응? 뭐라고?”
대희는 패배가 부끄럽다는 듯이 말하는 동현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아직 챌린저 대회조차 우승한 적 없는 녀석이 벌써부터 넘을 수 없는 존재를 경쟁자로 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현실감각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설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요즘 동현이 한창 승승장구하며 랭킹을 많이 올리긴 했다.
작년에 퓨처스 원정에서 두 차례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S증권 실업팀 역사에서 이렇게 빠른 속도로 성장한 선수는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지혁은 지금까지 한국에서 나왔던 선수들과 완전히 급이 다른 존재였다.
테니스 불모지로 불리는 한국이 아니라 전 세계의 테니스 전문가들에게서 최고의 재능으로 평가받고 있는 선수였으니 말이다.
‘목표를 너무 높게 잡으면 나중에 힘들 텐데. 저런 괴물은 우리 같은 인간이 따라잡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동현이는 언제쯤 그걸 깨닫게 되려나.’
프로 생활을 하다보면 필연적으로 벽에 부딪치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ATP랭킹의 정체기가 찾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한계를 돌파하는 선수는 극히 드물었다.
상위 랭킹으로 올라갈수록 타고난 피지컬과 재능의 격차가 뚜렷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아시아 선수들이 100위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게 모두 그 이유다.
동현이 아무리 좋은 피지컬과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차후 ATP랭킹 100위 안으로 진입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100위라는 랭킹은 한국에서 최고로 등급이 높은 챌린저 대회에서 몇 차례나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려야 가능한 순위였으니 말이다.
‘오늘 경기에서 패배하면 현실을 조금 받아들이려나······. 그래도 너무 충격 받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대희는 혀를 차면서 동현의 안부를 빌어줬다.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나게 되면 슬럼프를 겪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비관적인 그의 생각을 알면 길고 짧은 건 대봐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적도 어느 정도 비슷한 실력이라야 일어나지 토끼와 호랑이가 싸우는데 승부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고 하는 건 솔직히 가식밖에 되지 않는다.
***
친선 경기의 첫 상대는 동현이 맡기로 했다.
아무래도 지혁과 안면이 있다 보니 먼저 게임을 할 수 있도록 코치들이 배려를 해준 것이다.
마침 경기를 하는 당사자들도 서로의 실력이 얼마나 상승했는지 궁금했기 때문에 이 결정을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번에는 그렇게 쉽지 않을 거야.”
진지한 표정으로 반대편 코트로 걸어가는 동현.
비록 보상이 없는 대결이었지만, 그는 가벼운 마음으로 경기에 임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자신만만한 걸 보니 믿는 구석이 있나 본데.’
무슨 비장의 수라도 숨기고 있는 걸까.
친선 경기가 성사되는 며칠 동안 새로운 기술을 준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차분한 분위기를 보면 분명히 뭔가 대책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여유로운 태도를 보일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뭐, 직접 경험해 보면 알겠지.’
지혁은 자세를 낮춘 상태로 서브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실력으로 압도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기발한 작전을 가지고 온다 해도 실력 차이가 극명하면 경기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플레이어 레디. 퍼스트 서브 권동현.]
“흐읍!”
탕!!
시원한 임팩트 소리와 함께 시작된 두 사람의 경기.
지혁은 오랜만에 고속 서브를 받았지만 큰 실수 없이 리턴을 성공시켰다.
이미 몸에 각인될 정도로 서브에 익숙해져서 머리가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몸이 저절로 움직인 것이다.
코트 반대편 빈 공간으로 날아가는 공.
무난하게 득점을 할 수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동현은 첫 서비스게임부터 점수를 허락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타다다닷!
코트 위에서 시끄럽게 들리는 발소리.
동현은 사이드라인 근처에 떨어진 공을 아슬아슬하게 걷어냈다.
‘오, 발이 더 빨라졌구나.’
방금 전 공은 웬만한 프로라면 리턴 에이스를 허용했을 정도로 코스가 날카로웠다.
그런데 끝까지 따라가서 수비를 성공했다는 것은 동현의 코트 커버력이 이전보다 더 늘어났다는 뜻이다.
‘그러면 스트로크는?’
지혁은 네트 앞으로 달려가서 발리로 게임을 마무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고 베이스라인에서 공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당장의 1포인트보다 상대의 전력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탕! 백핸드 코스로 날아가는 지혁의 탑스핀 스트로크.
일 년 전의 동현은 이 공격에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고 패배했었다.
프로 대회에서 경험해 본 적 없는 정상급 포핸드에 전혀 대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압!”
탕!!
‘잭 나이프라··· 이걸 공략법으로 가져왔구나.’
난이도가 높은 기술이라 지혁의 탑스핀 스트로크를 받아낼 정도로 숙련도를 쌓기 힘들었을 텐데.
고작 며칠 사이에 이렇게 수준 높은 샷을 완성하지는 못했을 테니, 아마도 비시즌기에 엄청난 노력을 쏟아 부었나 보다.
‘그런데 날 상대하려고 겨울 동안 잭 나이프를 준비한 건 아니겠지? 출전하는 대회의 등급도 다른데 말이야.’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혁은 이내 그 추측을 지워버렸다.
언제 만날지도 모르는 선수 때문에 그런 쓸데없는 노력을 할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탕! 탕! 탕! 탕!
‘······음?’
지혁은 스트로크가 길게 이어질수록 점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스트로크 대처가 너무 완벽한데?’
마치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듯한 느낌이다.
아무리 동현의 기량이 이전보다 더 상승했지만, 서브나 스트로크 수준을 보면 이런 상황은 조금 이상하다.
겉으로 보이는 실력에 비해 대처 능력이 너무 뛰어났던 것이다.
쿵!
[서티 러브.]
빈틈을 노린 다운 더 라인으로 포인트를 내준 지혁.
벌써 두 번째 실점이다.
‘진짜 작정을 하고 나왔구나. 칼을 얼마나 갈고 있었던 거야.’
게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모든 전력을 다하지 않기는 했다.
본 실력을 발휘하면 경기가 싱겁게 끝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고려한다고 해도 지금의 압박감은 정말 대단한 수준이다.
웬만한 챌린저 결승전 상대보다 지금 동현의 플레이가 훨씬 더 까다로웠으니.
‘이런 맞춤 전략을 가지고 온 걸 보면 적어도 수개월 전부터 준비를 했겠지.’
그 당시에는 몰랐는데 아마도 동현은 작년에 당했던 패배를 지금까지 담아두고 있었나보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상황을 설명할 수 없다.
이렇게 막대한 수고를 들여서 경기 준비를 할 정도면 확실한 동기가 있었을 테니 말이다.
‘예상했던 것 보다 좋은 선물을 받았는걸.’
불리한 상황에 처했지만 지혁의 얼굴에는 작은 미소가 지어져있었다.
이번 경기가 꽤 훌륭한 경험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혁은 저번 호주 오픈이 끝난 후부터 탑랭커들에게 자신의 플레이 스타일이 분석 당하는 것을 상당히 경계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데이터가 쌓이면 평소 습관과 약점이 노출 되서 대응법이 마련되는 게 일반적인 일이었으니.
‘이번 경기로 다른 선수들이 나를 어떤 방식으로 공략할지 조금은 참고할 수 있겠어.’
물론 동현이 탑랭커가 아닌 만큼 준비된 전략이 완벽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혁이 특별히 신경 쓰고 있는 랭킹 1~20위의 선수들은 코치의 숫자와 질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좋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재능 있는 프로 선수가 몇 개월 동안 허점을 고민했다는 것만으로도 대충 어느 부분이 취약한지는 알아 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