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인디언 웰스 오픈
인디언 웰스 오픈이 시작하고 7일.
지혁의 16강 경기는 캘리포니아 기준으로 오후 1시에 시작되었다.
렛츠 고 리! 렛츠 고 리!
우와아아! 골든 보이!
경기장에서 응원소리를 쏟아내는 수천 명의 관중들.
64강에서 플로랑 세라와 붙을 때와 비교하면 몇 배나 더 커진 환호성이다.
원래 이 정도까지 인기가 많지 않았지만 지난 며칠 동안 ESPN이 지혁의 경기를 제법 비중 있게 다뤄서 새로운 팬이 많이 생긴 것 같았다.
‘골든 보이라···. 나쁘지 않은 걸.’
지혁은 팬들이 새로 지어준 별명이 마음에 드는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골든 보이가 가지고 있는 뜻이 상당히 괜찮았기 때문이다.
가장 뛰어난 유망주.
젊은 선수들이 가장 가지고 싶어 하는 별명이다,
하지만 이번 세대의 골든 보이를 차지하게 된 건 결국 지혁이었다.
‘이제 플루크라는 얘기도 거의 사라졌어.’
지난 두 달 동안 호주 오픈 4강에 진출한 게 운이라는 얘기를 정말 많이 들었다.
다른 탑랭커들처럼 쌓여있는 투어 성적이 없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실력을 평가절하를 당한 것이다.
한 대회에서 반짝하고 사라지는 선수들이 워낙 많았으니 대중들의 생각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스폰서 측에서도 그런 점을 우려해 계약금을 조금 낮춰서 제안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논란도 이번 인디언 웰스 오픈으로 인해 완전히 해결됐다.
64강과 32강에서 이전보다 확연하게 성장한 실력을 보여준 덕분에 테니스 팬들의 부정적인 편견이 대부분 사라졌기 때문이다.
물론 슬럼프가 오거나 랭킹이 떨어지면 다시 플루크라는 소리가 나올 테지만 지금의 성장세를 생각하면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 아주 낮다.
***
같은 시각 한국 방송국.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인디언 웰스 오픈 16강 경기에서 찾아뵙습니다. 오늘은 한국 테니스의 전설, 이형석 해설님을 모셨습니다.]
[해설을 맡게 된 이형석입니다.]
[작년 9월에 은퇴하시고 정말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한국에서 작은 테니스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워낙 요청을 주신 분들이 많아서요.]
[오. 정말 좋은 소식이네요. 이 해설님이 유망주 양성을 맡아주신다면 분명히 뛰어난 프로 선수가 배출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원래 제가 달성하지 못한 숙원을 풀기 위해 아카데미를 설립했는데 요즘 상황을 보면 그럴 필요가 있었나 싶습니다.]
[하하하. 이지혁 선수의 활약이 대단하긴 했죠.]
최 해설은 크게 웃으며 이형석의 말에 동의했다.
지혁이 호주 오픈에서 달성한 성적을 생각하면 그의 말이 전적으로 옳았기 때문이다.
[이 해설님, 오늘 이지혁 선수의 상대는 누구인가요?]
[랭킹 12위의 페르난도 베르다스코입니다.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선수라 모르실 수 있는데 베르다스코는 작년 호주 오픈에서 4강까지 진출한 경험이 있습니다.]
[이지혁 선수와 똑같은 성적이네요. 그러면 실력이 상당히 뛰어나겠어요.]
[네. 대회 초반에 붙었던 선수들과 차원이 다를 겁니다. 만만하지 않은 선수거든요. 특히 포핸드가······.]
그렇게 두 해설이 베르다스코의 실력을 평가하고 있을 때.
체어 엠파이어의 선언으로 16강전이 시작했다.
벌써 준비 시간이 모두 끝난 것이다.
탕!! 탕!! 탕!!
1세트 첫 번째 게임은 형석이 예고했던 대로 치열하게 흘러갔다.
누구도 우세를 잡지 못한 상태로 랠리가 길게 이어진 것이다.
쿵! 베이스라인 끝에 떨어지는 베르다스코의 탑스핀 스트로크.
“크읏.”
지혁은 스핀이 잔뜩 걸린 공을 처리하기 위해 반 박자 빠르게 라켓을 휘둘렀다.
탕! 반대편 코트로 날아가는 라이징샷.
임팩트 타점이 흔들린 영향인지 손목에서 짜릿한 고통이 느껴진다.
이런 압박감을 느끼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역시 베르다스코의 스트로크가 까다롭긴 하나 보다.
쿵!
[게임 베르다스코. 1-0]
이를 악물고 코트 위를 뛰어다녔지만 결국 게임에서 패배한 지혁.
그 결과에 해설들은 안타까운 신음을 흘렸다.
[아······. 이지혁 선수가 처음부터 고전하네요.]
[헤비 스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라켓이 미세하게 밀리고 있어요. 저러면 샷이 제 위력을 발휘하기 힘들죠.]
[베르다스코의 탑스핀 스트로크는 나달과 비교될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고 했는데 오늘 경기를 보니 그 평가가 맞는 것 같습니다. 바운드 각도가 정말 살벌합니다.]
[네. 제가 현역일 때보다 실력이 더 향상된 것 같네요.]
[그러면 뭔가 해결책이 없나요? 이 상황이 지속되면 이지혁 선수가 너무 불리한데요.]
[공격적인 플레이로 랠리를 완전히 차단하거나 헤비 스핀에 익숙해질 때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습니다.]
[두 방법 모두 사용하기 힘든 전략이네요.]
[그래도 경기에서 이기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악착같이 버텨야죠.]
경기에서 지혁이 불리한 상황에 처하자 인터넷 커뮤니티는 난리가 났다.
이번 인디언 웰스 오픈을 관심 있게 보고 있던 한국 시청자들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재 테니스 중계 시청률은 10%를 훌쩍 넘었다.
ㅡ 베르다스코 완전 보급형 나달인데?? 플레이 스타일이 거의 판박이임.
ㅡ ㅇㅇ 왼손잡이에 S급 탑스핀 스트로크 가지고 있어서 외국에서도 카피 나달 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정작 베르다스코가 나달보다 3살 많음 ㅋㅋㅋ
ㅡ 그런데 왜 아직도 랭킹 12위냐? 나달이랑 비교될 정도면 5위 안에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 보니까 실력도 엄청 출중한데?
ㅡ 랭킹 10위 안에 쟤보다 괴물이 포진하고 있으니까 그렇지 ㅋㅋㅋ 통곡의 벽 모르냐? 어디 듣보잡 주제에 인간계 최강 라인에 끼어들려고 함???
ㅡ 원래 테니스는 종목 특성상 꼭대기에 올라가면 괴수밖에 없다. 빅3>>>>인간계 최강>>다른 탑랭커 이렇게 안 보이는 경계가 있어서 웬만한 재능으로는 절대 위로 못 올라감.
ㅡ 지혁좌 아직도 인간계 최강에 못 들어갔음?? 쟤 주무기가 탑스핀 스트로크인데 정신을 못 차리네 ;;
ㅡ 프로 데뷔한지 1년인데 이 정도면 엄청 잘하는 거지 너무 비현실적인 성적 기대하지마라.
ㅡ 아 ㅅㅂ 8강에서 나달이랑 붙는 거 기대했는데 망했네.
ㅡ 아직 1세트 초반이라 성급하게 결론내릴 필요 없음. 숨겨둔 기술 전부 동원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ㅡ 호주 오픈에서 사용하던 전략 안 쓰나? 그때 한손 백핸드로 재미 좀 봤잖아.
ㅡ 그걸로 답이 안 나오니까 그렇겠지. 저런 선수를 어떻게 이기냐.
인터넷 커뮤니티는 지혁이 경기에서 패배할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아직 1세트도 끝나지 않았지만 베르다스코의 경기력이 상당히 대단해보였기 때문이다.
[플레이어 레디. 서브 리.]
짧은 휴식 시간이 끝난 후, 1세트 2게임이 시작되었다.
지혁은 볼키즈들에게 전달받은 테니스공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코트를 체인지했다.
통. 통. 통. 통.
조용한 경기장을 울리는 바운드 소리.
관중들은 지혁이 서브를 하기 위해 집중하자 움직임을 멈추고 숨소리조차 조심했다.
혹시라도 경기력에 영향이 갈까봐 배려한 것이다.
예의를 중시하는 테니스라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10초 정도 지났을까.
쾅!!
드디어 커다란 임팩트 소리가 코트 위에서 들렸다.
[SERVE SPEED 136MPH.]
전광판에 찍힌 218km의 속도.
서브는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T존에 떨어졌다.
라인을 아슬아슬하게 걸친 채로 바운드 되는 공.
하지만 베르다스코는 뛰어난 반사신경으로 공을 걷어내었다.
퉁! 높이 떠서 반대편 베이스라인 끝으로 떨어지는 로브.
“흐읍!”
탕!!
지혁은 리버스 포핸드로 상대의 리턴을 맞받아쳤다.
가장 자신 있는 샷으로 스트로크 대결을 시작한 것이다.
쿵! 바운드 후, 머리 위로 튀어 오르는 공.
그 광경에 관중들은 갑자기 데자뷰를 느꼈다.
1게임에서도 이 장면을 본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기를 하고 있는 두 선수의 장기가 탑스핀 스트로크여서 생긴 해프닝이다.
[저 자세는 리버스 포핸드 아닌가요? 첫 번째 게임에서 회전이 없는 플랫 샷을 주로 사용했는데 갑자기 경기 스타일을 바꿨습니다. 혹시 저희가 모르는 심경의 변화라도 있는 걸까요?]
[음······. 기세 싸움을 하는 것 같네요. 아무래도 경기를 정면으로 돌파할 모양입니다.]
[기세 싸움이요? 이 해설님 자세하게 말씀해 주시죠.]
[똑같은 방법으로 베르다스코에게 복수하려고 하는 겁니다. 1게임을 탑스핀 스트로크로 내줬잖아요.]
[아, 그렇군요. 그런데 굳이 이런 전략을 써야 하나요? 이지혁 선수는 공격 옵션이 다양하잖아요. 제가 생각하기에 변칙적인 플레이가 더 효과적일 것 같은데요.]
[단기적으로 생각하면 그럴 겁니다. 하지만 경기 전체를 그런 방식으로 풀어나갈 수는 없어요. 결국 승리를 만들어내는 건 정공법입니다.]
형석의 말대로 지혁은 절체절명의 위기가 아니라면 변칙적인 플레이를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한손 백핸드, 트릭 샷, 트위스트 서브를 사용하면 어렵지 않게 우세를 잡을 수 있겠지만 그런 방법에 의지하면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달을 상대하기 전 연습이라고 생각하자.’
만약 상대가 빅3였다면 이런 여유를 부리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혁이 느끼기에 베르다스코는 지금의 실력으로 충분히 감당할만한 선수였다.
실제로 경기는 모든 공격 옵션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팽팽하게 진행되었다.
통. 통. 통. 데구르르.
몇 번의 바운드 후, 바닥을 구르는 테니스 공.
지혁은 네트 바로 앞에 떨어지는 드롭샷으로 서비스게임을 지켜냈다.
[게임 리. 1-1.]
“아자!!!”
체어 엠파이어의 콜이 떨어지자 저절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관중들은 평소에 침착하던 선수가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자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베르다스코의 허점을 노린 절묘한 드롭샷! 1-1. 경기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한 끗 차이였습니다. 1게임에서도 느꼈지만 역시 두 선수의 기량은 거의 비슷하네요. 누가 16강에서 승리하게 될지 전혀 예측하지 못하겠습니다.]
[저도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처음으로 참가한 마스터즈에서 랭킹 12위와 막상막하로 겨루다니 역시 대단한 재능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이지혁 선수의 나이가 만으로 16살이었죠. 워낙 실력이 뛰어나서 잊고 있었습니다.]
[그런 경우가 많긴 합니다. 누가 저 선수를 고등학생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지금도 이런 실력을 가지고 있는데 몇 년이 더 지나면 어떻게 될지 두려울 정도네요.]
두 사람은 지혁의 재능을 칭찬하며 세 번째 게임이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게임이 끝났을 때 그 합이 홀수가 아니라면 휴식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볼키즈들이 코트 밖으로 날아간 공을 주어오길 잠시.
베르다스코는 곧바로 자신의 서비스게임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