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마이애미 오픈
‘쯧. 역시 장기전을 노리는구나.’
지혁은 부쩍 늘어난 스트로크 횟수에 속으로 혀를 찼다.
순조롭던 경기가 나달의 끈질긴 플레이로 인해 조금씩 삐걱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승률이 조금씩 떨어지겠지.’
최대한 체력 관리를 했지만 슬슬 몸에서 피로가 느껴지고 있었다.
지금처럼 낙관적으로 생각하다가 언제 상황이 뒤집힐지 모른다.
상대가 현시대 최강의 선수, 나달이었으니 말이다.
‘먼저 브레이크를 따내면 활로가 열릴 텐데······.’
문제가 있다면 나달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솔직히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찰나를 마구잡이로 사용하면 상대가 아무리 빅3라고 해도 한 게임 정도는 얼마든지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남은 경기와 그 후에 몰려올 부작용을 생각하면 그런 선택은 너무 어리석은 짓이다.
[플레이어 레디. 서브 나달.]
체어 엠파이어의 신호가 선수들에게 전해지자 다시 진행되는 경기.
나달은 무려 7종류나 되는 루틴을 시간을 들여 전부 실행한 다음 마침내 공을 토스했다.
쾅!!
200km 초반의 서브를 포핸드 리턴으로 받아내는 지혁.
이미 경기가 중반으로 넘어간 만큼 빠른 타구가 꽤 익숙해져서 이 정도는 크게 위협적이지 않았다.
[서티 러브.]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포인트를 가져가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수비가 너무 단단해. 저걸 어떻게 뚫어야 할까.’
빈틈이 생겨야 찔러볼 구석이라도 생길 텐데 나달의 경계심이 극도로 높아져서 시도해볼 방법이 없다.
‘이번 게임은 포인트가 크게 벌어졌으니 일단 넘겨주고 다음을 노려보자.’
[게임 나달 2-1.]
결국 러브 게임으로 스코어를 넘겨준 지혁.
일방적인 패배였지만 전략상의 후퇴였기에 타격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 증거로 선수들의 표정은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했다.
이번 승부가 승패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비스게임을 마무리하는 나달의 포핸드 위너. 코너를 공략하는 크로스샷이 훌륭했습니다. 크게 힘을 들이지 않고 가볍게 승리했어요.]
[음······. 골든 보이가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하네요. 탐색전이 길어지면 좋지 않은데 조금 걱정이 됩니다.]
마이클 창은 우려하는 표정으로 지혁의 플레이를 지적했다.
이러다가 브레이크라도 먼저 당한다면 사단이 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1세트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지금 나달의 경기력을 보면 상황이 언제 뒤집혀도 이상하지 않다.
[확실히 2세트에 들어서고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죠. 방금 전에도 브레이크를 아슬아슬하게 막아냈으니까요. 만약 시기적절하게 슈퍼 플레이가 나오지 않았다면 3-0이 되었을 수도 있어요.]
[제 경험상 이쯤에서 위기가 닥칠 확률이 높습니다.]
[골든 보이의 위기라. 마이클은 나달이 다음 게임에서 브레이크를 따낼 거라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기세가 넘어가고 있는 지금이라면 충분히 가능해요.]
[정말 당신이 말대로 경기가 진행된다면 다음 게임이 승부의 전환점이 되겠군요. 그러면 저도 집중해서 봐야겠습니다.]
마이클 창의 예측은 과학적인 근거보다 느낌에 의존한 것이었다.
만약 다른 해설자가 이런 말을 하면 그저 우스갯소리로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최연소로 그랜드 우승을 달성한 레전드 선수의 발언은 그렇게 가볍지 않았다.
정점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의 능력은 때때로 상상을 뛰어넘는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했으니 말이다.
쿵!!
[게임 나달.]
“챌린지!”
지혁은 찰나까지 사용한 회심의 공격이 체어 엠파이어에게 아웃 판정을 받자 곧바로 반발하며 챌린지를 말했다.
30-40의 상황에서 한 포인트는 세트 전체의 분위기를 완전히 뒤바꿀만한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트로크가 라인 위를 절묘하게 스치고 지나갔기에 라인심과 체어는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지혁의 챌린지 요청을 받아들였다.
아웃 판정을 내리긴 했지만 그들도 100% 확신이 없는 모양이다.
짝. 짝. 짝. 짝.짝.짝.
그렇게 관중석에서 쏟아지는 박수 소리를 듣고 있을 때.
마침내 이글 아이의 결과가 나왔다.
와!!
일부 관중들은 라인에 겹쳐진 공을 보고 환호를 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광판의 화면이 회전하기 시작하자 그 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아웃! 게임 나달 3-1.]
360도의 각도로 동영상을 분석하자 1mm 차이로 바운드가 라인을 벗어났다는 게 밝혀졌기 때문이다.
새로 얻은 기술, 찰나가 만능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VAMOS!!!”
처음으로 얻는 브레이크에 크게 포효하며 세레머니를 하는 나달.
그 모습에 나달의 팬들은 VAMOS RAFA를 크게 외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상황이 좋지 않아······.’
지혁은 한층 어려워진 승리 조건에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제 2세트에서 승리하려면 브레이크를 2번이나 성공해야 한다.
그것도 서비스게임을 완벽하게 지켜낸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결국 브레이크가 성공하네요. 마지막 샷은 충분히 들어갈 법했는데 아쉽겠어요. 게임 스코어 3-1. 나달이 경기를 크게 앞서 나갑니다.]
[2세트를 결정지을 중요한 포인트였습니다. 이제 장시간 대결이 확실해졌으니 골든 보이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합니다.]
[구경할 게 더 많아지겠군요. 잘하면 3시간이 넘는 경기를 볼 수도 있겠는데요?]
브래드는 지혁이 들으면 진저리 칠만한 멘트를 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와 ESPN은 이번 매치가 길어질수록 유리했기 때문이다.
인기가 없는 선수들의 경기였다면 퇴근 시간이 늦어져서 짜증이 났겠지만 이런 명경기는 앞으로도 회자될 가능성이 높은 만큼 인지도를 올리기에 딱 좋다.
[아, 체어의 콜이 내려졌습니다. 이번에는 나달의 서비스게임입니다.]
[골든 보이가 이전 게임에서 당한 브레이크를 복수할 수 있을지 기대되는군요.]
[저력이 있는 선수라서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쾅!!
테니스공이 임팩트되는 소리가 중계 화면에서 들리자 해설자들의 대화가 빠르게 멈추었다.
ESPN의 시청자들은 그런 배려 덕분에 방해받지 않고 경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
[게임 나달 3-1.]
“좋아!! 그렇게만 해!”
주영은 나달의 브레이크가 극적으로 성공하게 되자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과 거친 호흡을 보면 그가 얼마나 흥분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대로 서비스게임만 지키면 4-1이야! 그러면 쐐기를 박을 수 있어!”
나달 정도의 선수가 유리한 상황에서 역전당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그러니 이제 200만 원을 잃어버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당연히 이래야지. 고등학생이 빅3를 이기는 게 말이 돼? 이지혁이 1세트를 기적적으로 이겼지만 나달에게 기세가 넘어온 이상 끝이야.”
돈을 되찾은 기쁨과 천재가 실시간으로 무너져가는 모습에 답답했던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다.
지혁이 특별히 잘못한 건 없지만 열등감과 질투심의 대상이 추락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잘난 채 하던 녀석들의 반응을 한 번 확인해볼까.”
주영은 몇 분 전만 해도 나달에게 배팅한 것을 비웃었던 커뮤니티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만약 아직까지 희망을 가지고 있다면 그게 의미 없다는 걸 상기시켜 줘야지.
ㅡ 아 1mm 차이 너무 아깝다 ;; 저거 들어갔으면 몰랐는데
ㅡ 이러다가 지는 거 아님? 분위기 이상한 거 같은데···.
ㅡ ㄴㄴ 이번에 브레이크하면 전혀 문제 없다. 이 정도면 충분히 괜찮음.
ㅡ 괜찮긴 지금 리플레이 나오는 거 보면서도 행복회로 돌리고 있냐? 내가 바로 역전한다고 했지 ㅋㅋ 애초에 두 사람은 급이 안 맞았어. 어딜 이지혁 따위를 나달하고 비교하냐??
ㅡ 아 진짜 지는 줄 알았잖아 ㅋㅋㅋㅋ 역시 장난 친 거였음. 정의가 있다면 6.32 배당에 거는 역배충들 손을 들어줄 리가 없지. 일확천금 바라지 말고 앞으로 부지런히 일해라 ^^
ㅡ 아직 경기 안 끝났는데? 지혁이가 세트 스코어 유리해서 결과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ㅡ 테알못 ㅋㅋㅋ 그러니까 이지혁한테 돈 걸지 어쨌든 잘 먹고 간다. 덕분에 이번 달 든든하겠어~
“큭. 이래서 아마추어들은 안 된다니까.”
지혁이 승리할 거라는 댓글을 비웃으며 조롱하는 답글을 다는 주영.
비록 커뮤니티에 지혁의 팬이 많이 상주하고 있어서 반발이 심했지만 나달이 워낙 활약하고 있어서 제대로 된 반격이 나오지 않는다.
그들도 내심 패배를 직감하고 있어서였다.
솔직히 점점 기울어져가는 경기를 처음부터 지켜봤다면 누구나 하고 있는 생각이었다.
[피프틴 러브.]
“앞으로 세 포인트.”
TV에서 나달의 득점을 알리는 콜이 들리는 걸 보니 예상했던 대로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 모양이다.
주영은 감미로운 음악처럼 들리는 체어 엠파이어의 목소리에 미소를 지었다.
[피프틴 올.]
“아, 저게 들어가다니 운도 좋네.”
[피프틴 서티.]
“역동작에 스텝이 꼬였어. 그래도 아직 괜찮아.”
[피프틴 포티.]
“······어떻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일그러져가는 주영의 얼굴.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샷이 연속적으로 들어가자 경기의 판도가 순식간에 변했다.
쿵!!
[게임 리 3-2.]
“······.”
주영은 넋을 잃은 채로 TV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예술적인 경지에 오른 지혁의 플레이가 마치 올해 호주 오픈에서 우승한 로저 페더러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충격을 받은 건 나달도 마찬가지인지 표정이 볼만하다.
아주 가끔 씩 보여주던 특별한 샷을 설마 연속적으로 받게 줄은 몰랐나 보다.
“······정체가 뭐야?”
빠르게 브레이크를 따내고 벤치에 앉아서 휴식하는 지혁의 모습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진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여유로운 얼굴이라니.
대체 한계가 어디까지란 말인가?
“젠장, 이러면 다시 원점이잖아.”
오히려 상황이 더욱 악화된 측면도 있다.
만약 방금 전 상황이 다시 반복되면 경기가 여기서 끝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휴대폰에서 답글이 달리는 알림이 연속적으로 울렸지만 확인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마 기세등등한 댓글을 썼던 다른 사람들도 주영처럼 초조한 마음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것이다.
찾은 줄 알았던 돈이 다시 날아갈 판에 태평하게 휴대폰이나 보고 있을 시간이 없다.
“후······. 제발 타이브레이크까지만 가자.”
지혁이 빅3와 동급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는 이상 질척하게 늘어지며 체력을 고갈시키는 방법밖에 없다.
괜히 컨디션이 미칠 듯이 좋은 녀석에게 서두르다가 역공을 당하는 것보다 그게 훨씬 낫다.
“나달이 지금까지 사용하던 전략이라 큰 변화는 없을 거야. 참고 버티다 보면 결국 활로가 열리겠지.”
물론 재수 없으면 이대로 경기가 끝나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방법을 사용하는 게 가장 승률이 높으니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