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역대급 테니스 천재가 되었다-99화 (99/241)

99화. 롤랑 가로스

엉망이 된 몸 상태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생각 때문일까.

지혁은 5세트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쿵!!

빠른 속도로 사이드라인에 떨어지는 페더러의 포핸드 다운 더 라인.

랠리를 이어가기 위해 열심히 스트로크를 따라갔지만 라켓은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너무 지친 탓에 풋워크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느려진 것이다.

[게임 페더러 4-1.]

그렇게 스코어가 완전히 기울어버리자 이제 자력으로 롤랑의 결승전에 진출할 가능성은 거의 사라졌다.

경기장에서 흐르는 분위기를 생각하면 도저히 역전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팬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하나, 둘 기대를 접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열정적으로 응원하던 목소리가 상당히 줄어들었으니 말이다.

‘이제 놔줘야 하는 건가.’

지혁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했음에도 결과가 처참하게 나오자 애써 외면하고 있던 패배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서브를 하기 위해 비스듬히 선 자세로 공을 바닥에 튕기고 있을 때.

왼쪽 손등으로 물이 몇 방울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번에는 차가운 감촉인데다 색도 투명한 걸 보면 피는 아닌 모양이다.

투두두두둑.

점점 커져가는 익숙한 소음에 손바닥을 내밀며 하늘로 고개를 드는 지혁.

그러자 얼굴 위로 물방울이 부딪치는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비가 내릴 거라는 일기 예보도 없었기에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설마 비가 올 줄이야······.’

은근슬쩍 서비스게임을 멈췄지만 날씨가 변하는 돌발 상황이 생겨서 그런지 체어 쪽에서는 별다른 지적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점점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하자 경기는 자연스레 지연되는 수순을 밟았다.

물에 취약한 클레이 코트가 어느새 비를 맞고 어두운색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매년 비슷한 상황이 많이 일어났던 롤랑의 경기장은 배수가 잘되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었기에 비가 그치기만 하면 길어도 30분~40분 이내에 원래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다다다다!

잠시 후, 열 명쯤 되는 진행 요원들이 롤랑의 마크가 박힌 주황색 방수포를 질질 끌고와서 클레이 코트 전체를 덮어버렸다.

어마어마한 크기 때문인지 얼핏 봐도 무게가 무지막지하게 무거워 보였다.

아마 바닥이 진창이 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 저걸로 비가 그칠 때까지 덮어두려고 하는 모양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을 훨씬 많이 벌 수 있겠는데······.’

지혁은 생각지도 않은 행운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적어도 지금 상황에서 곧바로 경기를 시작하진 않을 거다.

부슬비도 아니고 장대비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정상적으로 플레이를 할 수 있을 리 없으니 말이다.

벤치에 앉아서 멍하니 날씨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을 때, 마침 볼 키즈가 옆으로 달려와 우산을 씌워주었다.

아마도 집행 요원에게 지시를 받은 모양이다.

선수들이 체온이 떨어져서 경기력이 하락하는 일은 방지하려고 한 것이다.

[갑자기 비가 많이 내리네요. 비록 코트가 엉망이 되겠지만 골든 보이에게는 커다란 기회입니다. 체력이 고갈된 이후로 크게 고생하고 있었는데 극적으로 위기를 벗어났어요.]

[허. 하늘이 도와주는 걸까요. 이건 충분히 변수가 될만한 일입니다. 대기 시간이 길어지면 리가 본래의 경기력을 충분히 되찾을 수 있을 거예요.]

[맞습니다. 힘이 빠지기 전만 해도 페더러와 대등한 기량을 보여줬었죠. 역전이 일어날 확률은 얼마든지 있어요. 페더러도 그걸 아는지 날씨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습니다.]

[경기의 방향이 하늘에 달려있다라. 하여튼 저 두 선수는 경기조차 평범하게 넘어가는 법이 없네요.]

경기장 내부는 시간이 지날수록 비가 더 많이 쏟아졌다.

롤랑 가로스의 메인 코트는 다른 그랜드슬램과 다르게 스타디움에 지붕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서 딱히 비를 피할 방법도 없었다.

정말 웃긴 게 롤랑은 가장 권위있는 테니스 대회이면서도 마치 챌린저 대회인 것처럼 환경이 열악했다.

15,000석이나 들어가는 경기장에 지붕이 없다는 게 솔직히 말이 되는가.

그렇다고 티켓 값이 저렴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러다가 진짜 내일로 미뤄질 수도 있겠는데.’

체어 엠파이어도 조금만 기다리다가 날씨가 변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경기를 취소하겠다고 선수들에게 의사를 밝혔다.

그 말이 전해지자 지혁과 페더러의 표정은 완전히 희비가 갈렸다.

만약 비가 내리는 돌발 상황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승패가 결정되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지혁은 연이은 행운에 흡족한 미소를 감추지 못한 모습으로 편안하게 휴식을 취했다.

혹시나 당겨져 있던 근육이 풀려버리면 큰일 나겠지만 몸의 긴장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

우천으로 경기를 중단한 지 대략 한 시간쯤 시간이 흘렀을 때.

마침내 경기장의 하늘에서 비구름이 지나간 건지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코트 주변이 밝아지는 것이 아무래도 날이 맑아지려는 것 같았다.

두 시간이 넘게 기다리는 경우도 있는데 이 정도면 문제가 일찍 해결된 편이었다.

[체어 엠파이어가 경기를 다시 재개하네요.]

[코트의 정비가 끝나면 곧바로 5세트가 시작할 겁니다. 내일로 미뤄질 법도 했는데 남은 세트가 얼마남지 않아서 이런 결정을 내렸나 보네요.]

[5세트가 4-1까지 진행됐었죠? 이 정도 점수 차이면 길어도 20분 안에 끝날 것 같네요. 선수들과 시청자분들이 기다린 시간을 생각하면 너무 짧습니다.]

[아뇨. 섣불리 결론을 내리는 건 아직 이릅니다. 아마 한 시간 전이라면 페더러의 승리는 의심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확실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조건이 많이 달라졌어요.]

[네? 피트는 설마 골든 보이가 이길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는 건가요? 물론 세트 스코어가 2-2이긴 합니다. 그래도 팬심을 제외하고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너무 힘들지 않을까요?]

샘프라스의 말에 의아한 듯한 표정을 짓는 해설자.

실제로 방송을 보고 있던 시청자들도 그의 멘트를 이해가 가지 않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지혁이 일방적으로 밀리던 모습을 생각하면 역전하는 그림이 전혀 연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잊으신 것 같은데 리가 2세트와 4세트에서 보여줬던 경기력을 떠올려 보세요.]

[피트의 말대로 확실히 대단한 기량을 발휘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결과가 그렇게 좋지 않았잖아요. 2세트는 패배하고 4세트는 필요 이상으로 체력만 잔뜩 혹사했으니 말이에요.]

[어쨌든 페더러에게 밀리지 않고 동등한 실력을 보여줬다는 게 중요합니다. 게다가 경기가 지연되면서 1시간이 넘는 휴식을 가진 덕분에 마지막 세트에서 똑같은 퍼포먼스를 발휘할 수 있을 거예요. 당연히 몸에 데미지가 쌓이겠지만 보상에 비해 리스크가 그리 큰 것도 아닙니다.]

[확실히 결승까지 진출할 수 있다면 가벼운 부작용 정도는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겠네요. 피트의 예측이 정말로 이루어지는 건 미지수지만요.]

[분명 기적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당장 믿지 못하시는 분들도 5세트가 시작하면 알게 될 거예요.]

[그렇게까지 확신을 가지고 말하신다면 믿어도 되겠죠. 음······. 그런데 피트는 경기 초반만 하더라도 페더러의 승리를 장담하지 않았나요? 입장이 많이 변하신 것 같은데요.]

[하하······. 하긴 그런 말을 하긴 했었죠.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생각은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경기를 계속 해설하다 보니 골든 보이를 응원하는 마음이 생겨서요. 저렇게 필사적으로 뛰는데 어떻게 마음이 가지 않겠어요.]

[역시 사심이 가득 담긴 해설이었던 거군요.]

해설자들이 남은 경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잡담을 이어나가고 있을 때, 주최 측은 진행 요원들을 경기장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코트 근처로 도착한 그들은 바닥을 덮고 있던 방수포를 벗겨내고 고무 재질의 밀대로 고여있는 웅덩이의 물을 전부 제거했다.

분주하게 움직이길 잠시, 마침내 모든 장애물이 사라지고 가려져 있던 클레이 코트의 상태가 확인되었다.

다행히 대처를 잘한 덕분인지 약간 축축하긴 해도 경기를 하는데 큰 지장이 없어 보였다.

‘비가 내리자마자 곧바로 방수포를 덮은 덕분에 사용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구나.’

게다가 몸도 비록 만전의 상태는 아니지만 많이 회복되었다.

집중하는 걸 방해하던 통증도 대부분 사라지고 부족하던 호흡도 멀쩡하게 변했으니 말이다.

서비스게임을 시작하려던 순간에 경기가 중단되었으니 5세트는 이대로 이어서 하면 될 것이다.

‘스코어는 0-0이었지? 새로 출발하기 딱 좋은 점수네.’

“흐읍!”

쾅!!

[SERVE SPEED 219km/h]

역시 단순히 느낌만 좋은 게 아니라 상태가 나아진 것이 수치로 나왔다.

경기 초반과 거의 근접한 수준의 속도가 전광판에 찍히자 페더러의 라켓은 뒤로 밀렸다.

200km 전후로 떨어졌던 서브를 받다가 이런 고속 타구가 떨어지니 역체감을 크게 느끼는 모양이다.

무려 한 시간 동안 경기를 쉬었던 것도 경기 감각을 떨어트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턱!

[네트! 피프틴 러브.]

네트 상단에 걸려서 바닥으로 천천히 떨어지는 공.

오랜만에 보는 페더러의 리턴 실패에 관중들은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듯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단순한 우연인지 아니면 정말로 역전의 신호탄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반응을 보면 아마 포인트가 조금 더 쌓여야 제대로 된 반응이 나올 것 같았다.

[게임 리. 4-2.]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고 지혁에게 게임을 넘겨주는 페더러.

다 이긴거나 다름 없는 경기에서 불길한 기류가 흐르자 그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서비스게임을 준비하는 동작이 자연스레 거칠어진 것이다.

화난 감정에 평정심과 라켓 컨트롤이 흔들리면 좋겠지만 그런 일이 생길 확률은 극히 낮았다.

상대가 바브린카나 머레이라면 어느 정도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페더러의 멘탈은 단단하기로 유명해서 플레이에 악영향을 줄 행동을 할 리 없었다.

[오! 골든 보이가 서비스게임을 지켜냈네요. 정말 기량이 돌아온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승리까지 4세트가 남았네요. 갈 길이 한참 멀었습니다.]

[아마도 이번 페더러의 서브가 분기점이 되겠죠?]

[그렇습니다. 5-2와 4-3. 두 상황은 무게감이 전혀 다르니까요. 브레이크를 성공한다면 동점까지 가는 것도 훨씬 쉬워질 겁니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페더러의 서브.

두 선수의 각오가 다른 게임과 차원이 달라서 그런지 경기는 마치 2세트에 있었던 타이브레이크와 비슷한 양상이 펼쳐졌다.

그 모습에 관중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동화되어서 덩달아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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