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역대급 테니스 천재가 되었다-107화 (107/241)

107화. 롤랑 가로스

4세트의 막바지 무렵, 결국 지혁은 세트 포인트를 따낼 수 있었다.

찰나까지 동원한 백핸드 라이징샷이 나달의 허점을 정확하게 찌른 덕분이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궤적의 타구가 움직임을 멈추자 뒤늦게 경기장에서 나직한 감탄사가 퍼졌다.

만 명이 넘는 관중들이 지혁의 수준 높은 플레이에 매료된 것이다.

심지어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던 나달의 팬조차 말이다.

[세트 리.]

‘결국 결승전도 마지막까지 가는구나.’

8강, 4강, 결승, 세 경기 모두 풀세트를 하다니.

도저히 두 번은 하지 못할 고된 스케줄이다.

‘벌써 어플을 네 번이나 썼는데 과연 경기가 끝날 때까지 포인트 고갈을 버틸 수 있을까.”

고작 한 시간도 되지 않는 시간 만에 40만 포인트가 허공으로 날아가버렸다.

이건 마스터즈에서 최소 8강 안에 들어야 얻을 수 있는 양이다.

지혁은 1~2개월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되는 상황에 기분이 좋지 않은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대가가 너무 커서 그랜드슬램 결승 정도 되는 중요한 경기가 아니면 앞으로 사용할 일은 없겠어. 대부분의 대회는 손해가 더 막심할 테니 말이야.’

그렇게 휴식 시간이 지나가는 동안 바라지 않았던 순간이 돌아왔다.

체력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던 어플의 효과가 사라진 것이다.

지혁은 작게 한숨을 쉬며 다시 10만 포인트를 태워버렸다.

시간 이 조금 흐른 후, 마침내 시작하게 된 결승전의 마지막 세트.

경기는 누가 유리하다고 말하기 어려울 만큼 비슷한 스코어가 유지되었다.

그랜드슬램 우승이라는 고지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지혁이 조금도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자 경기장의 분위기는 점점 뜨거워졌다.

[허······. 잘하면 테니스 역사에 기록될 대사건을 실시간으로 보게 될 수도 있겠습니다. 빈 말이 아니라 정말 아시아 최초와 최연소 우승이라는 업적들이 코앞까지 다가왔어요.]

[아무리 길어도 1시간 정도 기다리면 결과가 나올 겁니다. 솔직히 두 선수가 정면으로 붙게 되다면 어느 쪽이 승리하게 될지 뻔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지혁 선수가 의외로 잘해주고 있네요.]

[맞습니다. 예상을 뛰어넘는 활약이었죠. 아마 저희만 놀란 건 아닐 거예요.]

쿵!!

베이스라인 끝에 탑스핀 스트로크를 강제로 우겨넣는 나달.

지혁은 타구가 높이 튀어오르기 전에 라켓 손잡이를 꽉 잡으며 라이징샷으로 받아쳤다.

상당한 힘을 배분했지만 전완근 부위가 짜릿하게 아려온다.

나달의 스트로크가 워낙 까다로웠던 탓에 임팩트 타이밍이 미세하게 어긋나 온전히 힘이 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평소 스윙과 자세가 크게 달라서 사용하는 근육의 부위마저 달랐다.

탕!! 탕!! 탕!!

이전 세트에서 그랬던 것처럼 백핸드만을 집요하게 노려오는 스트로크.

자세가 무너지거나 스텝이 꼬이지 않게 신경 쓰느라 피가 마르는 기분이다.

아주 작은 틈만 생기면 댐에 구멍이 뚫리듯 무너질 것 같았다.

‘역시 마지막이 다가오니까 가장 자신 있는 기술을 사용하는구나.’

마음 같아서는 똑같은 리버스 포핸드로 맞불을 놓고 싶다.

지금 느끼는 고통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었으니 말이다.

‘······탑스핀 스트로크의 숙련도가 조금만 더 높았다면 고민하지 않고 당장 그랬을 텐데.’

지혁은 끌어 오르는 충동을 간신히 가라앉혔다.

평정심을 잃고 내키는 대로 행동했을 때 감수해야 할 손해가 억제기 역할을 해준 것이다.

[게임 나달 4-3.]

결국 최선을 다했음에도 한 끝 차이로 게임은 나달이 가져가게 되었다.

“VAMOS!!!”

[7게임을 마무리하는 나달의 포핸드 위너. 이번에도 브레이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경기 중반이 넘어가는 시점인데 상당히 안 좋은 소식이네요.]

[음······. 5세트가 초장기전이 될 거라 걱정하시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절대 싱겁게 끝날 것 같지 않거든요. 만약 6-6이 된다면 선수들에게 지옥이 펼쳐질 겁니다.]

해설자는 걱정된다는 듯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정확한 이유를 제시하긴 힘들지만 뭔가 불길할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때 한국을 대표했던 테니스 선수의 판단은 지금까지 중계를 맡으면서 적중률이 제법 높았다.

그렇기에 시청자들도 그의 말을 그냥 넘기지 못하고 노심초사하며 경기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게임 리 5-5 듀스!]

격렬한 공세를 막아내며 서비스게임을 무사히 지켜낸 지혁.

그 결과에 나달의 포커페이스에 금이 가며 얼굴이 찌푸려졌다.

아무래도 자신의 실책으로 인해 경기를 제때 끝내지 못한 걸 자책하는 것 같았다.

6-4로 끝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고작 한 포인트 차이로 놓쳤으니 말이다.

퍽! 퍽!

나달은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한 건지 라켓을 때리며 화풀이를 한동안 했다.

그나마 박살내지 않은 걸 보면 한 가닥의 이성은 붙잡고 있는 모양이다.

만약 조코비치였으면 하나가 아니라 몇 개를 분질러 먹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브 나달.]

짧은 해프닝이 전부 지나가자 서브권은 다음 차례로 넘어갔다.

“흐읍!”

탕!!

이전에 비해 확연하게 느려진 속도로 날아오는 나달의 서브.

원래 경계할 수준은 아니긴 했지만 거기서 10km가량 하락하니 리턴이 너무 수월하다.

‘위력이 초반 같지 않은데? 역시 나달도 인간이긴 하네.’

물론 가장 중요한 스트로크와 코트 커버력은 아직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래도 지친다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크게 위안이 되었다.

강철같이 단단한 벽도 계속 부딪치다 보면 무너트리는 게 가능하다는 확신을 받았으니 말이다.

‘하긴 5세트 후반까지 와서 기량 저하가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지.’

[피프틴 서티.]

심리적인 안정감을 얻어서 일까 지혁은 정말 오랜만에 포인트를 먼저 앞서 갈 수 있었다.

아무래도 위닝 마인드가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한 모양이다.

[게임 나달 6-5.]

하지만 기뻐하기도 잠시, 예상치 못한 위기에 정신을 바짝 차린 나달은 오버페이스를 하며 지혁을 찍어 눌렀다.

꼼짝도 하지 못하고 게임을 빼앗기는 그 광경에 해설자들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6-5라······. 나달이 서비스게임을 먼저 시작한 이득을 톡톡히 보는군요. 만약 이지혁 선수가 다음 세트를 지켜내지 못하면 경기가 그대로 종료되어 버립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한 세트 차이는 정말 큰데 실력이 뛰어난 선수에게 운까지 따라주네요.]

[지금 핸디캡을 극복하려면 커다란 고비를 세 번이나 넘어야 합니다. 6-8이 되어야 최소한의 승리 조건이 충족되니까요.]

[아까 전에 말씀하신 대로 경기가 엄청 길어지겠네요. 선수들에게 지옥일 거라는 비유가 이제야 이해가 됩니다.]

팬들과 해설자들이 걱정했던 것과 달리 지혁은 위기 상황을 무난하게 벗어났다.

나달의 어드벤티지를 고속 서브와 화려한 퍼포먼스로 극복해낸 것이다.

역전을 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다 보니 그 과정에서 지혁이 사용할 수 있는 대부분의 기술들이 코트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한 명의 선수가 이렇게 다재다능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많은 공격 옵션이 순차적으로 쏟아지자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진행 요원의 얼굴에도 경련이 일어났다.

지혁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난지 실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6-6! 다시 동점까지 따라왔습니다! 이지혁 선수가 부족한 경기력을 재능만으로 채워 넣었어요!]

[하하하. 관중석에 앉아있는 다른 탑랭커들의 반응이 볼만하군요. 어이가 없나 봅니다.]

[테니스가 직업이 아닌 사람들은 저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모르겠지만 프로에서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선수들은 저 모습이 말이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거든요. 경악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요. 저도 같은 입장이었다면 제 눈을 의심했을 겁니다.]

[저런 선수를 경쟁자로 두어야 하는 그들에게 연민이 드네요. 그나저나 나달의 경기력이 전에 비해 하락한 게 보여요. 경기 초반과 비교하면 차이가 제법 큽니다.]

[서브 속도가 떨어지고 에러 확률은 부쩍 상승하긴 했습니다. 그래도 다른 탑랭커라면 꿈도 꾸지 못 할 유지력입니다. 아마 평범한 선수를 저 자리에 갖다 놓았다면 진작에 퍼져버렸을 거예요.]

7-7, 8-8, 9-9.

5세트의 스코어가 계속 상승하자 처음에는 경기를 더 오랫동안 볼 수 있어서 좋아하던 관중들도 조금씩 선수들의 상태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장시간 경기를 하는데 멀쩡할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시간으로 피폐해지고 있는 지혁과 나달의 모습은 이미 정상적인 컨디션을 벗어난 지 오래였다.

그렇게 승자가 나오지 않은 채 무려 8게임이나 연장되었을 때.

지혁과 나달은 드디어 한계점이 도달했는지 풋워크 속도가 급감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플레이 타임이 막 6시간을 돌파했을 무렵이었다.

‘······포인트가 받쳐줘도 무한하게 체력을 늘릴 수 있는 게 아니었네.’

지혁은 어플에 10만 포인트를 태워버렸음에도 절반 이하로 줄어든 효과에 이를 악물었다.

분명 처음 사용할 때만 하더라도 멀쩡한 컨디션으로 돌아갔었는데 이제 약간의 도움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 낫지만······. 설마 포인트가 고갈되는 것 말고 다른 문제가 생길 줄은 몰랐네. 계획하고 있던 전략이 많이 어그러졌어. 장기전에 들어가면 승기를 가져올 줄 알았는데 말이야.’

탕!!

[서티 러브.]

체력을 회복할 수단이 언제 사라질지 몰라서 지혁의 플레이는 무의식적으로 급해졌다.

최대한 빨리 끝내려는 조급한 마음 탓에 경기 템포가 계속 빨라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알만한 사람들은 전부 눈치챘다.

[음? 이지혁 선수가 왜 이러죠? 갑자기 뭔가에 쫓기는 듯한 느낌입니다. 필요 이상으로 무리를 하고 있어요. 급한 마음은 알겠지만 지금은 지름길을 선택하면 안 됩니다. 원래 했던 대로 왕도를 밟아야 해요.]

[동감입니다. 아직 경기는 한참이나 남아있어요. 긴 여정을 견디려면 체력 배분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한동안 여러 가지 충고를 쏟아내는 해설들.

지혁은 마치 그 충고를 들은 것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본래의 방식대로 돌아왔다.

자신의 플레이가 지금 상황에 맞지 않다는 것을 몇 번의 실점을 통해 금방 깨달았기 때문이다.

‘일단 버티면서 기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어.’

가장 최고의 시나리오는 3세트, 길어도 4세트 안에 끝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일단 스코어를 동점으로 만드는데 집중해야 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한 번에 몰아치자.’

만약 더 이상 체력이 회복되는 게 불가능해진다면 무조건 패배하게 된다.

그런 최악의 상황이 닥치기 전에 모든 걸 쏟아부어야 한다.

실패한다면 패배하는 건 기정사실이 되겠지만 아무것도 해보지 않고 말라죽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할 수 있는 건 전부 해봐야 후회라도 남지 않을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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