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닉 볼리티에리 아카데미
아카데미의 평일 오전.
지혁은 오랜만에 운동복이 아닌 캐주얼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원래 이 시간이라면 한창 훈련에 집중하고 있어야 했지만 오늘은 아카데미에서 분기마다 열리는 중요한 시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서열이 결정되는 이번 이벤트는 장학금과 스폰서, 수업 클래스에 커다란 영향을 주는 터라 아직 경기가 시작하지 않았음에도 주변의 분위기가 제법 살벌했다.
주니어 선수 시절부터 스폰서를 찾지 못하면 원정 비용으로 매년 1억은 우습게 날려버리는 경우가 많아 아무래도 마음이 급한 것 같았다.
어지간한 금수저가 아니라면 막대한 적자를 감수하며 탑랭커까지 올라가는 기간을 버티기 힘드니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하긴 ATP랭킹 100위를 찍어도 상금만으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건 절대 아니었지.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려면 보험을 들어두는 편이 무조건 맞긴 해.’
물론 30위 안에 들어가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지만 거기에 해당되는 인물은 극소수라 의미가 없었다.
애초에 그 정도 유망주는 어렸을 때부터 기업들에게 관심이 쏟아져서 돈에 그다지 제약을 받지도 않겠지만.
[잠시 후,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선수들은 시간에 맞춰 배정된 코트로 이동해주시길 바랍니다.]
마침내 방송으로 알림이 들려오자 주변에서 분주한 움직임이 부쩍 늘었다.
하지만 지혁은 이번 시험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터라 느긋하게 관전할 코트를 찾아다녔다.
비록 그랜드슬램이나 마스터즈 대회에 비하면 경기 수준이 크게 떨어지겠지만 주니어 선수들의 플레이 스타일은 정형화되지 않아서 나름 재미가 있을 것이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유망주들의 다양한 시도를 보는 게 가능했으니 말이다.
‘부디 창의적인 플레이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네. 기대해볼 만한 선수들은 4~5명 정도 인가?’
아마 다른 참가자들이 전부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이들만은 지혁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멀지 않은 미래에 전부 랭킹 50위 안에 안착하는 천재들이 고작 아카데미 내부 시험에서 허무하게 탈락할 리 없었다.
그렇게 몇 분을 걸었을까. 지혁은 다른 곳에 비해 사람들이 많은 코트를 찾을 수 있었다.
‘음. 관전을 하러 온 외부인이 저렇게 많다니 왠지 저기에 내가 아는 선수가 있을 것 같은데? 그래. 첫 번째 경기는 저기로 하자. 어차피 마음에 들지 않으면 중간에 나올 수 있으니까.’
짧은 고민 끝에 선택을 내린 지혁.
인파가 몰린 코트에 도착하자 유망주에게 집중되어 있던 시선은 홀린 듯이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닉 볼리티에리 아카데미에서 지혁이 코칭을 받고 있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긴 했지만 설마 실물을 보게 될 줄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스포츠계에 떠오르는 거물과 인연을 만들 수 있다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것인지 들뜬 표정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골든 보이,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정말 이곳에서 훈련을 하고 계셨군요.”
“저번 호주 오픈이 끝나고 후원 제안을 보냈는데 혹시 기억하시나요?”
“저희 회사는 리를 지원하는데 정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흥분한 사람들 때문에 소란이 쉽게 진정되지 않을 듯하자 지혁은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이러다가 빠져나가기 힘들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을 무렵.
재빠르게 소란의 근원지로 뛰어온 IMG 매니지먼트 직원들과 아카데미 소속 코치들이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 주었다.
애초에 소통창구 역할은 IMG가 전적으로 담당하고 있었으니 기업에서 나온 사람들도 별다른 불만을 토해낼 수 없었다.
단지 은근슬쩍 계약을 약속받는 게 불가능해진 상황에 아쉬운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휴······. 그럼 누가 있나 한 번 볼까. 고생한 만큼 유명한 선수였으면 좋겠는데.”
고생 끝에 코트 내부를 확인하자 역시 아는 얼굴이 있었다.
얼마 전, 가장 권위 있는 주니어 대회인 오렌지볼에서 우승을 차지한 최상급 유망주, 정민이 보였던 것이다.
과연 차후 ATP랭킹 19위까지 치고 올라가는 한국의 천재는 유년기 시절부터 범상치 않은 관심을 받고 있었다.
‘이러니 어릴 때부터 니시코리처럼 IMG의 후원을 받을 수 있었던 거겠지.’
지혁이 코트 한편에 서자 정민의 상대 선수는 부쩍 긴장한 모습을 보여줬다.
안 그래도 다른 코트보다 사람이 많았는데 거물인 지혁까지 자리를 잡자 몰려드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뛰어난 경기력을 보여줄 수만 있다면 분명 좋은 기회가 되겠지만 상대가 아카데미 내에서도 유명한 정민이라 가망성이 거의 없었다.
[플레이어 레디. 서브 정.]
경기는 처음부터 시간에 맞춰서 왔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되었다.
[게임 정 3-0.]
[게임 정 6-0.]
[게임 세트. 매치 정 6-0, 6-0.]
그렇게 3세트 경기는 고작 40분 만에 끝나버렸다.
짝짝짝짝짝.
압도적인 결과에 간간히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과연 현재 주니어 선수들 중 최고라고 평가받을 만하다는 반응이다.
지혁은 정민에게 모든 시선이 쏠려있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아직 볼만한 선수들이 많은 만큼 빨리 움직여야 했다.
***
제법 많은 숫자의 코트를 돌아다니느라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오전 시간.
예상한 대로 16세부는 정민과 니시오카 요시히토가 압도적인 기량을 보이며 평정해버렸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아마 높은 확률로 이 두 명 사람 중에 서열 1위가 나오게 될 것이다.
1살이 더 많은 선배들도 시험에 참가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의외의 결과였다.
이 시기에는 키, 근력, 민첩 등 신체 능력과 관련된 나이가 어마어마한 이점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악조건을 극복해냈으니 두 선수가 얼마나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알만했다.
‘프로들에 비해 피지컬이 부족해서 그렇지 당장 퓨처스에 데뷔해도 충분히 통할 실력이던데. 비슷한 나이대의 선수들이 상대가 안 되는 게 당연해.’
중등부 학생들도 그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지 대진이 붙게 되면 자포자기하고 형편없는 경기력을 보여줬다.
어차피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 듯했다.
정민과 니시오카는 18세부에 올라간다고 가정해도 데이비드, 월리엄스 등 몇몇 고등부 장학생들을 제외하면 100% 승리를 따낼 만한 선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하긴 같은 장소에서 훈련을 받는데 수준이 다르다는 걸 모를 리가 없겠지. 그나저나 역시 닉 키즈와 IMG 키즈들이 시험을 주도하는구나.’
수백 명의 참가자들이 있지만 상위 라운드에 진출하는 건 대부분 얼굴이 익숙한 녀석들이다.
재미있게도 닉에게 직접 코칭을 받는 학생들만 남은 것이다.
‘진짜 재능이 있는 주니어 선수들을 정확하게 선별해놓긴 했네.’
아무래도 뉴페이스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많아봤자 한자리 숫자를 넘지 못할 것 같았다.
‘경기들이 워낙 일방적이라 오후는 굳이 챙겨볼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시험은 며칠 동안 열리니까 준결승 이상만 챙겨보자.’
지혁은 수준이 맞지 않는 대진에 흥미가 많이 하락한 건지 오늘은 이쯤에서 관전을 끝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팽팽한 대결이 만들어져야 뭔가 얻을 게 있지 이대로는 그저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록 닉이 바빠서 코칭을 받지는 못하겠지만 코치들을 호출해서 개인 훈련을 하면 되니 괜찮았다.
그렇게 지혁의 아카데미의 시험 첫날은 끝났다.
***
3일 뒤, 중등부 결승전.
훈련을 하느라 한동안 관심을 끄고 있던 지혁은 드디어 서열 1위가 정해진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급하게 경기장으로 이동했다.
다행히 매치는 아카데미 내부에서 열리는 터라 늦지 않게 제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와. 사람이 엄청나게 많구나. 재학생들이 거의 다 모였는데? 군데군데 나이 많은 남자들이 있는 걸 보면 저들은 스카우터들이겠고.’
분기마다 있는 행사라고 해도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인 만큼 관심도가 유별나게 높은 모양이다.
닉 볼리티에리에게 보증받은 알짜들이 남은 만큼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거겠지.
‘마지막까지 남은 건······예상한 대로구나. 변수는 없었어.’
코트에서 유일하게 라켓을 들고 있는 선수들을 보니 첫날부터 무쌍을 찍었던 정민과 니시오카 요시히토였다.
미국, 유럽, 남미의 유망주 수백 명을 전부 재치고 한국과 일본의 주니어 선수들이 있는 걸 보니 묘한 기분이 든다.
아무래도 인프라 차이 때문에 이런 경우가 상당히 드물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상황을 지혁만 낯설게 생각하는 건 아닌지 주변에서도 한창 열띤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시아 출신 유망주만 두 명이라. 재미있는 상황이구만. 자네는 누가 이길 것 같나?”
“최근 성적을 생각하면 승률이 높은 건 정이겠지. 오렌지볼에서 보여준 실력도 대단했고 피지컬도 월등히 우세하잖아.”
“음. 니시오카가 테니스 선수치고 단신이기는 하지. 주니어에서 제법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프로에서 한계가 뚜렷한 스타일이야.”
“아직 성장기가 3~4년은 족히 남았으니 여지를 남겨두자고. 니시코리 같은 전례도 있지 않나.”
“그나저나 시대가 변하려고 하는지 전 세대에 걸쳐 아시아 선수들이 좋은 활약을 보여주는 걸.”
“골든 보이 같은 슈퍼 스타를 잡아채면 어마어마한 돈을 벌 수 있을 텐데 저 선수들이 그만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을까?”
“설마 리를 말하는 건가? 허, 그건 어렵지. 그의 재능은 테니스 역사에서 손에 꼽히는 수준이잖아. 페더러, 나달과 같이 언급되는 슈퍼 스타를 아마추어에 빗대는 건 너무 나갔어.”
“그냥 해본 말이니 너무 뭐라 하지 말게. 그런데 그런 괴물이 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한국은 그만한 선수를 키워낼 만한 역량이 전혀 없잖아.”
“나도 자세하게 조사해봤지만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졌어. 주니어 시절의 커리어가 나쁜 수준은 아니었지만 지금 활약을 생각하면 절대 납득이 가는 수준이 아니거든.”
스카우터로 보이는 중년인들은 지혁이 근처에 있다는 것도 모른 채 한참 동안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이 보여주는 반응처럼 테니스를 업으로 삼고 있는 업계 사람들에게 골든 보이라는 이름은 1년 사이 커다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제 만 17세가 된 어린 나이로 수억 명이 시청하는 인기 스포츠의 판도를 바꾸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앞으로 프로 활동을 할 수 있는 기간도 10년 이상 남은 만큼 향후 테니스계는 지혁의 중심으로 돌아갈 것이다.
거기에 대한 영향으로 그에 대한 분석은 이미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중이었다.
특출 난 성장 속도의 비결과 약점, 트라우마 등 유년기부터 모든 기록이 실시간으로 흘러나가고 있었지만 지혁이 숨기고 있는 가장 중요한 비밀은 그런 방법으로 알아내는 게 불가능하니 그들은 결국 원하는 걸 얻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