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광저우 아시안 게임.
퉁!
네트를 아슬아슬하게 넘어가는 지혁의 백핸드 드롭샷.
니시코리는 끼익!하는 소리를 내면서 다급한 움직임으로 달려왔지만 백스핀이 걸려 낮게 바운드되는 공을 걷어내지 못했다.
베이스라인 끝에서 역동작이 걸린 상황을 극복하기엔 그의 풋워크 속도가 한참이나 부족했기 때문이다.
[4-2! 이지혁 선수가 완벽하게 드롭샷을 성공시킵니다! 정교한 빌드업으로 니시코리의 허점을 정확하게 찔렀어요. 저러면 어떤 탑랭커라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죠.]
[네. 베테랑처럼 노련함이 느껴지는 플레이였습니다. 그래도 일방적인 경기는 아니네요. 스코어만 따지고 보면 의외로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어요. 초반 기세를 봤을 때 베이글이나 6-1이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에요. 니시코리가 기대 이상의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무대가 무대인 만큼 평소보다 집중도가 높은 모양입니다. 그래도 결과를 뒤집는 건 아직 어려워 보여요.]
[승리보다는 그랜드슬램 우승자와 거의 대등한 대결을 펼쳤다는데 의미를 두어야겠죠. 두 선수의 격차는 아직 넘을 수 없을 정도로 크니까요.]
여섯 번째 게임이 끝나자마자 멘트를 쏟아내는 해설자들.
워낙 중계 화면에서 흥미로운 상황이 실시간으로 펼쳐지고 있는 중이라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던 것 같았다.
그랜드슬램도 아닌 아시안 게임에서 이 정도 수준의 경기가 성사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 충분히 이해가 되는 반응이었다.
솔직히 이런 빅 매치를 어딜 가서 볼 수 있겠는가.
두 선수의 인지도와 섭외 비용을 생각하면 오늘 경기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100억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아직 전성기의 실력에 도달하지 못했구나. 나이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건가.’
지혁은 과거 ATP랭킹 4위의 니시코리를 그랜드슬램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54위의 랭킹을 가진 채 정면으로 부딪친 결과는 3-0.
분명 같은 아시아 출신 선수에게 처참한 패배를 당해서 큰 충격을 받았던 걸로 기억했다.
그게 2015년 무렵이었으니 사실 그렇게 먼 미래도 아니었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이대로 4~5년 후에 인간계 최강의 반열에 올라갔었지. 지금 실력을 보니까 이번에는 그 기간이 더 단축될 것 같네.’
지금처럼 무서운 성장 속도가 유지된다고 가정했을 때 넉넉하게 3년이면 전성기 실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그랜드슬램 우승을 하는 게 한층 더 어려워질 거라 벌써 골치가 아파오는 기분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오늘 경기의 전세를 바꾸지 못한다는 거야. 아무리 성장 속도가 빠르다고 해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려면 족히 몇 개월은 걸리니까.”
여기서 시간이 더 지나면 쉽게 제압하는 게 불가능해질 테니 선수로 완성되기 전에 최대한 전적을 쌓아야겠다.
탑10급 실력을 갖추는 순간 초장기전이 자연스럽게 예약될 테니 말이다.
***
결승전이 시작하고 대략 한 시간쯤 흘렀을 때.
지혁과 니시코리의 경기는 마침내 매치 포인트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이제 위닝샷이 한 번만 더 들어가면 이주 동안 진행되었던 아시안 게임도 여기서 마무리될 것이다.
“하앗!”
탕!!
[게임 세트. 매치 리. 6-3, 6-2.]
날카로운 각도로 경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백핸드 크로스샷.
결승전의 최종 우승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상했듯이 지혁이었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코트 앞으로 걸어가 서로의 등을 두드려 주는 두 선수.
관중들은 승자와 패자가 서로를 존중하는 모습에 박수를 치며 격려를 보냈다.
뜨거운 환호성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들려오는 걸 보니 아무래도 만족스러운 경기였던 것 같았다.
“후······. 이번에도 결국 큰 차이로 졌네. 도쿄에서 했었던 친선 경기 이후로 재경기가 성사될 때까지 나름 최선을 다했는데 어째 실력이 더 벌어지는 거 같아.”
“아마 제 컨디션이 유독 좋아서 그랬을 거예요. 그때보다 전체적인 실력이 훨씬 까다로워졌으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니시코리의 실력이라면 조만간 탑10 안에 들어가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할 거예요. 이건 위로하기 위해 입바른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진심이에요.”
“그래? 그나마 다행이네. 사실 나는 너에게 매치를 따내는 걸 목표로 하고 있거든. 그런데 계획했던 것보다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네.”
단기간에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다고 판단한 건지 약간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니시코리.
겉으로 엄살을 부리고 있지만 불가능을 언급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 아직 포기를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마 본인의 역량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대략적인 견적이 나온 거겠지.
“니시코리도 이번 아시안 게임으로 시즌은 마무리하는 거죠?”
“맞아. 랭킹이 때문에 어중간한 대회들은 참가하는 게 불가능하잖아. 그런데 왜?”
“시간이 남으면 훈련을 같이 할 수 있나 해서요.”
“그런 제안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지. 오히려 내가 부탁하고 싶은 걸.”
괜찮은 파트너를 구하는 게 하늘에 별따기인 만큼 니시코리는 지혁의 말을 듣고 반기는 표정을 지었다.
긍정적인 반응을 보면 거절을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럼 자세한 건 매니지먼트를 통해 다시 연락을 드릴게요. 지금 당장 일정을 정하는 건 힘드니까요.”
분주하게 움직이는 주변 사람들을 향해 슬쩍 눈짓을 하는 지혁.
니시코리는 그 말을 듣고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었다.
저 멀리서 기자들이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 후, 지혁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질문 세례를 받게 되었다.
“우승 소감을 말씀······.”
“아시아에서 라이벌로 생각하시는 선수······.”
“복귀전을 완벽하게 성공했는데 공식 대회는 언제부터 출전할 생각인지······.”
“비시즌기의 어떤 스케줄을 보낼 계획······.”
“S증권에서 빅3와 이벤트 경기를 기획하고 있다는데 승낙할 의사가······.”
***
아시안 게임이 종료되고 일주일 후, 서울 소재의 IMG 테니스 훈련장.
[이지혁]
근력: 80▲ 민첩: 80▲ 체력: 76▲ 신장: 188cm▲
서브(A), 포핸드(A+), 백핸드(A+), 풋워크(A), 외모(A-), 트릭샷(A-), 찰나(A)
[12,365포인트]
지혁은 바쁜 일정을 어느 정도 해결하자마자 미루어두었던 일을 처리했다.
아시안 게임에서 얻은 포인트를 모두 어플에 투자한 것이다.
다음 시즌이 시작되기 전까지 상승한 신체 능력에 충분히 적응하기 위해 결단을 내린 행동이었다.
가능하면 한계 지점까지 한 방에 올리고 싶었지만 아시안 게임은 그랜드슬램과 마스터즈에 비해 테니스 팬들의 주목도가 낮아서 만족할 만한 포인트를 쌓지 못했다.
“부족한 건 다른 걸로 보충해야겠어. 그나저나 풋워크가 얼마나 빨라졌을까. 며칠 동안 궁금해서 죽는 줄 알았네.”
동체 시력이나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 미약하게나마 느껴져서 더욱 충동을 참기 힘들었다.
하지만 광고 촬영이나 외부 활동을 하는 도중에 정확한 피지컬을 측정하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었다.
주변에 마땅한 시설이 없어서 시간을 내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오늘 시간을 들여 점검해보면 확실해지겠지. 근력만큼 효과가 있으면 좋을 텐데.”
지혁은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텅 비어있는 코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를 뒤따라 파트너 역할을 할 코치 두 명이 반대편 베이스라인 양 옆으로 자리를 잡았다.
“지혁아, 대회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조금 더 쉬어야 하지 않겠어? 비시즌기에는 마음 놓고 편하게 쉬어줘야 한다고. 매일 채찍질만 하면 퍼져버릴 거야.”
“맞아.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휴식도 그만큼 중요하다고.”
이른 아침부터 훈련장으로 호출된 코치들은 지혁의 변덕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의문이 담긴 표정으로 물어왔다.
이번 시즌의 성적이라도 나빴으면 지금 같은 행동을 이해하겠는데 최근 모든 대회에서 승승장구했었다.
여유를 부려도 게으름이라 욕할 사람이 전무한 상황에서 이런 선택을 했으니 어지간한 독종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 경기를 한지 일주일이 넘어서 체력은 완벽하게 회복됐어요. 어차피 그랜드슬램처럼 4~5시간이 넘게 뛰어다닌 것도 아니잖아요.”
“음······. 그렇긴 하지.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 마. 나중엔 쉬고 싶어도 일정이 바빠서 그러지 못할 테니까.”
“네. 저도 당장 하드 트레이닝을 할 생각은 없어요. 오늘은 실력을 잠깐 시험해보려고 방문한 거예요.”
결국 코치들은 잠깐의 대화 끝에 지혁의 의견을 존중해주기로 했다.
자신들이 이해하기 힘든 천재의 변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솔직히 평소 괴짜 같은 행동을 해도 항상 결과가 좋았기 때문에 말리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어떻게 해주면 될까? 평소처럼 스트로크를 치기 좋은 코스로 보내주면 되는 거야?”“아뇨. 아웃이 되더라도 상관없으니까 최대한 사이드라인으로 보내주세요. 풋워크 거리가 최대한 길어지게요.”
“······? 평소랑 다른 방식이네. 일단 알았어.”
그렇게 세 사람은 베이스라인에 자리를 잡고 나서 랠리를 시작했다.
탕! 탕! 탕!
처음부터 위닝샷을 넣는 게 목적이 아니었기에 스트로크는 코트를 왕복하는 모습만 보여줬다.
화려하지 않고 심심해 보이는 훈련이 몇 분 정도 지났을까.
몸이 어느 정도 풀린 지혁이 코치들에게 약속된 신호를 보냈다.
탕!!
포핸드와 백핸드로 딱 치기 좋게 떨어지던 타구들은 순식간에 받아내기 곤란한 코스로 떨어졌다.
서로의 기량 차이를 생각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두 명이 코트를 반씩 맡고 있는 데다가 지혁이 수비에만 집중하고 있어서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없이 현상 유지를 했다.
타다다다. 탕!!
타다다다다. 탕!!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넓어지는 수비 범위.
랠리의 수준은 결국 평범한 프로들이 받지 못할 지경까지 올라갔다.
그럼에도 지혁이 신기와 같은 실력으로 스트로크를 전부 라인 안으로 집어넣었다.
“허······.”
코치들은 랠리를 계속 이어나가다가 갑자기 뭔가 깨달은 듯 헛숨을 내뱉었다.
상황이 칼날 위를 걷는 것처럼 긴박하게 흘러가고 있음에도 자신들이 몇 발자국 움직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아직도 바운드 위치를 조절할 수 있는 여력이 남아있다는 뜻이었다.
쿵!! 통. 통. 통.
결국 실책을 먼저 저지른 건 당황해서 몸이 굳어버린 코치들 쪽이었다.
“······뭔가 달라진 거 같지 않아? 지혁이의 코트 커버력이 이렇게까지 좋았었나?”
“우리가 보내는 타구가 탑랭커들에 비해 느려서 그런 게 아닐까······. 설마 공식 경기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게 가능하겠어? 나달이나 조코비치도 아니고 말이야.”
“그건 조금 더 시험해보면 알겠지. 갑자기 왜 호출하나 했더니 역시 이유가 있었네. 이런 풋워크를 가지고 있다면 나는 매일매일 훈련을 즐겁게 할 걸.”
“실력이 눈에 띌 정도로 확연하게 상승하는데 힘들어도 재밌을 수밖에 없지. 독한 게 아니라 당연한 거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