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역대급 테니스 천재가 되었다-129화 (129/241)

129화. 비시즌기

지혁은 한국에서 대부분의 일정을 처리하고 난 후, 아시안 게임 결승전에서 니시코리와 약속했던 대로 일본으로 날아갔다.

사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서울에서 훈련을 할 수 있었지만 당장 실력을 시험해보고 싶은 충동을 참지 못했다.

아마 비행기로 두 시간도 걸리지 않는 거리라 더 그랬을 것이다.

“지혁아, 니시코리가 지금 촬영 중이라 일본 방송에 나올 수도 있을 텐데 괜찮겠어?”

“직접적으로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상관없어요. 훈련을 하던 도중에 끼어들거나 하진 않을 거잖아요.”

“당연히 그런 상황은 우리하고 매니지먼트가 용납하지 않지. 그치들도 너를 찍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큰 이득이라 조심하면서 행동할 거야.”

“그럼 됐어요. 우리 쪽에서 갑자기 일정을 당겼는데 이 정도는 감수해야죠. 니시코리 쪽도 우리를 배려해준 거니까요.”

지혁은 코치에게 괜찮다고 말하며 약속한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큼지막한 건물의 입구를 통과하고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안쪽에서 탕!하는 임팩트 소리가 연이어서 들려왔다.

아무래도 니시코리가 실내 코트에서 훈련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덜컥!

실내 코트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지혁과 일행들.

“허억!”

인기척을 느끼고 입구 쪽에 시선을 주고 있던 몇몇 사람들은 곧바로 지혁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헛숨을 들이켰다.

웅성웅성.

그렇게 훈련장이 급격하게 시끄러워지자 니시코리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소란의 원인을 찾기 위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혁을 발견한 건지 훈련을 멈추고 입구로 빠르게 다가오는 니시코리.

그는 연락한 지 하루 만에 일본으로 날아올 줄 몰랐는지 꽤나 놀란 표정이었다.

“정말로 왔구나. 조금 더 늦어질 줄 알았는데.”

“시간이 남아서요. 마침 거리도 가깝고 말이에요. 제가 방해가 된 건 아니죠?”

“아니, 저번에도 말했던 것처럼 나야 언제든 환영이야. 솔직히 네가 있는 게 훈련의 효율이 훨씬 좋으니까. 너 같은 파트너를 어디서 구하겠어.”

“촬영 중이라고 하더니 진짜 카메라가 있긴 하네요.”

코트 한 편을 슬쩍 눈짓하며 말하는 지혁.

그곳에는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스포츠 스타들의 재회를 찍고 있는 방송국 사람들이 있었다.

당장 달려와서 인터뷰라도 하고 싶은 것 같지만 그들은 사전에 논의해둔 약속들이 있어서 안절부절못하며 다가오지 못했다.

의도치 않게 지혁의 심기를 거슬려서 일을 그르치게 될까 걱정하는 반응이었다.

잠깐의 욕심으로 간신히 얻은 기회를 날려버리면 이후의 일을 감당할 수 없으니 말이다.

“촬영은 아마 3~4일 정도 걸릴 거야. 그동안 저 사람들이 내 옆에 붙어 다닐 거니까 신경 쓰이면 다음 주부터 훈련을 시작해도 돼.”

“아뇨, 그런 걸 생각했으면 처음부터 일본까지 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다행이네. 그럼 인사는 이쯤 하고 나는 하던 일을 마무리 지을 게. 너도 원하면 비어있는 코트를 써도 괜찮아. 한동안 잘 부탁해.”

니시코리는 그 말을 하고 원래 있던 자리로 다시 되돌아 갔다

갑작스럽게 중단된 훈련을 이어가기 위해서였다.

“저희도 몸을 풀고 있죠. 아마 니시코리의 훈련이 끝나면 경기를 할 수 있을 거예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지혁도 이내 비어있는 코트를 하나 골라서 코치들과 같이 들어갔다.

기왕 여기까지 시간을 내서 방문한 이상 그냥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

두 선수가 각자의 훈련에 집중하면서 대략 1시간쯤 지났을까.

지혁과 니시코리는 마침내 같은 코트에 올라갈 수 있었다.

해야 할 일은 전부 마치자 친선 경기를 하자는 얘기가 자연스레 나왔기 때문이다.

불과 이주 전에 아시안 게임에서 붙었으니 니시코리 쪽에서 먼저 리턴 매치를 요구할 줄 알고 있었다.

“케이와 골든 보이의 비공식전이라고······? 이걸 영상으로 찍으면 시청률은 보장된 거나 다름없어!”

“맞아. 저번 자선 경기를 맡은 방송국도 엄청난 대박을 쳤잖아. 저 조합은 그냥 지나치기 힘들지. 가능하다면 케이가 우세한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는데 이기면 더 좋고 말이야.”

“그건 힘들지 않을까? 아시안 게임에서도 결과가 좋지 않았잖아.”

“연습 경기에서 전력을 다하지 않을 테니 혹시 모르지. 승패를 크게 고려하지 않을 테니까.”

“나는 이기는 건 기대하지도 않으니 부디 괜찮은 그림이 나오길 바래야겠어. 골든 보이에게 밀리지 않는 모습만 보여줘도 영상으로 쓰는 건 충분할 거야.”

탕!!

별다른 준비 운동조차 없이 곧바로 시작된 경기.

먼저 서비스게임을 가져간 건 니시코리였다.

‘우선 수비에 집중하자.’

지혁은 애초에 풋워크를 점검하는 게 목적이라 공격적인 스트로크를 전부 봉인한 채 베이스라이너 스타일을 고집했다.

코트의 가장 끝부분인 베이스라인을 넘지 않은 상태로 경기를 지속한 것이다.

탕!! 탕!! 탕!!

공세에 나서지 않아서일까.

랠리의 주도권은 순식간에 니시코리에게 넘어가 버렸다.

주특기를 묶어둔 채 얻어맞기만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역시 코치들하고 느낌이 완전히 다르긴 하네. 두 명을 상대하는 것보다 압박감이 훨씬 심해. 타구의 질이 달라서 그렇겠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선수라도 이런 상황이 계속 지속되면 길어야 5~6구 안에 포인트를 내주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스트로크는 좀처럼 끝나지 않고 끈질기게 이어졌다.

지혁이 불가능해 보이는 타구들을 용케도 걷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음······.“”

신기와도 같은 플레이에 기가 질린 듯 신음을 흘리는 방송국 사람들.

상위 랭커들이 제대로 대결하는 모습을 경험한 적 없던 그들은 어떻게 이 정도까지 할 수 있는지 신기하다는 반응이었다.

“두 선수 모두 명불허전이구나. 연습을 하던 모습과 차원이 달라. 이게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는 천대들의 재능인가······.”

“괜히 대체 불가능하다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었어. 다음 세대에 저만한 유망주가 나올 수 있을지 걱정이네. 딱히 주목할 만한 주니어 선수가 없잖아.”

“저들과 비교하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지. 최근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줘서 유망주 풀 자체는 사상 최고야. 메이저 대회에서 임팩트가 약해서 문제지만.”

“그런데 케이가 조금 유리한 거 같지 않아? 이건 생각지도 못한 상황인데. 이러다가 정말 이기는 거 아닌가?”

“글쎄. 골든 보이가 만만한 선수가 아니라 확답을 내리기 힘드네. 우리가 모르는 의도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야.”

주변에서 거듭 칭찬이 쏟아지는 것과 달리 정작 이야기의 당사자인 니시코리의 얼굴은 실시간으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경기를 하면 할수록 점점 늪에 빠져드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분명 회심의 샷을 쳤는데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시 스트로크가 돌아오니 아무리 돌부처 같은 그라도 멘탈이 깎여나갈 수밖에 없었다.

승리할 방법이 도통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턱!

결국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랠리는 네트에 걸린 실책으로 마무리되었다.

니시코리가 평정심을 잃고 컨트롤이 흔들린 것이다.

안 그래도 위태롭던 랠리 상황에서 기량까지 하락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러브 서티.]

[피프틴 포티.]

[게임 리 1-0.]

그렇게 처음부터 브레이크가 나오자 구경을 하던 사람들의 분위기는 극과 극으로 나뉘었다.

지혁을 따라온 일행과 니시코리 쪽으로 극명하게 말이다.

‘방금 실책은 조금 아쉽네. 내가 원하는 대로 컨트롤이 되지 않았어. 아직 밸런스가 완벽하게 조절된 게 아니라는 의미겠지.’

그게 아니었더라면 퍼펙트 스코어를 만드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을 텐데.

‘이만큼 긁어 놨으니 슬슬 전력을 보여주겠지? 자존심이 강하기로 알아주는 선수라서 굳이 더 자극할 필요도 없을 거야.’

지혁은 에이스를 얻는데 전혀 관심이 없어서 힘을 상당 부분 빼고 서비스게임을 개시했다.

고속 서브를 사용하면 포인트를 싱겁게 얻을 확률이 높아져서 경기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다.

그런 상황을 원하지 않으니 반격을 당하지 않을 수준인 210km 전후의 속도를 유지하는 게 가장 적당했다.

탕!! 탕!! 탕!!

[러브 피프틴.]

[러브 서티.]

와아아아!

2세트에 접어들자 열세에 처한 게 마치 거짓말이라는 듯 다시 한번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니시코리.

침울해져 있던 방송국 사람들은 자신들의 역할도 잊은 채 환호성을 질렀다.

“그렇지! 초반은 탐색전이었나 봐.”

“그래. 일본 최고의 천재가 아무것도 못하고 무력하게 패배할 리 없지. 이대로 동점을 만들어 버리면 승부는 다시 원점이야.”

“케이가 진지하게 나왔으니 경기가 어떻게 돌아갈지 기대되네. 적어도 몇 게임 정도는 문제없이 따내겠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쏟아부어서일까.

니시코리는 경기에서 조금도 밀리지 않고 스코어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대활약을 보여줬다.

물론 두 선수가 가용할 수 있는 전력을 모두 동원해서 제대로 붙으면 지혁이 승기를 가져가는 게 당연했지만 제약을 둘둘 두르고 있는 상태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고속 서브를 봉인하고 플레이 스타일을 바꾼 채 경기에 임했는데 랭킹 20위 대의 탑랭커를 압도적으로 제압하는 건 빅3급 선수에게도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게임 리 3-3.]

[게임 리 4-4.]

그렇게 동점 행진을 계속해서 이어가는 경기.

겉으로 보면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것 같았지만 여유로운 지혁과 다르게 니시코리는 무언가에 쫓기는 듯이 움직임이 다급했다.

아무래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불리해질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역시 실전 같은 경기가 효과가 좋구나. 한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며칠 훈련한 것보다 나은 것 같아.’

빨라진 풋워크에 조금씩 익숙해지자 코트 커버력도 자연스레 더 넓어지고 있었다.

스트로크 대처 능력이 완성되면 메이저 대회에서 탑랭커들을 상대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벌써부터 궁금해졌다.

지금 모습을 보면 절대 효과가 없진 않을 것이다.

‘잘하면 나달하고 지구전을 펼치는 것도 가능하겠어.’

물론 우주 방어를 자랑하는 그와 아무런 대비도 없이 부딪치면 머리가 깨지겠지만 지혁에게는 그걸 충분히 극복할만한 공격 옵션들이 있었다.

그러니 위닝샷을 나오기 전까지 버티기만 하더라도 그 역할은 충분했다.

“허······. 니시코리가 상대가 되지 않는데?”

“맞아. 비록 스코어가 비슷하긴 해도 이주 전과 완전히 딴판이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승리를 가져올 수 있을 거야.”

“솔직히 지혁이를 라이벌로 삼고 있는 니시코리가 불쌍하네. 내 생각엔 저 녀석과 경쟁해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선수는 없어.”

지혁의 코치들은 프로 출신의 전문가들인 만큼 테니스에 문외한인 방송국 사람들과 다르게 경기가 서서히 말려 들어가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너무나 뻔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같은 세대에 태어났다는 죄로 수많은 고난을 겪게 될 니시코리를 보는 시선은 자그맣게 연민이 깃들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소용없을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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