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비시즌기
니시코리에게 다시 한번 패배를 안겨주고 이틀 뒤.
훈련장은 평소와 다르게 못 보던 외부인들로 북적였다.
오늘이 방송국 촬영의 가장 중요한 날이라 프로그램의 진행자와 5~6명의 출연진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하아······. 많이도 왔구나. 지혁아, 지금이라도 다른 코트를 빌릴까? 저 사람들이 있는 동안은 실내 코트에서 뭔가 하는 건 현실적으로 힘들어 보이는데 말이야.”
“재밌을 것 같으니까 잠깐 구경이나 하죠. 어차피 여기 있어도 괜찮다고 들었거든요. 허락을 받았으니 딱히 문제가 생기진 않을 거예요.”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살짝 저으며 답하는 지혁.
그러자 코치들은 촬영팀이 무슨 의도를 가지고 그런 말을 했는지 알겠다는 듯이 표정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조금만 머리가 있다면 지금 상황을 눈치채지 못하는 게 이상했다.
만약 자신들이었더라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테니 말이다.
“쯧. 의도가 너무 뻔하네. 운이 좋으면 지혁이가 프로그램에 나와줄 수 있다고 생각한 거잖아. 차라리 정식으로 섭외를 하지. 출연료가 감당이 안 될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래도 선을 넘은 행동을 한 건 아니잖아. 저것까지 뭐라고 하긴 그렇지. 강제로 붙잡아 두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귀여운 축에 속하는 수작인 걸?”
“후······. 확실히 우리가 갑자기 들이닥친 거니 불청객은 이쪽이 맞긴 하네. 이번 촬영만 끝나면 철수할 거라 했으니 그때까지 참아야겠어.”
방송국 사람들은 바로 옆에서 자신들을 향해 투덜거리고 있는 것도 모르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준비를 차곡차곡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장비들의 세팅이 끝나고 촬영이 시작됐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니시코리를 가장 부각할 수 있는 포맷을 짜 왔구나.’
오프닝부터 일본 특유의 반응을 보는 게 재밌는지 그 광경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구경하는 지혁.
방송에 정신이 팔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구경을 하다 보니 어느새 서브 시범을 보이는 차례까지 왔다.
솔직히 니시코리는 쟁쟁한 탑랭커들 사이에서 서브를 강점으로 내세울 수 있는 선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랭킹 300위 아래의 어중간한 랭커들과 비교하면 월등히 나았다.
지혁과 니시코리 두 선수가 갑자기 튀어나온 이레귤러라서 그렇지 한중일 각국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는 아시아 랭커라고 해봤자 랭킹이 300~400위에 불과했다.
니시코리는 적어도 지금까지 전문가들과 메이저 대회에서 맞붙는 탑랭커들에게 서브를 치명적인 약점으로 지적받은 적이 없으니 고작 예능 방송에서 아쉬운 모습을 보이진 않을 것이다.
휙!
몇 번의 연습을 하고 난 뒤, 제대로 자세를 취하고 공을 토스하는 니시코리.
곧이어 활처럼 휘어진 몸이 라켓을 번개처럼 휘두르자 쾅!!하는 굉음이 실내 코트를 가득 채웠다.
일반인들은 거리가 멀어서 서브에 맞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어깨를 움찔하며 움츠러들었다.
ATP랭킹 20위 대의 상위 랭커의 압박감은 그만큼 대단했기 때문이다.
오오오오!!
“이게 일본의 자랑, 니시코리 케이의 서브인가요!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로 빠릅니다.”
“테니스를 방송이 아니라 직접 보는 건 처음인데 박력이 정말 대단하네요······.”
“와!! 니시코리상 멋있어요! 저도 조금 있다가 배워보고 싶어요!”
“요즘 테니스가 엄청 유행하고 있어서 관심이 있었는데 직접 보니까 더 매력적이네요. 니시코리상이 천재라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거겠죠?”
진행자와 출연진으로 초청받은 여자 출연진들은 첫 번째 서브가 정확하게 목표 지점에 떨어지자 박수를 치며 칭찬 세례를 쏟아냈다.
분명 아까 전만 하더라도 가식이 느껴졌는데 이제야 진심으로 감탄한 반응이었다.
쾅!! 쾅!! 쾅!!
코트 위에 있던 니시코리는 주변의 분위기가 변한 것을 알고 있는지 점점 속도를 올리며 자신의 실력을 과시했다.
며칠 전 지혁과 붙었을 때와 거의 비슷한 위력까지 도달한 걸 보니 힘을 아끼지 않고 전력을 다하고 있는 모양이다.
‘적당히 해도 될 텐데 신이 났구나. 여자 연예인들이 있어서 그런가?’
확실히 평범한 일반인과 뚜렷하게 구분이 될 만큼 예쁘장한 사람들이 많다.
나이대도 니시코리보다 어리거나 비슷하니 신경이 많이 쓰이는 것 같았다.
근처에서 여자 친구인 유즈키가 도끼눈을 뜨고 있는데도 저 정도로 티를 팍팍 내다니, 나중에 어떤 변명으로 지금 상황을 감당할 생각인지 모르겠다.
“네! 정말 잘 봤습니다! 과연 일본 최고의 천재다운 실력이었어요.”
적당한 순간에 끼어들어서 서브를 멈춘 진행자.
카메라 밖에서 PD가 신호를 주자 스태프들이 표적판을 들고 코트 안으로 빠르게 들어왔다.
그 돌발 상황에도 니시코리는 당황하지 않고 담담한 표정이었다.
오늘 촬영은 사전에 전부 협의가 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오! 니시코리가 재밌는 걸 하는구나. 탑랭커라고 해도 저건 쉽지 않을 텐데 자신감이 대단하네.”
“위력이 강한 플랫을 고집하지 않으면 반절 정도는 그럭저럭 괜찮아 보여. 지혁아, 너라면 저기에 전력을 다한 서브를 넣을 수 있겠어?”
지혁은 은근한 기대가 담긴 코치의 질문을 듣고 다양한 크기의 표적지를 빠르게 훑어봤다.
그러자 큰 건 A4 종이만 하고 작은 건 포스트잇과 비슷한 사각형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이 정도면 가장 쉬운 사각형도 아마추어에게 충분히 힘든 난이도다.
스트로크라면 몰라도 서브는 컨트롤이 훨씬 더 까다로웠으니 말이다.
200km가 훌쩍 넘는 공을 가로세로 5cm 안에 원할 때 언제든지 집어넣는 것이 가능한 선수는 현역 프로들 중에서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빅3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음. 어느 정도 가능해 보이는데요? 물론 완벽하진 않을 거예요. 정확도가 아무리 높아봐야 80%가 한계겠죠.”
“80%? 그것만 해도 엄청난 거지. 아마 어지간한 프로들도 반절도 성공시키지 못할 거야.”
“서브는 제가 자신하는 분야 중에 하나잖아요. 그럼 니시코리가 얼마나 잘하는지 볼까요.”
모든 표적지가 반대편 코트 바닥에 붙여지고 난 후, 진행자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재치 있는 토크를 진행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혁과 일행들이 짐작한 대로 서브의 정확도를 측정하는 게임이 시작됐다.
탕!!
가장 커다란 표적지부터 골라서 서브를 떨어트리는 니시코리.
A4 용지 크기 정도는 넉넉한지 시도는 고작 한번 만에 가볍게 성공이 나왔다.
당장 박수가 나와야 하는 상황이지만 사람들은 입을 꼭 다문 채 상황을 지켜봤다.
아직 남아있는 표적지가 많은 만큼 집중력을 깨지 않으려고 배려를 한 것이다.
그렇게 니시코리의 미션은 마지막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앗!”
쿵!!
하나 남은 표적지를 몇 cm 차이로 실패하는 서브.
사람들은 완벽한 결과가 아니었음에도 진심을 담아 박수를 쳤다.
영상이 아니라 눈으로 보면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아마추어들만의 생각이 아니라 전문가들인 코치들의 의견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지혁이에게 가려져서 그렇지 재능이 무시무시한 녀석이긴 하구나. 니시코리의 나이가 아직 21살이었지? 큰 부상만 당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아시아에서 그랜드슬램 우승 후보가 하나 더 나오겠어.”
“피지컬이 조금만 더 좋았으면 잠재력을 더 인정받았을 텐데 그 부분이 너무 치명적인 약점이네.”
“글쎄. 오히려 저 대단한 테크닉을 얻게 된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 주어진 조건을 극복하려다가 정상급의 숙련도를 얻은 거지.”
“아무튼 몇 년 안에 랭킹에 제법 변동이 생기겠어. 저 정도 잠재력이면 탑10까지 무난하게 가능할 거야.”
니시코리가 기대를 한참이나 뛰어넘는 가능성을 보여줘서일까.
미션이 끝난 이후로 그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꽤나 달라졌다.
지혁과 재회할 때마다 매번 처참하게 패배해서 하지 못했던 객관적인 평가가 드디어 가능해졌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워낙 그의 존재감이 묻힌 감이 있었다.
어디 가서 절대 무시받을 선수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자! 다음 코너는······.”
한층 집중도가 올라간 상태에서 진행되는 방송.
잠깐만 보다가 자리를 뜨려고 했던 지혁은 어쩌다 보니 계속해서 훈련장에 남아있게 되었다.
이대로 계속 있다가 말려들 게 분명했지만 잘못한 것도 없는데 굳이 촬영팀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내키지 않는 상황이 닥치면 그때 적절한 대처를 하면 되겠지.
***
촬영을 시작하고 1시간이 훌쩍 넘었을 무렵.
니시코리는 출연진들에게 한창 테니스 교습을 해주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들을 가르치는 게 처음인지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많이 답답한 것 같았다.
하긴 유년기 시절부터 수재들과 천재들이 잔뜩 모인 닉 볼리티에리 아카데미에서 시간을 보냈으니 운동의 자질이 제로에 가까운 일반인이 어떤지 경험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하하······. 잠시만요.”
도저히 안 되겠는지 힘 빠진 웃음을 흘리며 휴식을 요청하는 니시코리.
그러다가 그는 좋은 방법이 떠올랐는지 환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한쪽 방향으로 빠르게 돌렸다.
아무래도 지금 상황을 해결할 좋은 방법을 찾은 모양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불길한데······.’
저벅저벅
지혁은 니시코리와 눈을 마주치고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이 상황에서 의미심장한 미소가 의미하는 건 너무나 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나 좀 도와줄래?”
부탁을 듣자마자 바로 거절의 말을 하지 못하고 멈칫하는 지혁.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단칼에 끊어냈겠지만 니시코리는 이때까지 워낙 도움을 많이 주었기에 냉정하게 행동하는 게 망설여졌다.
그랜드슬램에서 자신의 일정을 일부로 비워놓고 경기 파트너까지 되어준 상대를 어떻게 무시할 수 있겠는가.
도리를 떠나서 앞으로 얻을 이득과 관계를 위해서라도 그런 짓을 하는 건 손해였다.
“하아···. 알았어요.”
“하하하. 너라면 승낙할 줄 알았어. 고마워!”
니시코리는 손쉽게 승낙을 얻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어깨동무를 하며 코트 쪽으로 안내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PD는 내심 바라던 엄청난 기회가 정말로 손에 쥐어지자 기쁨을 감추기 힘든 듯 입이 귀에 걸렸다.
어마어마한 몸값 때문에 감히 섭외 요청을 하지 못했던 거물이 자신이 기획한 방송에 공짜로 얼굴을 비추는데 멀쩡하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꺄악! 니시코리상이 골든 보이를 데려오고 있어!”
“그럼 왕자님에게 배울 수 있는 거야!?”
“말이라도 한 번 해봤으면 좋겠다······. 난 케이보다 지혁의 팬이거든.”
여성 출연진들은 지혁이 점점 다가오는 모습에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일본에서 인지도가 워낙 대단하기도 했지만 가장 큰 영향을 준 건 조각 같은 얼굴이 강하게 어필이 되었기 때문이다.
세계를 뒤흔드는 최고의 스포츠 스타가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남자배우보다 잘생겼는데 어떤 여자가 열광하지 않겠는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처럼 느껴져서 접근하지 못했지 기회만 생기면 달려들 사람은 얼마든지 널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