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비시즌기
지혁은 니시코리의 부탁을 듣고 출연진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세계에서 인정받는 스타를 눈앞에서 마주해서일까.
사람들은 좀처럼 흥분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멍한 표정을 지은 모습으로 한동안 시간이 지나간 것이다.
이들도 나름 일본에서 인기 있는 연예인인 걸 생각하면 상당히 재미있는 모습이었다.
“제가 힘들게 데려왔는데 지혁에게 직접 배워보고 싶은 사람 없어요? 만약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이런 행운을 잡지 못할걸요? 이 녀석의 재능을 생각하면 앞으로 더 유명해질 테니까요.”
니시코리는 자신과 다르게 잔뜩 긴장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먼저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그 말에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리는 출연진들.
곧이어 조용했던 실내 코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끄러워졌다.
“제가 지원할 게요!”
“저도요!”
“잠깐! 나이 순서로 결정해!”
“선배, 방금 멘트 최악이었어요. 공평하게 테니스를 배워본 적이 있는 사람이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러면 네가 제일 유리하잖아! 네 속셈을 내가 모를 줄 알아!”
프로그램이 예능의 성격을 띠고 있어서일까.
출연진들은 가벼운 분위기로 티격태격 다투는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결정권은 PD에게 달려있는 것 같았다.
최종적으로 다른 경쟁자들은 모두 재치고 여자 연예인들이 기회를 차지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너무나 뻔한 레파토리라서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니시코리의 돌발행동으로 멈췄던 지도가 다시 시작되었다.
“일단 라켓 잡는 법부터 알려드릴게요.”
지혁은 테니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당장 경기를 요구할 수 없어서 가장 쉬운 기초부터 가르쳤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자세 교정도 이루어졌다.
손목이나 다리 위치, 상체의 균형 등 전체적으로 엉망인 자세를 바로 잡으려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일이었다.
“조금 어렵네요···. 그래도 재밌어요!”
“이렇게 하는 게 맞죠?”
“오늘부터 제대로 테니스를 배워볼까······.”
여자 연예인들은 코칭을 받고 있는 와중에도 잠시도 쉬지 않고 재잘거렸다.
눈빛이 반짝반짝거리는 게 고작 선생님이 달라진 것만으로 아까 전보다 한층 집중력이 올라간 모습이었다.
휭! 통. 통. 통.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는 만족스러운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
공을 가볍게 던져주어도 아예 맞추지 못하거나 라인을 한참이나 벗어난 괴상한 샷이 계속된 것이다.
웬만하면 이해를 하겠지만 아무리 운동 감각이 바닥이라도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준이 아니었다.
‘일부로 그러는 거 같은데······. 한 명은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이 많은 사람들이 전부 그럴 리 없잖아. 아니, 그럴 이유가 없으니 내 착각인가.’
아이돌 멤버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귀여운 외모의 여자에게 몇 번이나 라켓을 쥔 오른손의 위치를 조절해주며 뭔가 이상함을 느낀 지혁.
그리 어려운 동작도 아닌데 자꾸 틀려서 진도가 거의 나가지 않는다.
사실 지금 상황의 진상은 조금이라도 지혁과 더 오래 있고 싶어 하는 출연진들의 욕심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빨갛게 상기된 모습으로 지혁의 얼굴을 몰래몰래 훔쳐보는 것에 온통 정신이 팔렸는데 처음부터 정상적으로 진행이 될 리 있겠는가.
솔직히 지도의 원래 목적이 뒷전으로 밀려난 건 이미 오래였다.
“아까 니시코리상이 하는 미션을 보셨죠? 리상은 얼마나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맞아! 저도 궁금했어요!”
“아마 훨씬 더 잘하실 거야. 리상이 랭킹이 더 높은 걸로 알거든. 제 말이 맞죠?”
그렇게 지도를 하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도중 니시코리가 했던 미션에 대해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아무래도 그녀들은 일본에서 라이벌로 밀고 있는 두 사람이 대결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한 것 같았다.
물론 냉정하게 비교했을 때 지혁과 니시코리는 같은 급으로 묶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본 언론에서 마케팅을 목적으로 워낙 대결 구도를 만들어놔서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이들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앤디 머레이가 영국의 언론과 팬을 등에 업고 빅4에 들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음. 니시코리와 똑같은 조건이라면 적어도 70%는 자신 있어요.”
““와!“”
깜짝 놀란 표정을 하며 존경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여성 출연진들.
직업 특성 탓인지 리액션이 정말 좋다.
칭찬에 익숙한 지혁마저도 어깨가 으쓱해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아마 70%도 보수적으로 잡은 수치라는 걸 알았다면 더욱 큰 반응이 돌아왔을 것이다.
코트 밖에서 그 모습을 구경하던 코치들은 마치 자기 일인 것 마냥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그녀들의 반응이 귀여웠던 모양이다.
약간 얄미운 짓을 해도 얼굴이 예쁘니 대부분의 행동이 용납이 되었다.
아마 그걸 잘 알고 있어서 거리감 없이 친근하게 다가오는 거겠지.
“그러면 시범을 한 번 보여주시면 안 돼요?”
지혁은 주변에서 두 손을 모으고 부탁하자 어떻게 할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상황에 따라 무례한 부탁일 수도 있었지만 정작 말을 꺼낸 당사자가 조마조마한 얼굴로 눈치를 보고 있는 터라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평균만 해도 그림이 괜찮게 나올 것 같은데 해볼까?’
방송에 나가면 포인트를 제법 얻을 가능성이 보여 꽤 유혹적이었다.
득실을 따져보면 뭐든지 하는 게 나았고 말이다.
‘들이는 노력을 생각하면 무조건 이득이겠네. 제대로 된 출연료를 못 받아도 포인트가 충분하고도 남을 보상이 되어 줄 테니까.’
“재밌을 것 같으니까 그러죠. 할 수만 있다면요.”
“”와!!“”
지혁이 승낙의 말을 내뱉자마자 여성 출연진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기쁨의 목소리를 내었다.
그냥 지나가듯이 내뱉은 말이 흔쾌히 받아들여질 줄 몰랐는지 놀란 기색이 역력하다.
웅성웅성.
코트 밖에서 촬영을 하고 있던 촬영팀은 예상 밖의 수확에 웅성거리며 한 곳에 시선을 전부 집중시켰다.
가장 중요한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이후의 일은 PD에게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시청률에 도움이 될 이벤트를 거부할 바보가 아니었기에 사전 준비는 엄청난 속도로 처리되었다.
표적지를 옮기는 스태프들의 동작이 이전보다 두 배는 더 빨라진 것이다.
***
장애물들을 치우고 표적지를 배치하는 준비가 모두 끝난 이후.
코트 위에는 지혁 혼자만 남아서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와, 이렇게까지 도와준다고? 내 생각을 해서 그런 거야?”
니시코리는 구경을 하려고 마음먹은 건지 가장 좋은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비교가 될 게 분명했지만 그런 사소한 건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평온한 얼굴이다.
역시 단단한 멘탈을 가지고 있기로 유명한 선수다운 모습이다.
어지간한 선수였다면 신경이 쓰여서 표정 관리가 힘들었을 텐데 말이다.
“그냥 재미 삼아서 해보려고요. 솔직히 니시코리도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잖아요? 열심히 새워놓은 기록이 깨지게 될 테니 미리 위로를 해둘게요.”
“훗. 쉽게 생각하는 거 같은데 막상 해보면 간단하지 않을 거야. 경험자로서 미리 말하는데 중반이 넘어가면 너라도 실패할 걸.”
“글쎄요. 결과가 나오면 누가 맞는지 알게 되겠죠.”
잠시 후면 미션이 시작되지만 전혀 긴장이 되지 않는지 장난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두 선수.
지혁은 준비가 되었다는 확신이 들자 심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 아웃이 애매한 경우 아마 이 사람이 최종적인 결론을 내려줄 것이다.
호크 아크가 있으면 심판도 필요 없겠지만 그런 비싼 기계를 일개 촬영팀이 가지고 있을 리 없었다.
삐-
약속대로 신호음이 들리고 곧이어서 쾅!!하는 굉음이 이어졌다.
오오오오!
시작부터 니시코리의 전력을 뛰어넘는 속도로 떨어진 서브.
주변이 호들갑을 떨고 있긴 해도 사실 이 정도는 힘을 빼고 친 거나 다름없었다.
[207km/h]
“허······. 감독님 진짜 장난이 아닌데요? 니시코리가 180km후반에서 190km초반이었죠? 골든 보이라고 하더니 이름 값을 제대로 하네요. 정말 명불허전이에요.”
“괜히 세계 최고의 재능이라는 별명이 붙었겠어. 페더러와 나달을 이긴 선수니까 이 정도는 당연히 해줘야지.”
스태프들은 시작부터 심상치 않은 상황이 연출되자 더욱 커진 기대를 가지고 촬영에 집중했다.
감독도 담담한 듯 말을 했지만 정작 얼굴은 입이 찢어져라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금 이 모습을 TV로 방영하면 시청률이 폭발하는 건 시간문제였기 때문이다.
쾅!! 쾅!! 쾅!!
가장 큰 표적지부터 하나씩 처리해 나가는 지혁.
에러를 하나도 허용하지 않는 모습에 니시코리는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초반에는 비슷한 결과를 얻었으니 이 정도는 충분히 예상 범위 내의 일이었다.
[211km/h]
[214km/h]
[218km/h]
[223km/h]
그렇게 5번 연속으로 서브를 정확한 위치에 맞추는 게 성공했을 무렵.
스피드건에 찍힌 속도는 막 220km를 돌파했다.
촬영팀은 그 무시무시한 광경에 소름이 돋은 건지 몸을 가늘게 떨었다.
‘이만하면 몸은 충분히 풀린 것 같네. 슬슬 전력을 다해볼까.’
물론 정확도를 생각하면 더 이상 속도를 높이지 않고 유지하는 게 가장 좋았다.
위력이 높아질수록 자연히 컨트롤도 하락하는 게 정상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게 걸려있는 것도 아닌데 소극적으로 행동하는 건 지혁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적당히 할 거면 시작도 하지 않았어.’
“하앗!”
쾅!!
지혁은 미션에 들어서고 처음으로 기합을 지르며 라켓을 휘둘렀다.
그러자 이때까지 보여줬던 것과 차원이 다른 서브가 표적지에 쿵!!하고 포탄처럼 내려 꽂혔다.
“”······.“”
[230km/h]
너무 빠른 속도 탓에 궤적을 놓친 건지 눈만 끔뻑이는 사람들.
니시코리도 이번 서브를 보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는지 무표정한 얼굴에서 미세한 경련이 보였다.
“······저런 걸 표적지 안에 꽂아 넣는다고? 난 190km짜리를 넣는 것도 힘든데 해도해도 너무하는군.”
그는 새삼스럽게 타고난 재능의 격차를 체감했다.
서브 속도를 내려주는 건 하늘이라는 말이 있는 만큼 고속 서브는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다.
키가 작은 선수들이 대부분 서브가 아니라 수비에 집중했으니 이건 수십 년에 걸쳐서 증명된 사실이었다.
와아아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한 박자 늦게 쏟아져 나오는 환호성.
여자 연예인들은 지혁의 화려한 모습을 보고 완전히 사랑에 빠진 눈빛을 보냈다.
188cm의 장신이 예술품처럼 움직이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거기다 잘생긴 외모가 뒷받침되니 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출연진 중 한 명은 무언가 결심한 건지 지혁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녀의 정체는 미션을 부탁해서 지금 상황을 만들어낸 아이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