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슬럼프?
페더러와의 경기는 빅4들 끼리 붙는 슈퍼 매치 치고 싱겁게 끝났다.
이미 지혁의 전반적인 실력이 황제를 완벽하게 넘어섰기 때문이다.
물론 몇몇 기술적인 부분은 아직 부족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였다.
아무리 레전드라고 해도 페더러는 이미 하락세에 들어간 선수였으니 말이다.
[흙신 나달, 롤랑 가로스 준결승에서 조코비치를 3-1로 완파. 런던 오픈의 최종 라인업은 이지혁과 라파엘 나달.]
[클레이의 제왕이 드디어 돌아왔다. 최근 그랜드슬램 2연승을 달성한 무결점이 경기 중에 완전히 압도당해.]
[자신의 완패를 인정한 조코비치, 인터뷰에서 나달의 경기력에 존경을 표해.]
[골든 보이와 흙신의 리매치에 전 세계 테니스 팬들의 관심이 쏟아지는 중.]
[탑랭커들 대부분은 나달의 승리에 손을 들어주고 있어.]
지혁은 나달이 준결승에서 승리함과 동시에 쏟아져 나오는 기사들을 찬찬히 읽고 있었다.
“역시 나달이 올라왔구나···.”
이건 예상했던 상황들 중 가장 최악의 경우였다.
클레이에서 나달과 경기를 할 바엔 차라리 조코비치를 상대하는 게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롤랑에서 나달이 쌓아놓은 업적은 어마어마했다.
“컨디션이 엄청 좋은 것 같지? 아무래도 이번엔 요행을 바라긴 힘들겠어.”
코치는 순수한 경기력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평가를 내렸다.
그리고 지혁도 그 말에 100% 동의했다.
전성기에 들어선 조코비치를 압도할 정도의 실력이라면 절대 쉽지 않은 상대였다.
“솔직히 저번 호주 오픈보다 더 까다롭게 느껴지네요. 고생 좀 하겠어요.”
“응? 오랜만에 약한 말을 하네. 작년에 세계 랭킹 1위를 찍고 이제 이런 모습은 볼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상대가 그 나달이니까요.”
“그래도 라이벌은 많을수록 좋아. 대회의 인기와 활력을 엄청 북돋아 줄 수 있으니까. 특히 빅4의 경기들은 모두 빅 매치로 분류되잖아.”
“저도 다른 탑랭커들보다 빅4랑 붙는 게 더 재밌어요. 전력을 다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 4~5년만 지나면 지금 같은 긴장감도 못 느낄 거야. 지금 많이 즐겨두라고.”
확신한다는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하는 코치.
그는 빅4들이 30대에 들어서면 지혁이 테니스계를 완전히 지배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건 미래의 유망주들 중에 지혁을 상대할만한 선수가 나오지 않을 거라는 뜻이었다.
오만한 말이었지만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같은 생각인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상식으로 지혁 같은 괴물이 다시 나올 리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롤랑에서 나달을 꺾고 확실히 매듭을 짓자. 그러면 클레이의 제왕이라는 별명도 빼앗을 수 있을 거야.”
“네. 캘린더 그랜드슬램을 달성하려면 이건 반드시 넘어야 할 과정이니까요.”
지혁은 이때까지 어떤 선수도 달성하지 못한 대기록을 자신만만하게 화제에 올렸다.
코치들은 캘린더 그랜드슬램이라는 단어에 잠깐 동안 벙쪘지만 따로 반박하진 않았다.
자신이 담당하는 선수가 포부를 크게 잡을수록 좋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요즘 추세와 지혁의 성장 속도를 보면 못할 것도 없었고 말이다.
***
다음 날, 롤랑 가로스 결승전.
여건상 경기장에 오지 못한 국내의 팬들은 경기가 시작하기 한참 전부터 중계방송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많이 남아서 그럴까, 테니스 커뮤니티는 평소보다 훨씬 활발하게 불타고 있었다.
상대가 나달인 이상 오늘 경기는 며칠 전, 페더러와 했던 싱거운 대결과 다를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ㅡ 엄청 기대된다 ㅋㅋ 조코비치가 아닌 게 조금 아쉽지만 이 대진도 꿀 매치지 ㅋㅋㅋㅋ
ㅡ 시간 끌지 말고 빨리 시작해라!! 기다리다가 목 빠지겠다!!!!
ㅡ 클레이 본좌들의 대결이라 이번 결승전은 명경기 확정일 듯. 잘하면 올해 베스트 경기에 들어갈 수도 있을 걸.
ㅡ 그런데 이제 나달도 퇴물 아닌가? 3년 연속으로 롤랑에서 우승 못하고 있잖아.
ㅡ ㅇㅈ 재작년에는 이지혁, 작년에는 조코비치한테 져서 거품 엄청 빠졌지. 솔직히 흙신이라는 별명 반납해야 한다.
ㅡ 그건 2009년에 나달을 시즌 아웃시킨 무릎 부상 때문에 그런 거지 ㅡㅡ 올해는 무조건 다를 거임. 너희들 조코비치 털리는 거 못 봤냐?
ㅡ 이지혁도 조코비치한테 통산 전적 밀리는 거 알지? 오늘 뒤졌다고 보면 됨.
ㅡ 응 며칠 전에 페더러는 더 심하게 털렸어. 누가 봐도 이지혁이 한 수 위임. 그냥 랭킹 보면 알잖아?
ㅡ 아직도 나달을 빠는 얘들이 있네. 이래도 손절 안 해? 독하다 독해 ㅋㅋ
팬들이 결승전의 결과를 두고 치열하게 싸우고 있을 때.
어느새 선수들이 코트에 입장하고 경기를 시작할 시간이 되었다.
준비 운동 겸 랠리가 시작되자 소란스럽던 커뮤니티는 정전이 일어난 것처럼 조용해졌다.
괜히 댓글을 쓰는데 집중하다가 중요한 장면을 놓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플레이어 레디. 서브 리.]
그렇게 네트 앞에서 동전을 던진 결과 첫 번째 서비스게임은 지혁의 순서로 돌아갔다.
초반부터 기선 제압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자 지혁의 팬들은 속으로 환호를 터트렸다.
조코비치처럼 서브가 느린 선수라면 이게 별 의미가 없겠지만 빅 서버에게는 서브권이 정말 중요했다.
그래서 탑랭커들이 먼저 서비스게임을 가져가는 것을 선호하는 거고 말이다.
쾅!!
지혁은 상체를 활과 같이 곡선으로 만들며 라켓을 강하게 휘둘렀다.
시작부터 전력을 다하는 게 쓸데없는 탐색전을 할 생각이 없다는 태도였다.
탕!!
감각이 물 오를 대로 오른 건지 어려움 없이 리턴에 성공하는 나달.
고작 한 동작 뿐이었음에도 지혁은 경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이걸 이렇게 간단하게 받는다고? 대체 컨디션이 얼마나 좋다는 거야.’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첫 포인트부터 랠리가 무지막지하게 길어진 것이다.
선수들이 탐색전을 할 목적으로 적당히 한 게 아니라 모든 전력을 다하고 있었기에 더 놀라운 상황이었다.
보통 컨디션과 경기 감각이 절정에 도달해야 이런 장면이 나왔다.
““······.””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광경에 침을 꿀꺽 삼키는 관중들.
그렇게 숨을 쉬지 못해 호흡이 곤란할 지점이 왔을 지점이 도달했을 때, 그토록 기다렸던 위닝샷이 나왔다.
그림 같은 나달의 포핸드 위너였다.
와아아아아!!
리버스 포핸드를 이용한 환상적인 빌드업에 경기장은 팬들의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아무래도 시작부터 이런 명장면을 본 게 꽤나 기쁜 모양이었다.
아직 경기가 한참이나 남아있었으니 말이다.
지혁은 경기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에 띄게 표정이 굳었다.
거칠어진 호흡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을까.
서비스게임이 다시 시작했다.
탕!! 탕!! 탕!!
지혁과 나달은 포인트를 한 번씩 주고받으며 치열한 대결을 벌였다.
그리고 몇 분 후, 1게임의 승부가 가려졌다.
[게임 나달 1-0.]
경기의 결과는 충격적이게도 나달의 승리였다.
웅성웅성.
급격히 소란스러워지는 관중석.
웅성거림은 선수들이 코트를 교체할 때까지 계속 지속되었다.
“와. 벌써 브레이크가 나온다고? 진짜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나달이 골든 보이의 상대법을 단단히 준비했나 봐. 의외로 싱겁게 끝날 수도 있겠는 걸?”
“설마. 리는 쉽게 무너지는 선수가 아니잖아. 그라면 분명 명경기를 보여줄 거야.”
“음······. 확실히 아무것도 못하고 패배하는 경기가 없었긴 하지.”
“아마 기대해도 실망하진 않을 거야. 그는 과거의 페더러처럼 슈퍼 스타의 자질을 가지고 있거든.”
“메이저 대회 결승전에 올라오면 무조건 승리하던 때를 말하는 거구나.”
“맞아. 그가 가장 유력한 차기 황제로 꼽히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지.”
그들의 말대로 이후의 경기에서 지혁은 나달에게 거의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브레이크를 되갚아주는 등 최고의 경기력을 발휘한 것이다.
덕분에 선수들은 1세트부터 힘들어 죽을 지경이었지만 정상급 탑랭커의 대결을 보고 있던 관중들과 시청자들은 신이 났다.
[게임 나달 6-6. 타이브레이크.]
결국 1세트는 정해진 스코어 내에 승부를 보지 못하고 타이브레이크에 들어갔다.
ㅡ 아니 나달 왜 이렇게 잘하냐? 1세트 중반부터 이지혁 전매특허인 슈퍼 플레이도 간간히 나오고 있는데 타이브레이크까지 간다고?
ㅡ 내가 요즘 라파엘 나달 실력 미쳤다고 했잖아. 그리고 괜히 흙신이라고 불리는 줄 아나. 지난 몇 년 동안 부상 때문에 고생해서 그렇지 제대로 하면 클레이에서 무적임.
ㅡ 페더러 전성기 시절에도 두들겨 팬 게 나달이다. 이제 실력 전부 되찾았으니까 롤랑 가로스 우승 트로피도 제자리 찾아갈 거임.
ㅡ 이지혁 따라 입문한 테린이라 이때까지 나달 소문만 들었는데 진짜 괴물 잘하네···. 저게 사람이 맞긴 한가.
ㅡ 더 놀라운 건 지금 경기가 동점이라는 거임 ㅋㅋㅋ 이러니 탑5 아래 랭커들이 힘을 못쓰지 ㅋㅋㅋ
ㅡ 빅4 전부 은퇴할 때까지 그랜드슬램 강점기임 ㅋㅋ
[서브 리.]
타이브레이크는 선수들이 생각을 정리할 여유도 주지 않고 시작했다.
서브를 2번씩 번갈아가며 하는 단기전은 지혁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했기에 중계방송을 해설하고 있던 전문가들은 은근히 지혁의 손을 들어주고 있었다.
정말 조금만 방심하면 순식간에 1세트의 승부가 갈리는 터라 선수들의 집중력은 건드리기만 해도 베일 것처럼 날카로워졌다.
쾅!!
[폴트!]
“챌린지!”
아슬아슬하게 T존을 때리는 퍼스트 서브에 폴트를 선언하는 체어 엠파이어.
지혁은 그 판정을 오심이라 생각하고 곧바로 챌린지를 요청했다.
롤랑 가로스는 클레이 코트 특성상 호크 아이 시스템이 없었기에 심판은 T존에 남아있는 자국을 직접 육안으로 확인하기 위해 코트 안으로 빠르게 달려왔다.
그렇게 바닥에 엎드려 바운드 흔적을 확인하던 심판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결론을 내렸다.
[폴트!]
원래의 판정이 그대로 이어지자 지혁의 표정은 급격하게 나빠졌다.
‘오심인 것 같은데······. 내가 보는 각도에서는 분명히 들어갔단 말이야.’
정확도가 높은 호크 아이라면 지혁도 얌전히 승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클레이 경기의 오심률은 어마어마하게 높았다.
절레절레.
나달은 순순히 결과를 받아들이라는 듯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심기를 자극하는 그 행동에 멘탈이 단단한 지혁도 열이 조금 받았다.
[더블 폴트! 나달! 1-0.]
중요한 타이브레이크의 스타트가 꼬인 영향일까. 지혁은 오랜만에 더블 폴트를 저질렀다.
퍼스트, 세컨드 서브 성공률이 유독 높은 선수답지 않은 실수였다.
‘아니, 이제 나한테 심리전까지 걸어? 도대체 얼마나 이기고 싶은 거야.’
지혁은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흘리며 리턴을 준비했다.
타이브레이크는 첫 서브 후, 2번씩 서브를 주고받았기 때문이다.
‘경기 초반에 브레이크를 갚아준 것처럼 당한 걸 그대로 돌려주자. 단기전이라면 충분히 가능해.’
아무래도 1세트를 이겨야 지금의 분이 조금은 풀릴 것 같았다.
나달은 눈에 띄게 붉어진 얼굴로 베이스라인으로 달려가는 지혁의 모습에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후에 벌어질 일들을 전혀 걱정하지 않는 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