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 이세계 드래곤 [31] 4.인간이란.
-딩동 딩동-
며칠이 지난 방과후. 교실에선 수업이 끝나는 종소리가 시원하게 들렸다. 그와 동시
에 담임 선생인 채연이가 들어와서 종례를 시작했고, 대충 고3이라면 내신이 중요하
다는 것을 강조하며 시험이 앞으로 3주도 안 남았다고 신신 당부로 곧장 집으로 가서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만하고 끝내었다.
교실 밖에서 사미와 아리아를 만나고, 교문앞 나무앞에선 민지를 만났다. 그리고 오
늘도 오전 수업만 했었는지 혜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시험이 별로 안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담임 선생님의 신신 당부도 무시하며 오늘도 여
전히 그들은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그린벨트 지역으로 향했다. 여전히 이곳은 아름
다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뭐가 문제 있는 걸까나? 언니 지금은 좀 가르쳐 주면 안되?"
주위 경치를 구경하면서 사미가 혜미에게 그때 그 얘기에 대해 물어본다.
"미안하다 사미야. 나중에 알게 되니까, 그때 가서 알아도 늦지 않아. 그러니 말 할
수가 없어."
"흐음…."
그 일로부터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혜미의 입은 꿋꿋하게 닫아있으니 사미는
고개를 갸웃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졸라서 가르쳐 달라기도 그렇고 하니, 사
미로서는 답답하기만 했지만 언젠가는 알 일이라고 하니 그때까지 참기로 결정했다.
"어이! 영감! 얌전히 말하는 것 들으라니깐! 왜 안 듣고 지랄이야!! 우리들 뚜껑 열
리는 것 보고 싶은 거야!! 이곳을 모두 엎어서야 듣겠어!?"
"!!?"
노인네의 꽃밭에 다다를 때쯤, 건장한 중년의 남자의 으름장을 놓는 목소리가 들렸다
. 그들은 솔깃할 수밖에 없었고, 어느 곳에서 들리는지 찾았다.
"좋게 말할 때 듣는 게 좋아. 그러면 영감 재미없을 테니 말야."
목소리의 근원지는 다름 아닌 노인네의 꽃밭쪽에서 난 것이었다. 노인네의 꽃밭 근처
에는 검은 봉고차 한 대가 놓여져 있는 상태로, 덩치가 우락부락 건장한 남자 9-10명
정도가 보였고, 각각 무섭게 보이는 각목을 들고 있거나, 야구 방망이를 들고 있었다
. 한눈에 딱 봐도 그들은 어느 조직의 일원 들 같았고,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노인네를 협박하고 있는 광경이었다.
"가만히 국가에서 주는 연금이나 받아먹으면서 편안한 노후생활이나 할 것이지 왜 이
런 쓸데없는 짓을 하면서 얼마 남지 않는 생명을 단축시키는 건데!?"
"쓴맛을 보고 싶지 않으면 가만히 우리가 하는 얘기 듣는 게 좋을 걸. 그래야 영감도
좋고, 우리도 좋으니까 말야."
"……."
그런 협박에도 불구하고 노인네는 대답이 없었다.
"왜! 대답이 없어!? 앙!? 좋게 말할 때 서명하란 말야!! 기어이 이 꽃밭을 망가뜨리
는 광경을 보고 싶다는 거야, 뭐야?"
움컥 노인네의 멱살을 움켜쥐어 잡으며 어떤 종이 쪼가리를 들었다.
"어쩜 저럴수가! 저거 정말 너무 한 거 아냐!!?"
해도해도 너무 할 광경이라 민지는 분노를 느끼며 성큼 성큼 그들 앞으로 다가가며
다짜고짜 손가락질을 했다.
"어이! 당신들 뭐 하는 거예요!? 노인을 공경하지 못할망정! 힘없는 사람한테 너무
한 것 아니에요!?"
"앙!?"
무섭게 쓰리 바락 인상을 팍 쓰며 느닷없이 나타난 민지를 노려본다.
"윽!"
보기만 해도 어린아이가 울어버릴 것 같은 무서운 얼굴 때문인지 민지는 지레 겁먹고
, 뒤로 한발자국 물러서진다.
"거기 정말 너무 하잖아요!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지만 좀 심한 행동 아닌가요!?"
민지가 물러가고 다음타자 사미가 나섰다.
"맞아요! 맞아! 너무해요! 너무!"
그리고 하나가 나섰다. 건장한 사내들은 눈썹이 꿈틀 움직이며 일제히 카이란과 그녀
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꼬마야 어른들의 일 방해말고, 집에 가서 엄마 젖이나 빨고 있어라."
"푸하하하핫! 그래그래! 얼른 엄마한테 젖이나 달라고 그래."
건장한 사내들은 그들을 보면서 크게 이죽거렸다. 상당히 무시를 당한 느낌이 오자
사미와 하나와 민지는 화로 인해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뭐예요!? 말 다했어요!?"
"당신들 말 실수 한 줄 알아!!"
"맞아! 맞아!!"
그녀들의 외침은 무섭기는커녕 마치 항의하는 목소리로 들릴 뿐이니 건장한 사내들은
씨익 웃기만 할 뿐 그 말들을 무시하며 다시 노인네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이 영감! 얌전히 우리말 듣는게 어때? 보아하니 저쪽에 있는 꼬마들과 연관 있는
것 같은데 말야. 제법… 아니, 엄청나게 반반한 여자들만 있어. 요즘 들어 영계가 끌
리던데 이참에 좀 바꿀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야."
보아하니 영감과 저들과 서로 잘 아는 사이라는 것을 느낀 건장한 사내들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저들을 연루시켜 이용하려고 했다. 마침 얼굴도 굉장히 반반하고도 하니
꽤나 군침도 돌았고, 이것은 단순한 협박이 아닌, 진심이 내포되어 있었다.
"킥킥킥! 맞아, 맞아! 죄 없는 저들이 당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면 좋게 말할 때
여기에 사인을 하는 게 좋을걸."
그들이 내민 종이는 아무래도 무슨 계약서 같았다. 대충 보아서 땅을 포기하는 그런
계약서의 일부분인 것 같았다.
"으으으…."
마침내 노인네는 굳게 다문 입을 열며 신음성을 내질렀다. 저들이 있으니 이제는 가
만히 버티기만 하는 도리도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큭큭큭큭…."
씨익 그들은 비릿한 조소가 입가에 걸렸다.
"아니! 뭐예요!? 우리를 무슨 봉으로 아나본데요! 정말 큰코다칠 거예요!!"
자신들이 도구로 취급당해서 노인네를 협박하니 기분이 나빠질 대로 나빠진 사미는
양팔에 허리를 잡은 채 크게 소리쳤다.
"큭큭큭! 꼬마야… 거기서 얌전히 있어라. 나중에 너희들을 써야 할지 모르니 말야.
큭큭큭큭…."
그런 다부지게 말한 사미의 협박(?)하는 모습은 그들의 눈엔 귀엽게만 비칠 뿐이라,
더더욱 보기 싫은 조소가 입가에서 놀고 있었다.
"얘들아! 도망가거라! 나는 괜찮으니까, 너희들은 도망가!"
이윽고 노인네는 그들에게 도망가라고 소리쳤다. 그래야지 저들이 다치지 않고, 무사
히 이 일을 타개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이런이런… 그렇게 할 수야 없지."
눈짓을 스윽 하자 남은 건장한 사내들은 카이란의 주위를 에워쌌다. 도망가더라도 한
두 명만 잡으면 됐기에 뒤까지 막지는 않았다.
"흥! 이게 무슨 짓인가요!!?"
오히려 그런 광경에 콧방귀를 뀌며 사미는 전혀 위축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의외
의 모습이라 건장한 사내들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어차피 그들은 여자 다섯에 남자
하나밖에 없으니 문제 될 것은 없다고 여겼다.
"이 덩치만 큰 바보들아!! 차라리 고추 떼버려라! 떼러벼!! 치사하게 남자새끼가 되
어 가지고 연약한 아녀자들을 이용하려고 그래!? 이런 병신 쪼가리에 덩치만 큰 바보
들! 덩치가 아깝다 덩치가!! 차라리 이제부터 호모새끼나 계집애라고 이름 바꿔라!
그러면 내가 이해해 줄 테니까 말야!"
그런 그들의 행동에 분노가 치솟았는지 느닷없이 하나는 위풍당당 위세 있게 일갈하
기 시작한다. 덕분에 건장한 사내들은 얼굴 살이 일그러지며 상당히 자존심에 금이
가지는 표정들을 그려내기 시작했고, 하나의 외침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이 바보에 멍청함에! 하나하나 구제 불능의 찌끄러기 얼뜨기 같은 놈들아!! 그런 노
인네를 괴롭히는 그 똥씹은 낯짝이나 한번 구경하자! 그래야 나중에 사내자식들 중에
이런 인간 말종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상당히 모욕적인 말을 내뱉은 그녀! 참으로 멋있게 보였지만…….
"어이어이… 그런 말을 내뱉으려면, 좀 앞으로 나서서 하는 것이 낫지 않겠냐? 그래
서 내 뒤에서 내뱉어봐야 효험이 없다고."
…빼꼼히 카이란의 등뒤에 숨어서 얼굴만 내민 채 소리치고 있다는 것이 문제랄까?
"그래도 무서운걸…."
혀를 쏙 내밀며 어색한 웃음을 보였다. 어쩔 수 없는 녀석이라는 듯이 카이란은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뒷머리를 긁적인다. 그나마 하나가 간덩이 붓게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던 이유는 카이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그는 강하
다고 했다. 그것도 상당히 말이다. 대계 소문을 듣거나 사미의 말에 의하면 저런 놈
들 20명이 몰려와도 상처 하나 없이 말끔 깔끔하게 해치 울 수 있는 녀석이라고 했다
. 분명 그런 녀석이니 저들이 다 덤벼도 그가 해치울 수 있을 거란 확신으로 그렇게
신경이 거슬린 소리를 맘껏 내뱉을 수 있던 거였다.
참고로 말하자면 그가 있었기에 그런 말 한 것이지… 만약 그가 없었다면 이런 일이
벌어져도 그냥 모른 척 쌩까며 가던 길로 갈 평범한 여성이었을 것이다.
"오호! 말 다했냐? 이런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계집애들이 어딜 주둥아리 놀리고 (
삐리리)야!! 성과가 좋으면 내버려두려고 했건만 아무래도 뜨거운 어른의 맛을 봐야
알겠군!!"
"그래! 그래야겠지!! 먼저 손봐주는 것도 괜찮겠어!!"
그녀의 일갈의 효험이 지난친 탓에 두 놈이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카이란에게 달려가
고 있었다.
"이런 이런…. 다 너 때문이잖아."
상당히 여유있게 귀찮다는 듯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카이란은 자신의 뒤에 있는 하나
를 쏘아보았다.
"헤헷! 미안 미안… 어이어이! 앞을 봐! 위험하잖아!!"
하나는 손가락질로 앞을 가리켰다. 달려오고 있는 두 놈 중 한 놈이 주먹을 휘둘렀다
.
"여자들만 있으면 되니까, 우선 필요 없는 네 녀석부터 없애…!!"
남자는 필요 없다는 식으로 큰 소리 쳤지만 그놈은 말을 다 내뱉지도 못하고 저지 당
했다.
-퍼억!!-
멋진 뒤돌려 차기 한방에 저 멀리 날아가 버렸기에.
-휙!-
앗 한 사이에 동료가 당한 것을 본 남은 한 놈은 무식적으로 주먹을 휘둘렀고, 가만
히 나좀 때려줘 라고 맞아줄 그가 아니기에 휘릭 허리를 숙여 몸을 한 바뀌 돌며 가
볍게 피한 동시에 오른손으로 그놈의 관자놀이를 잡았다.
"끄아아악!!"
관자놀이를 움푹 잡은 채 그 큰 덩치의 거한을 마치 야구 방망이 카이란은 가볍게 들
어 올렸다. 한동안 그렇게 잡은 채 카이란은 스윽 주위를 둘러봤고, 아무에게나 그놈
을 냅다 던져 버렸다.
"좋게 말할 때 나한테 덤비지 않는 것이 좋을 걸."
카이란은 그들에게 그렇게 경고했다.
"이 자식이!!"
분노를 느낀 그들은 다시 덤비려고 했지만 어느 한 놈이 그것을 저지했다.
"이 새끼 힘은 X나게 장사네! 하지만 그것만이 단줄 아나!? 이 새끼 죽으려고 발악을
하는 구만!"
다들 카이란의 힘에 적지 않게 놀란 건 사실이다. 대충 봐도 카이란이 들어올린 거한
의 무게는 가히 70Kg 정도 나가는 놈이었다. 그런 놈은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잡은
채로 들어올린다는 것은 웬만한 장사로도 어림도 없었다. 덕분에 뒤에서 지켜보고 있
던 하나도 엄청나게 놀라기 마찬가지였다. 얘기만 들어선 신빙성이 없었는데 그 소문
이 사실이었을 줄이야… 딱 두 놈만 해치운 것뿐이지만 그의 몸놀림을 실제로 보니
충분히 믿을 만 했다.
"꼬락서니 보니 한 실력하고 있어서 튕기나 본데… 그래 좋다! 그냥. 가라. 지금 우
리가 하는 것은 일.이.니.까, 괜한 참견하지 말고 얌전히 집으로 돌아가서 공부나 하
고 있어. 그게 우리의 마지막 경고니까 말야! 알았어 새꺄!?"
그 정도 몸놀림과 실력이라면 여자들을 도망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분석한 그놈은
그냥 이들을 보내주기로 결정했다. 상대는 단 한 명이라 상대 못할 것은 아니지만 적
어도 2-3명은 다칠 것 같아서 그냥 보내주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자신네들이 숫자가
많다는 듯이 강요하듯 그는 상당히 오만한 발언이었다.
"그래?"
사실 도와주고 싶은 맘은 없었다. 저들이 하는 일은 딱 봐도 저 노인네에게 이 땅을
팔라는 협박에 당하는 것뿐이었다. 무슨 이유 때문에 팔라는 것은 자신이 알 바 아니
다. 단지 인간이란 뭐든 쉽게 질리기 마련이니, 저 노인네도 분명 저 꽃을 가꾸는 것
도 앞으로 반년도 안 갈 거란 것을 느꼈기 때문에 도와주고 싶은 맘이 없는 것 뿐이
었다. 어차피 반 년 후에 그만 둘 것 지금 그만두는 것 뿐이니까.
"어떻게 할까?"
하지만 그것은 카이란의 의지와 생각일 뿐이고, 다른 그녀들은 분명히 다르니 그녀들
의 존중을 물어봤다.
"당연히 도와줘야 줘!!"
"네가 사람이라면 당연한 것 아냐!?"
"백성님 부탁해요."
"이대로 간다면 알아서 해! 평생 오빠 얼굴 안보고 영원히 삐칠테니까 말야!"
말의 내용은 다 달랐지만 내포된 의미는 하나같이 같았다.
"아아∼ 이런이런 귀찮은데……."
귀찮다는 듯이 입살을 찌푸리며 윗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린다.
"백성군."
다들 도와달라고 외치는 목소리 사이에 근엄한 혜미의 목소리가 파고 들어왔다. 그는
혜미에게 시선을 두었고, 그녀는 말했다.
"부탁해요."
"……."
그녀도 다를 바 없는 대답이었지만 대부분 노인 공경과 아는 인간이니 당연히 도와줘
야 정상이지 하는 말투로 내뱉는 반면 혜미에게만 또 다른 의미로 도와달라고 말하니
어쩔 수 없이 카이란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건장한 사내들을 보았다.
"이런 이유로 그럴 수가 없군."
으쓱 어깨를 한번 들썩였다. 마음에 들든 안들은 그녀의 말은 거절하기 힘드어 결국
그는 노인네를 도와주기로 결정했다.
.. "이 새끼 이 형님들의 경고를 하는데… 그것을 무시해!?"
자신 있는 말투로 덤비겠다고 하니 상당히 기분이 상했다. 그냥 갔었으면 좋았을 것
을… 꼭 명을 단축시키고 지랄이야!
"네놈이 얼마나 싸움을 잘하는지는 모르지만 네놈 혼자서 9명을 이길 수 있을 것 같
아!? 뭘 보나 네놈은 당하기 마련이야. 하여튼 네놈 같은 놈은 좀 맞아봐야 정신을
차릴 놈이라니깐."
그놈의 쪽수타령… 정말 지겹다. 이놈의 인간들을 보면 언제나 쪽수가 우세하다는 이
유만으로 위세를 떤다. 카이란은 하도 많이 들어서인지 진절머리가 나서 두통까지 올
정도로 지겨웠다. 덕분에 관자놀이를 누르며 아픔을 호소했다.
"아…!"
문득 뇌리에 좋은 생각이 스치는 것이 있었으니… 그는 손을 딱하고 쳤다.
"잠깐!"
성큼 성큼 다가오는 건장한 사내들을 향해 카이란은 손을 뻗었다. 그들은 눈썹이 씰
룩 움직이며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큭큭큭… 이렇게 다가가니까 무섭냐? 하지만 이제 늦었으니 빌어봐야 소용없다. 조
용히 제사나 치를 준비나 하고 있어라."
큭큭큭 짙은 웃음을 내뱉으며 그들은 지레 겁먹은 줄 알고 있는 카이란을 향해 조소
를 뿜어냈다.
"그런 것은 아니니까 웃기지 말아라. 야, 말꼬랑지."
"에? 나?"
느닷없이 카이란은 하나를 불렀다.
"말꼬랑지가 너밖에 더 있냐?"
"왜 불러?"
말꼬랑지라는 말 때문에 절로 기분이 나빠져 퉁명스런 대답이 나와버렸다. 카이란은
그런 말투 신경 쓰지 않고 볼일을 말했다.
"니 핸드폰 좀 빌려줘 봐."
"에? 핸드폰?"
느닷없이 웬 핸드폰? 하나는 고개를 갸웃 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여기 있는 사람
들 중 자신밖에 핸드폰이 없으니 빌려달라는 것은 이해가 가나, 지금 이 상황에 어딜
전화한다는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잔소리말고 빌려주기나 해."
"어? 어‥ 알았어."
하나는 순순히 자신의 수중에 있는 핸드폰을 카이란에게 주었다.
"땡큐!"
핸드폰을 받자마자 카이란은 덥혀져 있는 폴더를 열어 어떤 곳에 전화를 하기 시작했
다.
"큭큭큭… 장사치를 장의사에게 전화라도 거는 거냐? 하긴 미리미리 예약을 해 두는
것이 편하겠지."
누굴 바보로 아나? 큭큭 거리면서 그런 농담을 하니 카이란으로써 심히 기분이 불쾌
했기에 전화를 받으면서 기압권을 쏘아 날려버렸다.
-퍼억!!!-
"으억!!"
평범한 인간은 당연히 보질 못하니 그놈은 속수무책 무방비로 정면으로 맞아 날아가
버렸다.
"뭐, 뭐지?"
어리둥절…! 그들은 잘 서있던 동료가 이빨까지 나간 채 느닷없이 뒤로 날아가면서
쓰러지자 당황하는 기색들이 역력했다. 분명 저 녀석과 동료와의 떨어진 거리는 불과
10미터 정도였지만 그 정도 거리라면 무슨 수작을 부려도 모두 보일 거리였다. 그런
데도 단지 팔 한번 뻗었을 뿐(그것도 살짝!)이었는데, 무슨 충격 맞은 듯이 쓰러지다
니… 정말이지 귀신 곡할 노릇이었다.
"그래? 알았다."
그놈들이 자신의 동료가 쓰러진 것을 봐준 사이에 카이란은 전화 통화를 끝내었다.
덕분에 무슨 대화인지 하나도 듣지 못한 건장한 사내들이었다.
"여기, 전화 잘 썼다."
볼일도 다 봤으니 카이란은 다시 하나에게 전화기를 돌려줬다.
"어? 아∼ 그, 그래."
여기서 하나도 놀라긴 마찬가지. 분명 그가 한 짓은 아까도 말했다시피 팔 한번 뻗은
것이 다였다. 그런 동작 하나뿐이었는데 어떻게 앞에 있는 놈이 맞을 수 있는지 그녀
로서는 물리학적으로 이해가 가질 않았다. 무슨 초능력자가 아니고서야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하나의 반응은 이런데 다른 이들은 어떻겠는가? 애석하지만(?) 잠잠할 뿐이었다. 다
른 이들은 지금까지 카이란의 힘을 보아왔으니 언제부턴가 그가 하는 거라면 현실에
서 불가능한 것이라도 뭐든 할 수 있는 인간이라고 느껴버려졌는지 아무런 인식도 없
는 것이었다. 물론, 아리아는 무엇을 했었는지 알고 있으니 패스!
"이 새끼 뭔 짓 한지 모르겠지만 각오는 되어 있겠지!!?"
우두둑 우두둑 마디를 풀며 저마다 그들은 카이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어이어이! 바로 덤빌 예정이냐?"
"두말하면 잔소리! 이미 집에다가 유언을 전해줬으니 됐잖아! 우리 대원들의 원수를
갚아야 하지 않겠어!!?"
누가 들으면 누굴 죽여서 원수 갚는 것으로 착각할 대사였다. 참고로 말하자면 처음
뒤돌려 차기로 날아가 버린 놈과 관자놀이를 눌러 아픔을 호소했던 놈과, 방금전 기
압권을 먹여 날아갔던 놈… 모두들 쓰러지지 않고, 한꺼번에 카이란에게 달려나가고
있는 상태였다.
"쩝?"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카이란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상당히 여유있는 자세를 보였다.
"이 새끼 X나게 재수없게 여유부리네!!"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싸움을 하고 픈 의지가 사라질 정도였다. 지금 그들에겐 지
금 자신들을 무시하는 경향으로 보이니 자존심에 금이 가졌다.
"받아랏! 나의 번개 주먹!!"
한 주먹 불끈! 이 모든 분노를 이 주먹에 담으리라는 의미로 카이란의 안면에 휘둘렀
다. 이런 유치한 나부랭이! 카이란은 황당함에 다리가 휘청거릴 뻔했다. 혹시 이런
것을 노리고 말한 것은 아닐지 의심이 가게, 지금 그놈의 얼굴은 회심의 미소가 가득
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누구인가? 호랑이 굴에 정신만 차리면 산다라고 하지만 지금 그들
에겐 잠자는 호랑이 사자의 XX(또 뭘까?)털을 뽑으려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어도 한낱 인간 따위에게 안면을 허용할 어설픈 드래곤이 아니다.
"으랏샤!!"
지금쯤이면 묵직한 충격이 와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런 충격은커녕 허공을 가른 느
낌이라 중심을 잃을 뻔했다.
"아닛!! 어디!!"
두리번 두리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앞에 있는 녀석이 사라지니 그로썬 황당할 수 밖
에 없었다.
"여기다."
뒤편에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눈앞에 보는 이것은 누런 흙바닥이었다. 카이란이 두리
번거리고 있는 그놈의 엉덩이를 밀었기 때문이었다.
"이자식!!"
이번엔 오른쪽에서 또 다른 놈이 지금까지의 분노를 담은 야구방망이로 카이란의 몸
통을 향해 내려쳤다. 그의 시각에선 느릿느릿하게만 보이니 가볍게 허리를 숙여서 피
했고, 오른쪽 골반으로 툭 치며 그놈을 넘어뜨렸다.
"장난까나!!"
"죽여라!!"
"우워어어어어!!"
장난은 이제 그만 이라는 듯이 대량으로 한꺼번에 공격하기 시작했지만 쉽사리 카이
란은 맞아줄 위인이 아니었다.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고… 계속해서 그들은 카이란에
게 덤볐지만 처음부터 갖춰 있던 여유있는 모습으로 공격하는 것을 쉽게 피하기만 한
것이다.
이런 인간들 보내버리는 것은 카이란에게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웠다. 하지만 무슨
일 때문인지 그는 제대로 된 공격은 단 한번도 없었다. 단지 피하고 피하고 피하기만
할 뿐 턱을 날린다거나 이빨을 부러뜨린다거나 뼈를 분질러 버리는 그런 짓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것이다.
그가 단순히 하는 거라면 공격하는 것을 피하고 힘도 실지 않는 발로 그냥 밀어버린
다거나 장난삼아 뜀틀 뛰기 하듯 그놈을 넘어버리며 엉덩이로 미는 그런 짓 밖에 없
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모여서 장난치는 기분을 느낀다고나 할까나? 심지어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그녀들이 깔깔거리면서 웃기까지 보일 정도니 말 다했다고 볼 수 있다
. 고조된 분위기 속에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광경이 전혀 아니었다.
"이 새끼!!"
덕분에 그들은 자존심은 둘째치고 자신들이 놀이기구 취급당하는 느낌을 받으니 열이
하늘 높이 뻗쳤는지 눈깔이 부릅 튀어날 정도였다. 화가 난다고 해서 그가 맞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런 분노로 인해 그들의 움직임은 한층 둔해져버렸다.
-부릉!-
사미와 아리아가 있는 그녀들 뒤편에 자동차 엔진음이 미약하기 들리기 시작하더니
점점 이쪽으로 향하는 것 같이 소리가 커졌다. 혹시 이 싸움 때문에 경찰이 오는게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그녀들은 뒤를 돌아 무슨 차가 오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경찰
차는 아니었고, 검은색 봉고차였다.
"얼래?"
다가오는 차를 보자마자 사미는 의아한 탄음이 나왔다. 어디서 많이 봤다는 느낌을
받아서였다.
"어머나…."
눈치가 빠른 혜미답게 저 차의 정체를 단번에 안 그녀였다.
카이란도 뒤편에서 오는 차 소리를 들었다. 그녀들이 들었는데 그가 못들을 리가 전
무했다. 그래서인지 카이란은 여기서 이 싸움을 잠시 중단하기 위해서인지 약간의 마
나를 한쪽 다리에 모아 땅에 내리쳐 진각(震脚)을 발동 시켰다.
-쿠쿵!!-
진도 3정도의 지진이 일으킨 것 같이 땅이 흔들흔들 거리며 마나의 파동에 의해 카이
란 주위에 있는 흙먼지들이 위로 솟구쳤다.
"뭐, 뭐야!!?"
"웬 지진!!?"
지진은 흔들리기만 할 뿐, 절대로 모래같은 것이 위로 솟구치지 않는다.(본 필자는
경험해본 봐 있다, 참고로 말하자면 진도 3정도였고, 무척 재미있었다)
자욱한 모래는 서서히 바람에 휘날려 다른 곳으로 유량을 떠났다. 덕분에 시야가 확
트기 시작했고, 눈앞에 카이란이 없는 것이 보였다.
"이 시끼 튀었나!? 어디 있어!!?"
이때를 틈타 도망친 것 아닌지 분노감에 휩싸였다. 이렇게 놀림 당했는데 이대로 놓
쳐서 끝난다면 평생 울분으로 남으리라.
"튀긴 누가 튀어? 니들 눈앞에 있는데."
떡하니 카이란은 팔짱을 낀 채 아름다운 그녀들과 함께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 새끼! 어딜 도망치려고 그래!!?"
싸움을 하다가 다른 곳으로 가버렸으니 버럭 그들은 화를 내며 성큼 그쪽으로 향해
다시 덤비려고 했다.
"잠깐!!"
그가 손을 앞으로 내밀며 외치자 건장한 사내들은 멈칫 달려드는 것을 멈췄다.
"흐흐흐흐… 아무래도 무섭나 보지? 이제 봐주는 것 없이 널 처단하겠다. 이제 장난
은 그만이다!!"
입가에 씰룩한 미소가 걸려있다. 지금까지 농락 당했으면서 아직까지 그런 소리 할
수 있는가 보면 그들의 두뇌도 몸만큼 근육으로 이루어진가 보다.
"그래? 나도 이제 장난은 그만두고 싶어서 말야. 하지만 말야… 쪽수가 맞질 않잖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도 쪽수를 맞추려고."
"무슨 소리지?"
눈썹이 꿈틀 움직이며 그의 의미를 물어보았다.
"말 그대로다. 나도 응원군을 데려온다는 의미지."
"그래? 마음대로 해봐라. 큭큭큭… 데려와 봐야 고삐리에 햇병아리 녀석들일 테지.
우리가 무슨 보통 양아치로 보이는가 보지? 큭큭큭 웃기는 녀석이군."
"크하하하하하!"
그들은 유쾌하게 비웃어 주었다. 지금 그의 모습을 보면 영락없이 고삐리. 고삐리가
사람을 불러모아봐야 동네나 학교에서 싸움 잘하는 양아치 밖에 더 있겠는가? 10명을
데려와도 지금 앞에 있는 저놈만 조심하면 되지 다른 놈들이야 주먹 한방에 보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그래? 알았다."
카이란은 빙긋 입가에 짙은 미소를 그렸다.
"얘들아!!"
"넷! 형님!!"
카이란의 뒤편에서 우람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상대해 줘라!!"
두둥! 느닷없이 쫙 바진 검은 양복 입은 녀석들이 카이란과 그의 그녀들 뒤에서 대거
로 나타났다. 하나하나가 '험악'이란 단어와 잘 상반된 외모에 우람한 덩치를 지닌
이들… 다름 아닌, 그들은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카이란의 12인의 '똘마니들'이였
던 것이다.
카이란이 하나에게 핸드폰을 빌린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똘마니들을 부르기
위해서 빌린 것이었다.
지금까지 그들과 제대로 싸우지 않고, 장난을 한 이유는 딱 '두 가지'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똘마니들이 오고 있다는 것 때문에 건드리지 않는 '첫 번째' 이유다. 처음
부터 온전히 놔둬야 재미있지 벌써부터 먹이를 망가뜨리면 재미없기 마련이니까. 그
러니 장난을 치면서 시간을 보낸 것이다.
예전부터 한 실력에 우락부락한 덩치를 가진 똘마니들였으나 지금은 더더욱 우락부락
탄탄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된 이유는 한동안 운동을
해서 그런 것이지만 무엇보다 카이란이 똘마니를 봐주었기 때문이다. 아니, 봐주었다
기 보단, 할 일이 없었기에 똘마니들을 데리고 장난을 쳤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장난은 장난이 아니었다. 가히 가혹한 지옥훈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혹사했다. 카이란의 마법으로 만든 특수한 밴드 20kg짜리를 각각 팔과 다리에 끼면서
다니는 것은 기본이오, 30kg짜리 역기를 들고 운동장 20바뀌에 턱걸이, 산을 올랐다
내렸다하는 일은 가히 죽음을 맛보았다고 할 수 있었다. 무슨 초인을 만드는 것도 아
니고서야 이런 훈련은 정말이지 지옥과도 다를 바가 없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힘든 것도 힘든 것이지만 그들에겐 카이란의 저력에 놀라웠었다. 그 지옥훈
련에서 카이란은 놀고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자신들과 똑같이 함께 했던 것이었다.
40kg짜리 밴드에 30kg짜리 역기를 들고 운동장 도는 짓도… 턱걸이하는 것도 모두 말
이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뒤쳐지는 놈 있으면 엄청난 구타를 하기 위함이었다.
맞는거야 어쨌든, 똘마니들이 그렇게 놀라는 것은 무리도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같
이 운동을 했는데도 어떻게 땀 한방울도 흘리지도 나오지 않는지… 과연 인간일까 하
는 의심을 품을 정도로 놀라웠었다.
어쨌든, 그런 훈련덕분에 그들은 더욱 몸이 좋아졌다는 이유.
흐음∼ 오랜만에 나타났겠다, 몸도 좋아졌겠다, 새삼 뽀대라는 것이 느껴졌다.
-주륵-
그들은 눈물을 흘렸다.
"이놈들아 갑자기 왜 울고 그래!?"
멋있게 잘 등장했던 녀석들이 느닷없이 덩치 값도 못하게 눈물을 줄줄 흘리자, 카이
란은 어이가 없다.
"그게 말이에요… 형님, 기쁘잖아요. 우리가 몇 달만에 이렇게 등장했으니 너무나 기
뻐서 눈물을 흐르는 것 뿐이에요. 아직, 작가가 잊지 않고 이렇게 등장시켜주었잖아
요."
"소문에 들은 바로는 앞으로 완결도 몇 권 안 남았다고 하는데, 이런 채로 끝까지 나
오지 않고 끝내는 것은 아닐지 불안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등장하니 너무너무 기쁜 나머지…… 크윽!!"
이게 몇 달만에 나타났단 말인가!? 아! 감격 감격! 똘마니들은 또다시 기쁨 서린 눈
물을 자아내고 있었다.
"……."
역시 조연은 불쌍한 법인가 보다.
"시끄러! 사내자식들이 눈물이나 찔끔찔끔 짜고 말야!!"
그렇지만 카이란은 조연이 아닌, 주연! 것도 주인공! 그런 그들의 기분을 알 리가 없
으니 버럭 화를 내었다.
"크윽! 형님 너무합니다!"
그들은 눈물을 그칠 수 밖에 없었다.
"자 이제 상대해 볼까? 흐흐흐흐흐…."
빙긋 짙게 입꼬리를 올리며 똘마니들은 그들을 보았다. 이제 거한이라고 부르기에 적
당치 못한 그들은 똘마니들을 보며 기겁을 했다. 덩치… 아까도 설명했다시피 더더욱
몸이 불어 빵빵한 근육을 자랑한다. 얼굴… 세상에 마상에 이런 험악한 얼굴들 누가
당할 자가 있으랴.
"이 비겁한 녀석!! 쪽수가 다르잖아! 쪽수가! 우린 10명정도야! 저쪽은 12명이면 우
리가 훨씬 불리하다!!"
쪽수 많다고 우세 떨 때는 언제고… 이젠 자기네들이 쪽수가 작으니 항의하기 시작한
다.
"아… 그건 염려 마. 나는 이 싸움에 참전하지 않을 테니까 말야."
지금까지의 수련으로 얼마나 똘마니들이 강해졌는지 알고 싶었기에 가만히 지켜보기
로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가능한 얼마나 강해졌는지 알려면 가능한 상대자를 온전하
게 해야 하기 때문에 장난삼아 시간을 보낸 '두 번째' 이유다.
"그, 그것이 문제가……!!"
"그것이 문제가 뭐지?"
"으으으으…."
그들은 할 말이 없기에 신음성을 내질렀다. 사실 문제는 없다. 애초에 시작했던 싸움
은 유리한 자신들의 위치였지만 그것은 두 번째 문제였다. 지금 그들의 모습만 봐도
상당히 강하게만 보였다. 무슨 덩치들이 산만한지 보기만 해도 겁에 지를 정도였다.
그런 녀석들과 싸움을 하라면 이길 승산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그런 말
을 할 상황도 아니고, 자존심도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큭큭큭."
덩치를 보나 숫자를 보나 그들에겐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카이란은 그런
그들의 마음을 알고있어 즐거운 웃음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흐흐흐흐… 너희가 쪽수 많아봐야 우리 형님한텐 안 돼, 이 애송이들아! 덤빌 사람
이 없어서 우리 형님에게 덤비다니! 형님에게 맞는 것보단 우리들에게 맞는 것이 더
행복할 것이니 그것만이라도 다행이라고 여겨, 새끼들아!!"
뿌드득 뿌드득… 손마디를 두드둑 거리며 똘마니들을 짙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오
랜만에 몸 좀 풀 수 있다는 의미가 담긴 미소라 그들은 주춤 주춤 물러서고 있었다.
"자! 오랜만에 회포 좀 풀어보자!!"
"음하하하하하핫!!"
똘마니들의 간사하고 즐거운 웃음이 이곳저곳 퍼지며 그들은 그렇게 달려나갔다.
싸움은 싱겁게 끝날 정도의 수준이었다. 아니, 애초에 덩치를 보나, 실력을 보나, 쪽
수를 보나 그들에겐 승산이 없었으니 이것은 싸움이 아닌 일방적인 구타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그들도 마냥 당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도 끝까지 저항은 했었다. 하지만 그
것이 역부족일 뿐이었다. 주먹을 뻗어봐야 스치기만 할 뿐 맞진 않았다. 저런 덩치에
어떻게 그렇게 재빠른지 그들로써는 막막했다.
"이얍!!"
어느놈이 똘마니를 향해 주먹질을 가했다. 똘마니는 가소롭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리
며 가볍게 옆으로 피하고, 복부를 먹이자 먹은 것을 다 토해낼 정도로 엄청난 고통이
뇌리를 엄습했다.
"우엑!!"
주먹 안에 돌이라도 들었나!! 무슨 놈의 이렇게 주먹이 매운거야!! 라고 어디서 한탄
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똘마니의 주먹맛은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어이어이‥ 그렇게 한방에 떨어지면 안 돼지. 흐흐흐흐…."
그대로 환상의 맛만 보고 쓰러지려는 그를 향해 똘마니는 얄팍한 웃음을 내뱉었다.
벌써 쓰러지면 재미없기 때문에 똘마니는 고꾸라지는 그놈의 멱살을 잡아 억지로 일
으키며 엄청난 구타가 이어졌다.
"이야압!! 받아라 나의 번개 주먹!!"
카이란과 똑같이 또다시 유치한 대사를 읊으며 주먹질을 가했다. 어이가 벙벙… 그의
유치한 대사가 먹혀들었는지 똘마니는 다리가 휘청거렸다. 찬스가 눈앞에 펼쳐졌으니
그때를 놓치지 않고, 그놈은 주먹의 방향을 복부로 향했다.
-퍼억!!-
주먹은 정확히 똘마니의 복부에 꽂혔다.
"크억!!"
고통이 스며든 비명을 내질렀다.
"끄어어억!! 저놈의 몸은 쇠덩어리로 되어 있나!!? 으억! 내 손!!"
정작 비명을 지르고 있는 위치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맞은 인간은 똘마니
였지만 아프다고 호소하는 인간은 오히려 공격한 녀석 쪽이었다.
"흐흐흐흐… 어느 파리 새끼가 내 배를 물었나. 왜 이렇게 간지러워?"
간지럽다는 듯이 똘마니는 배를 긁적이며 가소롭다는 듯이 웃음을 내뱉었다. 똘마니
는 천천히 다가가면 그놈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이렇게 우연찮게 주먹을 허용해도 바위에 계란 치기에 불과해 애꿎은 주먹만 아픈 놈
들이 많았다. 무슨 미스릴 갑옷으로 무장한 것도 아니고서야 이렇게 단단할 수 있는
지, 참 어이가 없었다. 이러니 승부가 되겠는가? 그들은 절망감에 휩싸일 수 밖에 없
는 싸움이었다.
카이란은 똘마니들의 싸움을 지켜보면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런 특훈 때문에 그들이
강해졌다는 것은 보였다. 덩치에 비해 움직임도 빨라졌고, 비계 같은 근육이 아닌,
탄탄한 근육으로 바뀌어져 있어 상당한 내구력이 보였다.
-털썩∼-
한 놈이 빙글 빙글 눈깔이 X자로 되면서 쓰러졌다.
-털썩, 털썩-
그리고 또 한 놈 쓰러지고 또 한 놈이 쓰러지고, 어느덧 그들은 전부 쓰러졌다. 정신
을 잃지 않게 팼기에 기절을 놈은 한 놈도 없었다.
모두 손을 봐준 똘마니들은 몸 좀 잘 풀었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 하거나 손을 탁탁
털며 카이란의 뒤편으로 움직였다. 카이란은 그들에게 다가가 만신창이가 된 모습들
을 보며 만족한 미소를 그렸다.
"자… 너희들이 왜 이 노인을 괴롭혔는지는 내 알바 아니다. 하지만 이곳에 내가 있
는 이상 너흰 이 노인에게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니 그만 포기하는 것이 좋을
거다."
푸쉬쉭∼ 망신창이가 된 그들을 보며 카이란은 거만하게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네‥, 네… 알겠습니다. 흑흑 그만 용서해 주세요, 형님."
만신창이가 된 그들은 반항할 엄두도 없는 채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며 용서를 빌었다
. 하도 맞아서인지 쌍 코피에 양쪽 두 눈이 시퍼렇게 부운 것은 기본이었다. 그렇지
만 역시 똘마니들의 싸움이라 폭력의 강도는 다소 낮았다. 만약, 카이란이 똘마니들
을 부르지 않고 본 실력대로 강행했더라면 그들의 팔과 다리는 기본으로 하나씩 부러
졌으리라.
"만약 내가 없는 틈을 타 결국 또다시 이런 짓을 벌인다면 그땐……."
말끝을 흐리며 카이란이 오른쪽 직경 10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큰 나무를 향해 주먹
을 뻗자,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가 부러져버렸다.
"이힉!!"
그들은 기겁을 했다. 주먹만 뻗었을 뿐인데 나무가 부러지다니… 작은 나무면 무슨
트릭을 써서 부러뜨릴 수 있지만‥ 지금 이 나무는 트릭을 써서 부러뜨릴 수 있는 정
도의 나무가 아니었다. 아까 전화 받았을 때 보았던 동작과 비슷하니 그것은 우연찮
게 무엇에 맞고 쓰러진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상대해 줄 터이니 정말로 죽은목숨이라는 것을 기억해 둬라."
눈을 번뜩이며 카이란은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경고했다.
"역시 우리 형님!"
"대단합니다!"
이미 한번 비슷한 경험을 본 똘마니들은 언제 봐도 놀라운 기술이야 하면서 놀라움을
표하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머! 아리아양 왜 그래요!?"
아리아는 건강하게 잘 자라는 나무 한 그루가 한순간에 목숨을 잃자, 그만 충격을 먹
어 혼절을 해 버린 사태가 일어났다. 단합은커녕 뭔가 가지각색 반응이라 상당히 언
밸런스라 생각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의아하기만 하다.
"네네! 알겠습니다!!"
"다, 다시는 오지 않겠습니다!!!"
반응이야 어쨌든, 카이란의 경고에 그들은 무서움을 느끼고, 쌩하는 소리와 함께 걸
음아 나살려라 라는 식으로 부랴랴 도망가기 바빴다.
"……."
그들이 갔으니 조용한 잠적만 감돌았다. 카이란은 그윽한 눈길로 멍하니 가만히 있는
노인네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다친 곳은 없고요?"
그때 민지와 사미가 노인네에게 다가가 부축해주며 안부를 물었다.
"으응, 난 괜찮구먼…."
웃음기를 보이며 표면적으로 애써 괜찮다는 표정을 그렸지만 떨리는 말투가 내심 상
당히 놀랐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아마도 이런 일 처음일 거라 본래 심정은
무척 놀랄 만도 했다.
"좀 얘기를 들어봐도 될까?"
"허허… 젊은이 처음으로 나에게 말을 걸어줬군, 그래."
버르장머리 없게 반말 찍한 카이란이었으나 노인네는 아무렇지 않게 웃어 넘겼다. 지
금까지 카이란이 여기에 왔을 때 말 한번 하지 걸지 않았다는 것을 노인네는 알고 있
던 거였다.
"이야기라… 잠깐 안으로 들어오겠나?"
노인네가 그렇게 권해주자 카이란은 고개를 끄덕였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오빠."
여기서 민지가 그를 불렀다. 당연히 카이란은 민지를 보았고, 그녀는 입을 열었다.
"이거 치우고 안으로 들어가."
민지는 아무런 억양도 없이, 느긋하게 카이란이 마나로 부러뜨렸던 나무를 가리키며
말한다.
"……."
그걸 꼭 지금 말해야 하니? 분위기 파악 좀 해라! 라는 듯이 카이란은 그렇게 민지를
쏘아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봐? 이거 안 치우면 불편하잖아. 오빠가 저지른 일이니 오빠가 해야 하지
않겠어? 이거 치우려면 장난 아니라고. 그리고 애꿎은 나무를 부러뜨린 사람이 누군
데? 왜 불쌍한 나무를 부러뜨리는 거야?"
그가 부러뜨린 나무가 좀 큰게 아니었다. 적어도 어른이 한 손으로 안을 정도의 굵기
를 자랑한 나무였다. 그런 나무를 부러뜨렸으니 여기 지나가는 사람들은 오죽하겠는
가? 이걸 치우려면 인력기계장비가 동원되어야 할 것이다.
"……."
민지의 말도 일리가 있으니 카이란은 반박할 여지는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카이란은 성큼성큼 써러져 있는 나무에 향했다.
"형님 저희가 하겠습니다."
대표 똘마니가 나와 자신들이 하겠다고 나섰다.
"아냐 됐어. 내가 하마."
카이란은 그들을 만류했다. 이런 일쯤이야 똘마니 시키는 것 보단 자신이 빠르게 처
리하는 것이 수월할 것 같아서였다.
"어이… 그 큰 것을 어떻게 하려……."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나는 놀라움에 입이 '쩍'하니 벌려졌다. 무엇을 할지 물어
보는 순간 카이란은 단숨에 그 큰 나무를 번쩍 가볍게 들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 광
경에 하나뿐만 아니라‥ 똘마니들도 마찬가지였다. 상상을 초월하는 것은 알고 있었
지만 설마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다. 유일하게 태연자약(泰然自若)하게 있는 인간들은
예전부터 같이 지낸 민지, 사미, 아리아, 혜미뿐이었다. 노인네도 대단하게 느껴졌지
만 새삼 놀란 표정은 아니고, 단순히 힘이 쌘 젊은이구먼 하는 표정으로 평온하게 지
켜보기만 했다.
"흠!"
이제 이 나무를 처리하는 일만 남았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순간 저기 저 멀리 보
이는 몇Km의 근방의 산이 보이자, 이것을 어떻게 할까 결정을 지었다.
"읏샤!!"
양손을 움켜잡은 채 카이란은 저 산을 향해 냅다 던져버렸다.
-슝!!-
나무는 저 산을 향해 빠른 속도로 향하고 있었고, 어느덧 쿵하면서 저 멀리 서 있는
산에 처박혀 먼지를 일으키는 광경이 조그마케 보였다.
"으헥!!"
"뜨어!!"
입이 또다시 쩍 벌어지는 사태가 일어났다. 어떻게 저 큰 나무를 두 손으로 든 다음
몇Km나 떨어진 곳에다가 던져버리다니… 이것은 예전 만화책 드래곤 볼(지금은 완전
판이라고 하면서 재판 찍고 있는 만화)에서 나오는 학도사 동생(이름 까먹었음)이 드
래곤 볼을 찾으러 사용하던 그 이동 기술과 흡사했다. 만화에서만 보던 장면을 이렇
게 실제 장면으로 보니 어이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그들은 그런 것에 생각할 여유가
들어오지 않았다. 단지 일반인의 상식적으론 상상도 못할 행동에 상상도 못할 힘이라
놀라기 그지없었으니까.
"자자, 들어가자, 들어가자."
손을 탁탁 털면서 아무것도 아닌 마냥 카이란은 움막집으로 향했다. 역시 아무런 감
흥을 못받은 사미와 아리아와 민지, 혜미는 느긋하게 카이란의 뒤를 따랐지만 하나만
입을 벌리고 있는 채로 놀랑 표정을 한동안 지우질 못했다. 물론, 똘마니들도 놀란
표정은 변함 없지만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으니 제외한다.
"저게 인간이야? 인간의 탈을 쓴 헐크 아냐?"
느긋하게 들어가는 카이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하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자 차 한잔씩 들지."
노인네는 차를 한잔씩 그들에게 돌렸다.
"우선 그쪽에게 고맙다는 얘기를 해야겠구먼. 고마우이."
위험한 상황에서 구해줬으니 노인네는 카이란을 향해 고마움을 표했다. 그는 손을 한
번 휘 저었다.
"아니, 됐어. 그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나저나 저 녀석들은 뭐지? 보아하니
땅을 넘기라는 서약서 같은데…."
"아, 그것 말인가? 자네 말 대로네. 그냥 그저 땅을 팔라는 것이지 뭐."
"왜, 그들이 영감에게 그런 짓을 하는 것이지?"
대충 얼버무린 느낌이 감돌자 한쪽 눈썹이 치켜지며 다시 물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혜미가 뭔가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것 때문인가요?"
"허허허… 그렇지 뭐. 그것 밖에 더 있나."
역시 뭔가 알고 있으니 그 둘은 서로 맞았다. 노인네는 지긋한 눈으로 풍경을 슬쩍
바라보며 다시 카이란에게 초점을 두었다.
"이봐 젊은이 이곳은 나의 삶이네."
삶? 이곳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 노후는 가족이 있었다네. 아들 한 명에 마음씨 착한 며느리에 그 둘 사이에 태어
난 손녀딸이 있었지. 특히나 아들녀석은 나를 닮아서 유능하고, 얼굴도 잘생겼었지.
그리고 손녀는 지아비를 닮아서 예쁘기까지 하고 말야. 허허허허허…."
너털웃음을 내뱉으며 자신의 가족들을 말하며 마지막 자식들 자랑까지 잊지 않았다.
너무나 상투적 말씨가 배인 가족 소개에 그들은 부드럽게 쓴웃음을 그리려 했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있었다네' 라는 과거형이 상당히 신경 쓰여 표정이 잘 나오지 않았
다. 그렇다면 지금은 없다는 의미인가?
"남부러울 것이 없는 생활이었지. 돈으로써 살아가서 행복한 그런 집안이 아닌, 항상
웃음도가니와 정이 가득 넘쳐나는 평범한 가정었다네. 이런 행복은 이 노후가 생명을
다 할 때까지 지속된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노부의 늙은 주책같은 허망한 망상이었
지."
그때 그 일을 상기하기 시작하자 그 평온했던 노인네의 표정은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나이로 인한 주름살이 더더욱 짙게 되었다.
"아들과 며느리와 손자 딸은 오랜만에 가족여행을 떠났었다네. 그땐 나도 가고 싶었
지만 모처럼 가족여행에 이 늙은이가 끼면 불편해 할 것 같아서 같이 가지 않았지.
하지만 그때였지. 즐겁게 돌아오는 도중, 커브 길 쪽에 느닷없이 지진이 발생한 거야
. 오래가는 지진은 아닌, 단순히 한번 크게 흔들린 지진에 불과했어. 그런데도 진도
만큼은 엄청났는지 크게 흔들렸고, 당황한 아들은 그만 흔들을 꺾고 만 것이지."
그 일을 생각하면 괴로운지 노인네는 옅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서요?"
조심스럽게 사미가 다음을 물었다.
"그 자리에서 아들과 며느리는 숨을 거두었지만 다행히 손녀딸만 살아 날 수 있었네.
사고가 나기 전 아이만은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며느리가 손녀를 꼭 껴안고 있어서 목
숨만은 건질 수 있었던 게야. 나로서는 다행이라 여겼지. 모두 죽지 않고, 손녀딸이
라도 살아 있었으니까 말야. 하지만 목숨을 건졌지만 그 뒤 손녀딸은 그만 부모의 죽
음과 사고의 충격으로 인해 말을 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만 거야. 그때 당시 손녀의
나이는 9살에 불과했다네. 그때 나도 아들놈과 며느리를 잃었다는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손녀딸은 어떻겠나? 어린 나이에 그런 일을 겪었으니 충격이 이만 저만
아니었을 게야."
9살에 나이에 사고로 인해 부모를 여의면 정신적인 충격은 말로 형언하기 힘들 것이
다. 어쩌면 '실어증'에 걸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거다.
"어린 나이에 너무 가여웠어. 사고도 모자라 말까지 못하게 되니 난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손녀딸이 빨리 괴로운 일을 잊고 하루빨리 건강하게
되기만을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일 밖에 없었지만 나 역시 가족을 잃었다는 슬픔이
가득해 매일매일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어. 영특하게도 나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손
녀딸은 나를 향해 밝은 웃음을 보여줬네. 아직 말은 못했지만 밝은 웃음을 보이며 자
신은 괜찮다는 표정을 보여줬지. 손녀딸의 그런 표정에 난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고,
그만 참지 못해 그대로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네."
그런 기분 이해한다는 듯이 그녀들을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은 흘러서 손녀는 점점 완쾌되고 있었지. 여전히 말은 못했지만 사고로 인한 상
처는 거의 다 나았던거야. 하지만 그것은 아니었어. 사고로 난 상처는 아물었지만 문
제는 내부의 문제가 있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눈치를 채지 못했지. 손녀딸이 퇴원을
하고 난 후에 알았었네. 며칠은 괜찮았지만 언제부턴가 고열과 구토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거야. 처음엔 그저 사고 후유증 때문에 그런 것으로 생각했지. 의사들도 그런
증상이 있을 수도 있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하루 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전혀 증상이
좋아지지 않았고, 점점 악화만 되고 있었지. 그리고 알아버렸네. 그때 그 사고로 인
해 알 수 없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것을. 의사들도 생각지도 못했던 게야. 사고
라면 대부분 외상이니까 말야. 설마 상처 속에 바이러스가 스며들어갔을 거란 생각을
누가 하겠는가?
"……."
"노부에겐 손녀딸이 전부였어. 더 이상 잃을 가족이 없었지. 노부는 손녀딸만이라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모든 돈을 쏟아 부었었네. 이래봬도 이 노부는 돈이 많았다네.
지금은 사라진 회사지만 한때 조그만 한 중소기업 사장이었으니까 말야. 그래서 제일
큰 대학병원에 가서 치료를 했지. 하지만 좀처럼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거야. 오
히려 악화만 되어가고 있으니 노부로써는 막막하기만 하더군. 하지만… 포기하긴 싫
었다네.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꼭 나을 거라는 신념을 가지면 완쾌 될 거라 믿고
있었지."
"그럼 지금 그 손녀딸은 어디 있는데요?"
"그래? 어디 있지?"
처음 하나고 손녀가 어딧는지 물어봤고, 두 번째 질문은 카이란이었다. 여차하면 카
이란이 그 소녀를 치료해 줄 의향이 있어서 물어본 것이다. 인간의 꼬마쯤이야 치료
하는 것은 식인 죽 먹기보다 쉽고, 무엇보다 마법이 존재하는 카이란의 세계에선 바
이러스 때문에 인간이 죽는 일은 흔치 않기 때문에 어렵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카
이란은 그런 의미에서 물어본 것이었다.
노인네는 잠시 침묵을 보이더니 입을 열었다.
"…죽었다네."
그 한마디와 함께 쌀쌀한 바람 한 점이 푸른 들판을 가로지르자 마치 노인네의 심안(
心眼)을 들여다보는 것이 꽃들이 나플나플 흔들거렸다.
"에?"
생각지도 못하는 대답이 흘러나오자 그녀들은 당황해 버렸다. 아직 병원에서 치료받
고 있을 거란 생각으로 지금 몸 상태가 괜찮은지 물어보려는 것이었는데… 난데없이
죽었다는 말을 들으니 당황은 물론이고 어떠한 말을 꺼낼지 막막했다.
"에또… 그, 그게… 죄, 죄송해요."
괜히 물어봤다는 생각에 하나는 사과를 건넸다.
"허허허… 괜찮네.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럴 수도 있다는 듯이 노인네는 너털웃음을 내던지며 그녀의 사과를 받아주었다.
"그래… 노부의 하나밖에 없는 손녀도 마침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네. 큰 대학병원에
서도 필사적으로 치료를 했지만 그곳에 있는 의사들은 바이러스의 정체를 알 수가 없
었네. 결국 그사이에 이미 손쓸 방도가 늦을 정도로 크게 퍼져버리고 만 것이야. 손
녀는 끝까지 괴로워했네. 노부는 그 곁에서 손녀의 손을 잡아주는 것이 다였어. 대체
이 어린것에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런 것인지… 어디에서 한탄이라도 하고 싶었네. 그
래도 노부는 끝가지 포기하지 않고, 기적을 바라면서 손녀를 지켜보았지만… 결국…
…."
허탈한 듯이 노인네는 말했다.
"…숨을 거두고 말았지."
"……."
휘이잉… 차가운 봄바람이 한 점이 뺨을 스쳤다.
"그것이 그때 그 일이군요."
"……!?"
뭔가 알고 있다는 조용히 내리까는 목소리로 혜미가 말하자 남은 그들은 무슨 의미인
지 모른다는 표정이 되어 버렸다. 노인네는 혜미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
다.
"아가씨는 알고 있는가 보구먼… 그때 그 일을. 그렇다네 그때 그 일이지."
대체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이지? 남은 일행들은 의아할 수 밖에 없었다. 대체 그녀가
모르는 것은 무엇인지 궁금할 정도로 아는 것이 많았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기도 전
에 노인네는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운명은 제천이라고는 하지만 이것은 정말로 너무하다는 말 밖에 떠오르지 않더구
먼. 진짜로 신을 볼 수 있다면 일갈이라도 날리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한순간의 아들
에 며느리를 잃고, 하나 남은 손녀까지 앗아가니 노부에겐 남은 것이라면 단순히 허
망함뿐이었네. 그렇게 모든 가족을 잃으니 더 이상 살 의욕도 나지 않아, 그저 이곳
저곳 방탕하며 지내는 것이 다였지. 차라리 자살을 할 까 기도했지만… 주제에 목숨
은 아까운 생각이 나는지 그게 생각처럼 되지 않더라고. 허허허…."
씁쓸한 웃음기가 감돌며 노인의 눈빛은 측은해 지고 있었다.
"노부는 하루 하루를 술로 찌들어 살았었네. 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졌기에 이런 가
혹한 벌을 내리는지 알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다지. 이럴 바엔 차라리 그때 가족여행
때 같이 가서 함께 죽어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왜 혼자 살아 남아서 이렇게 괴로워
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고 싶더구먼. 그때 죽었다면 편안했을 텐데 말야."
옅은 한숨을 내뱉는 노인네의 모습에서 방탄했던 생활이 힘들었다는 기색을 옆 볼 수
있었다. 노인네는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며칠이 지나도 손녀가 괴로워하면서 숨을 거둔 표정이 아직도 새록새록 피어난다네.
차라리 숨을 거뒀을 때 한번이라도 웃는 표정을 보았다면 이렇게 괴롭게 지내지 않았
을 것을… 병원 내내 있을 때부터 손녀는 괴로워하는 표정만 보이니 그것이 머릿속에
떠나지 않아서 더더욱 괴로워 할 수 밖에 없었지. 오로지 술… 술만이 노부의 마음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었다네."
눈을 감은 노인네의 인상이 살짝 찡그러졌다. 아직도 손녀의 괴로운 표정이 아른거리
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렇게 여기저기 방탄을 하면서 우연찮게 노부는 이곳으로 찾을 수 있었지. 손녀딸
은 꽃을 참 좋아했다네. 특히 봄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