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4화 (4/123)

-4-

“말도 안 돼.”

“…….”

에리얼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리엘은 말도 안 나오는지 그저 입만 벙긋거렸다.

“정말이야. 그러니 이제 뚝 하고 케이크 먹자!”

온실에 왔을 때 유모가 가져다준 케이크가 아직도 그대로 있었다.

따뜻한 우유는 식어버렸으나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안 울었어요.”

아리엘은 입술을 삐죽이며 포크로 케이크를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나도 안 울었거든.”

에리얼도 마찬가지였다.

어린이 취급받는 것이 싫은지 어른스러운 척하며 달콤한 초코케이크를 먹었다.

쌍둥이는 생크림이 살짝 마른 케이크를 맛있게 먹었고, 행복하게 웃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니 나는 안도감이 들었다.

이제야 또래 아이들같이 보였다. 어른인 척해 봐야 아이들이었다.

“내일은 뭐 하고 놀까?”

폭풍이 지나가면 땅이 굳는다고 하지.

딱 그런 느낌이었다.

아직 공작과 쌍둥이 사이의 거리는 아득히 멀지만, 오늘 단절됐던 관계가 이어진 느낌이었다.

“인형놀이요!”

“아니야. 내일은 전쟁놀이하자!”

쌍둥이의 행동은 평소와 같았지만 그들의 얼굴에 자리 잡았던 그늘 한편이 사라졌다.

***

어스름한 새벽에 눈을 떴다.

침대에서 내려와 잠시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봤다.

낯설기만 하던 얼굴이 익숙해지는데 꽤나 긴 시간이 걸렸다. 16년. 나는 볼을 살짝 쓰다듬었다. 서늘한 손끝에서 느껴지는 촉감이 생생하다.

‘처음에는 꿈이라 생각했었는데.’

나는 잡념을 털며 기지개를 켰다. 일찍 일어난 김에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책상으로 향했다. 가장 밑에 있는 서랍을 조심스레 열자 낡은 수첩이 덩그러니 있었다.

‘원작 정리 노트.’

수첩은 내가 펜을 잡을 수 있을 때 쓴 것이었다.

손가락 힘이 없을 때라 삐뚤빼뚤한 낙서 같지만 엄연히 한글이었다.

나이를 먹으니 점점 원작 내용이 흐릿해졌다.

아직 원작 시점까지는 멀었으나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조심해야 했다.

‘예를 들면 황태자의 탄신연회라던가.’

아리엘이 황태자에게 반하게 되는 날.

정확히 황태자의 15살 탄신연회였다. 아카데미 가기 전 탄신연회라고 했으니.

황태자가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나오는 이벤트.

‘생일까지는 1년 남았나.’

소설에서 아리엘의 이야기는 외전에서 언급한 것이 전부였기에 부족한 점이 많았다.

파티에서 황태자를 처음 본 아리엘은 첫눈에 반했다고 설명만 있을 뿐 어떤 행동을 했는지 아니면 대화를 했는지는 생략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뭔가 걸리는데. 뭘 빼먹었지?’

나는 달빛에 의지해서 수첩을 훑어봤다.

오래된 수첩을 펼친 것도 근래 받은 이상한 느낌 때문이었다.

새로 산 옷 라벨이 목덜미를 쓸어 까끌까끌한 느낌.

‘신데렐라는 유리구두를 신지 않는다.’는 보통 역하렘 소설과는 달랐다.

일반적인 역하렘 소설이라 하면 다양한 미남들이 오직 여주만 바라보고 여주가 남주랑 이어지더라도 아련하게 그리워하거나 잊지 못해 독신으로 사는 경우가 많다.

‘섭남은 3명.’

나는 수첩에 적힌 글자를 손으로 더듬으며 기억을 떠올렸다.

‘악역 에리얼, 최연소 기사단장 그렌드윈, 저주받은 2황자 시리우스.’

그런데 이 소설에선 등장하는 서브 남주들은 전부 죽는다.

남주인 황태자만 살아서 여주와 백년해로하는 결말이었다.

‘원흉은 아르덴타인이었지만.’

소설의 중요한 역할인 악역, 아리엘과 에리얼은 소설 내내 어마 무시한 존재감을 뽐낸다.

사소한 시비부터 시작해서 중반부쯤에 아리엘은 목숨을 대가로 여자주인공인 데이지에게 저주를 건다.

목숨을 대가로 건 저주는 오직 목숨으로 살릴 수 있었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데이지의 저주를 풀고 죽는 시리우스.

그렇게 시리우스와 아리엘이 죽어도 이야기는 계속 진행된다.

황태자가 아니라서 데이지가 자신을 봐주지 않는다고 생각한 에리얼은 소설이 절정에 달할 때 반역을 일으키고, 그렌드윈은 불타는 황성에서 데이지를 지키다 죽는다.

그러나 반역은 실패로 돌아가고, 에리얼은 남주인공인 헬리오스에게 죽는다.

‘약간 막장인데?’

생각해보니 주인공 말고 다 죽었다.

데이지 대신 죽은 서브남주들을 안타까워했으나 최애가 데이지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막장 스토리를 납득가게 쓰다니. 작가님 당신은 무서운 사람.’

연표처럼 나열한 사건들은 하나하나 막장이었는데 소설을 읽을 당시는 물 흘러가는 전개에 적당한 개연성까지 더해져 전혀 막장이라 느끼지 못했었다.

새삼 작가님의 위대함을 감탄하다가 다시 본론으로 들어왔다.

‘딱히 없는데.’

나는 소설 사건을 연표로 정리해둔 페이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연표의 시작은 나와 쌍둥이의 탄생.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아카데미 입학 전에는 두 개의 사건만 있을 뿐이었다.

‘황태자의 탄신연회와 세르니아의 죽음.’

하지만 외전에서 나왔던 세르니아는 아리엘과 에리얼이 10살이 되기 전에 죽었다.

나는 이렇게 살아있고.

‘요즘 공작님과 쌍둥이 사이도 괜찮아졌으니 악역 루트는 피하겠지.’

나와 거래한 이후 공작은 여전히 무뚝뚝했으나 예전보단 자주 얼굴을 비쳤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티타임 말고도 가끔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가끔은 그들을 불러 의견을 묻기도 했었다.

‘대부분 수업이나 공작가를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지에 대한 토의였지만.’

원작보단 훨씬 나았다. 쌍둥이도 좋은 쪽으로 많이 변했다.

그냥 기분 탓인가?

점점 원작이 시작되는 시기가 다가와서 불안한 거겠지.

나는 애써 합리화하며 수첩을 서랍 깊숙한 곳에 넣었다.

별거 아닌 착각이라 생각하며.

***

“이번엔 절대 안 져!”

“나는 에리얼과 다르게 언제나 늘 칭찬만 받았는데.”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공작과 티타임을 갖는 날이었다.

9년 전에 시작된 행사는 한 번도 거른 적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바짝 긴장해서 찻잔도 덜덜 떨면서 잡았고, 포크질 한 번을 못 했었다.

다사다난한 티타임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연스러워졌다.

티타임이 끝나면 곧잘 체하던 쌍둥이였으나 이젠 공작 앞에서 볼에 생크림을 묻히고 먹을 정도의 담력도 생겼다.

‘뭐, 대체로 혼나는 건 에리얼이지만.’

“공작님이 오셨습니다.”

시녀가 문을 열고 공작의 입장을 알렸다.

그러자 쌍둥이는 언제 싸웠냐는 듯, 얌전한 고양이처럼 자세를 고쳐 앉았다.

“오래 기다렸나?”

“아니요. 저희도 방금 도착했어요.”

아리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며 대답했다.

에리얼도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더니 한마디 거들었다.

“맞아요. 저랑 누님은 아까부터 기다렸지만 아리엘은 방금 왔어요.”

꼭 맞을 짓을 하더라.

내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아리엘을 긴 드레스로 에리얼의 발을 덮었다.

보이진 않지만 드레스 밑에선 두 아이의 치열한 발싸움이 진행되고 있으리라.

“아!”

에리얼이 졌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를 질렀다.

공작이 눈썹을 꿈틀거리자 둘 다 조용히 착석했다.

“오늘은 어떤 디저트이려나.”

내가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시녀들에게 디저트를 들이라고 눈치를 줬다.

눈치 빠른 시녀들은 재빨리 차와 디저트를 세팅했다.

“세르니아.”

공작은 나른한 눈길로 나를 훑었다.

“살이 찐 것 같군.”

“!”

나는 너무 놀라서 포크를 떨어뜨릴 뻔했다.

날카로운 눈이야. 최근 살이 좀 오르긴 했다.

그래도 맛있는 간식들을 포기할 수 없고, 잘 보일 사람도 없어서 관리 안 하고 있었는데.

“보, 보기 싫나요? 역시 좀 빼야 할까요.”

“아니에요. 언니 지금이 딱 좋아요. 예전이 너무 마른 거라고요!”

“누님, 지금 저희는 성장기에요. 몸무게가 늘어나는 건 당연한 겁니다.”

내가 시무룩하게 공작에게 물었는데 대답은 쌍둥이에게 들려왔다.

그들은 지금이 좋다며 절대 빼면 안 된다는 격한 반응을 보였다.

심지어 그런 말을 꺼낸 공작을 노려보기까지 했다.

사실 나도 뺄 생각 없었다.

일단 공작가에 얹혀사는 입장으로 공작가의 보스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빼려는 노력이라도 보이려고 했을 뿐.

‘다이어트는 지옥이야.’

건강을 위한 관리는 하겠지만 미를 위해서 지옥을 경험하고 싶진 않았다.

전생에 숱한 실패를 통해 자신은 다이어트가 불가능하다는 것도 깨달았기에.

“보기 싫다곤 안 했는데.”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나는 해맑게 웃으며 포크를 고쳐 잡았다.

오늘 나온 디저트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몽블랑 케이크라고!

공작이 보기 싫다 했더라도 오늘 케이크는 포기 못 했을 것이다.

“공작님. 여기 있습니다.”

방 안엔 은은한 얼 그레이 향이 퍼지고, 모두 자리에 앉자 대기하고 있던 데인이 공작에게 서류를 건넸다.

한 달 동안 쌍둥이의 행적이 적힌 서류였다.

가정교사들의 한 달 평가와 수업 진도, 그 밖에 공작가에서 벌였던 일들이 적혀있는 쌍둥이의 성적표!

쌍둥이는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모습이 귀여워서 나는 웃음이 났다.

‘나야 아무도 터치 안 하니까 마음 편히 웃을 수 있는 거지만.’

나도 기본적인 교양은 쌍둥이와 함께 배웠었다.

귀족 예절, 몸가짐, 댄스나 자수 같은 것들.

시간이 지날수록 쌍둥이의 수업은 점점 다양해졌다.

에리얼은 9살 때부터 공작가를 잇기 위한 후계자 수업을 받았고, 나를 지켜주고 싶다며 검술도 배우기 시작했다.

아리엘은 외교에 관심이 많은지 여러 나라의 언어와 경제에 관한 수업을 받았다.

각자의 길을 찾아가는 쌍둥이를 보며 뿌듯하면서도 씁쓸했다.

아직 놀이터에서 뛰어놀 아이들인데.

아니지. 환생하기 전 한국에서도 영재교육이다 뭐다 한창 열 올렸던 것이 떠올랐다.

어린이집에서도 어디 사는지 부모님의 직업은 뭔지로 무리를 나눠 노는 것 보고 충격이었는데.

‘여긴 뚜렷한 신분제가 있으니 더 심하겠지.’

적당히 식은 얼 그레이가 더 쓰게 느껴졌다.

“아리엘.”

“네.”

“샤르테어를 끝냈다고.”

“네. 이번엔 동대륙의 언어를 공부하고 싶어요.”

아슬란데 제국이 있는 중앙 대륙은 제국어를 공용어로 지정하고 사용한다.

다음으로 많이 사용하는 언어는 두 번째로 크고 무역이 발달한 브릴리언 왕국의 브릴리언어이다.

샤르테 왕국은 크기가 작은 왕국이었다. 바로 옆에 마탑이 있어 샤르테어를 종종 쓴다고 해도 제국에서 샤르테어까지 공부하는 귀족은 몇 없다.

‘아리엘은 벌써 샤르테어도 끝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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