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5화 (5/123)

-5-

브릴리언어는 귀족들이 기본적으로 배우는 외국어다.

선택이긴 하나 허영심이 많은 귀족이 가장 쉽게 지식을 뽐낼 수 있는 무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쌍둥이와 함께 배우다가 포기했지만.

“동대륙 언어를 할 수 있는 선생을 찾아보겠다.”

“감사합니다. 이왕이면 르헨이 좋아요.”

아리엘의 말이 끝나자 공작의 눈이 나에게 닿았다.

그녀가 언급한 르헨은 동대륙에서도 가장 동쪽에 있다고 전해지는 내 어머니의 나라였다.

“알겠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공작은 시선을 돌렸다.

“에리얼.”

“네!”

에리얼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아리엘은 갑자기 난 큰소리에 흠칫 놀라서 에리얼을 째려봤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공작만 열심히 쳐다봤다.

“복도에서 뛰다가 도자기를 깨트렸다. 라고 적혀있군.”

“풋.”

공작의 말이 끝나자 옆에 있던 아리엘이 웃음을 터트렸다.

방심하고 있다가 터졌는지 재빠르게 표정 관리를 했으나 입꼬리가 살짝 떨리는 것은 숨길 수 없었다.

“그, 그게…….”

“변명은 필요 없다. 앞으로 행동거지에 조심하도록.”

“네…….”

에리얼은 다짜고짜 혼부터 날 거라 예상 못 했는지 시무룩해졌다.

내가 에리얼의 등을 토닥여줬다.

“그리고 소드익스퍼트에 올랐다고.”

“네!”

“열심히 했군. 그러나 자만은 금물이다. 아르덴타인에 걸맞은 사람이 되려면 검으로 정점에 서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아르덴타인은 대대로 소드마스터를 배출하는 가문이다.

현 공작도 소드마스터이며 공작가를 이을 에리얼도 그 경지에 올라서야 한다.

제국을 수호하는 가문이라 유일하게 사병을 가질 수 있고, 다른 가문보다 기사의 숫자도 많다.

‘그런데 에리얼이 반역을 일으킨 거고.’

식어버린 얼 그레이 홍차가 더 썼다.

설탕을 넣을 걸 그랬네.

나는 씁쓸한 입맛을 달래기 위해 몽블랑 케이크를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달콤한 밤 맛이 입안에 퍼져서 쓴 마음을 달래줬다.

‘이젠 다르니까. 괜찮겠지.’

괜찮을 것이다. 에리얼이 검을 드는 이유도 바뀌었다.

삐뚤어진 사랑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그러니까 아리엘은 저주를 걸지 않을 거고, 에리얼도 반역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세르니아.”

“네?”

공작이 나를 부르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나는 최근에 다른 수업도 받지 않고 있었기에 더더욱!

역시 살찐 것 때문인가 싶어서 내심 긴장하고 있었는데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공작님 큰일입니다!”

내 담당 시녀인 첼시였다.

공작은 노크도 없이 들어온 첼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마력을 일으켜 압력을 넣었다.

“티타임은 아무도 방해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살기 하나 없는 건조한 마력이었으나 공작의 위압감에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첼시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으나 자신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벌벌 떨면서도 말을 이어나갔다.

“죄송, 합니다. 다만, 급히 아. 아셔야 할…….”

“뭐지.”

그의 표정에서 별거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기세였다.

흉흉한 분위기 속에 공작과 가장 가까이 있던 내가 그의 소매 끝자락을 살짝 잡았다.

에리얼은 그나마 괜찮아 보였으나 아리엘의 낯빛은 좋지 않아 보여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서늘한 눈빛으로 아이들을 훑어보더니 마력을 갈무리했다.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나는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차가워진 아리엘의 손을 꼬옥 잡아줬다.

첼시는 나와 쌍둥이를 힐긋 보더니 공작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의 말을 들은 공작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미세하게 꿈틀거린 그의 눈썹을.

“내가 직접 간다.”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나도 자연스럽게 따라 일어섰다.

첼시가 온 것을 보니 나와 관련된 일일 것이다.

거기다 공작의 눈길이 잠시 나에게 머무른 것을 보면 확신할 수 있었다.

“됐다. 너희는 여기 있어라.”

“저와 관련된 일이면 따라가겠습니다.”

“……마음대로 해라.”

무조건 따라가겠다는 의지를 보이자 공작은 쉽게 물러섰다.

오히려 안색이 안 좋은 사람은 첼시였다.

‘평소에 무표정한 첼시가 놀랄 정도면 정말 큰일이 생긴 건가.’

쌍둥이는 대기하고 있고 나와 공작은 첼시를 따라 이동했다.

고요하던 복도 끝자락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공작가에서 일하던 일꾼들이 몰려 있어서 사건이 생긴 곳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곳은 내 방이었다.

“물러서라.”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으나 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공작의 존재를 알아차리자 인사를 하고 급하게 물러섰다.

일꾼들이 사라지자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내 방이 한눈에 들어왔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내가 잠들어있던 침대가 붉었다.

아이보리색 따뜻한 느낌의 폭신한 이불과 베개는 깃털을 날리며 찢겨 있었고,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로 붉게 물든 침대 중앙엔 사람 모양의 솜 인형이 있었다.

어느새 내 뒤에 다가온 첼시가 떨리는 손을 내 어깨에 얹으며 괜찮을 거라고 작게 속삭였다.

‘저주 인형!’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내가 읽었던 외전의 일부분이란 걸.

‘대체 왜? 누가?’

내가 원작을 따라가지 않으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소설은 소설일 뿐, 내가 미래를 바꿀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런데 대체 왜 소설 속 사건이 일어난 거지? 소설의 억지력 뭐 그런 건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더 있었다.

‘원작보다 4년이나 늦게 일어나는 이유는 뭐야?’

억지력이니 운명이니 그런 게 있었다면 4년 전에 일어나야 했을 일이다.

소설에선 쌍둥이가 10살쯤 됐을 때, 세르니아가 유모의 방에서 저주 인형을 찾아낸다.

유모가 쌍둥이를 저주했다고. 세르니아는 유모의 변명을 듣지 않고 귀족을 저주하는 건 중죄라며 그 자리에서 사형한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공작은 공작가 내에서 일어난 일이니 범인이 죽었다 하더라도 철저히 조사하라고 명령해서 기사들과 데인이 유모의 방을 재조사한다.

그런데 유모에 방에서 세르니아의 머리카락과 평소에 그녀가 자주 사용하는 진주 귀걸이 한쪽을 찾아낸다.

공작은 세르니아를 의심해서 방을 뒤지고 세르니아가 쌍둥이를 질투하는 내용의 일기가 발견되면서 사건은 더 커진다. 쌍둥이는 유모가 자신들을 저주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세르니아가 범인으로 지목됐을 때도 혼란스러워하며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는다.

‘처음엔 억울하다고 변명하던 세르니아는 곧 미친 것처럼 웃더니 단검을 꺼내 자살한다.’

흔들리는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쌍둥이에게 풀지 못할 족쇄를 채우고.

“어떻게 된 일이지.”

공작의 냉기 서린 목소리에 나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 그게 청소를 하러 들어왔, 왔는데…….”

“네가 처음 발견한 건가.”

“네.”

어린 하녀가 고개를 숙이며 공작의 물음에 대답했다.

“이 아이가 바로 제게 알렸고, 제 눈으로 방을 확인한 후 공작님에게 바로 달려간 것입니다.”

옆에 있던 첼시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방 안은 무거운 정적에 휩싸였다.

가만히 지켜보던 공작이 침대 앞으로 걸어갔다.

꺼림칙한 풍경에 다가갈 생각을 못 하고 있던 사람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공작은 망설임 없이 솜인형을 집었다.

‘뭐 하는 거지?’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인지 멍하니 공작을 지켜봤다.

공작은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들어 올린 솜인형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물론 나는 마력을 볼 줄 모른다.

다만 첼시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뿌렸던 마력은 피부에 닿은 압력이 달랐기에 느낀 거고 지금은 눈앞에 있는 인형을 보고 알 수 있었다.

공작의 손에 잡힌 솜인형이 액체처럼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더니 이내 펑 하고 터져버렸다.

“헉!”

“공작님!”

경악스러운 광경에 첼시는 헛숨을 들이키고 데인은 공작에게 다가서려 했다.

“저주는 아니군.”

혼돈한 가운데서 혼자 평온한 공작은 덤덤하게 자기 할 말만 했다.

저주가 아니라는 공작의 말에 나는 침대로 다가갔다. 저주가 아니라면 무서울 게 없지.

공포영화나 유령의 집에 강했다. 고어는 거부감이 좀 있지만.

‘저주가 아니라니. 그럼 이건 그냥 단순한 괴롭힘?’

나는 아르덴타인 직계가 아님에도 쌍둥이와 함께 자라면서 직계 취급을 받고 있었다.

확실히 다른 사촌이 본다면 질투할 만하다.

‘근데 나를 질투할 사촌은 없는데. 아니면 아르덴타인을 모시는 가문 중에 하나일까.’

나는 여러 가설을 세우며 공작 옆에 섰다.

그는 나에게 뭔가 말하려는 눈치였으나 불안한 눈빛으로 공작에게 질문하는 데인에 의해 막혔다.

“공작님 저주가 아닙니까?”

“그래. 저주는 계약으로 이루어지는 마법의 일종이라 다른 마력을 받으면 계약을 보호하기 위해 격한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오. 저주가 그런 원리였군.

나는 새로운 지식을 머리에 새겨 넣었다.

침대 위엔 딱히 특별한 게 없네. 나의 시선은 붉은 침대를 지나 공작의 손으로 이동했다.

“어!”

“뭐지?”

공작의 손 위에 인형 잔해물을 본 나는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질러버렸다.

내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공작이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스스로의 눈을 의심하며 눈을 몇 번이나 끔뻑일 뿐.

‘말도 안 돼.’

진짜 말도 안 된다!

이 방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소름 돋았다. 나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공작의 손에 있는 잔해물을 자세히 보려고 다가갔다.

가까이서 봐도 내용물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내 머리카락이랑 예전에 잃어버린 귀걸이 한쪽.’

“아가씨, 괜찮으세요?”

문 근처에 있던 첼시가 내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이번에도 대답할 수 없었다.

머리가 복잡해서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기에.

“설마 네 것인가?”

“……네.”

공작도 솜 사이에 끼어 있는 머리카락과 귀걸이를 발견했다.

진보랏빛이 도는 머리카락과 진주 귀걸이를.

‘잠깐만. 외전에서 세르니아는 정말 결백했던 거야?’

나는 심호흡을 했다.

침착해야 한다. 진정해.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나는 눈을 감았다.

‘소설에서 세르니아는 쌍둥이를 질투했으나 저주하진 않았다. 유모는 쌍둥이가 아니라 세르니아를 저주하려고 했었다.’

소설에서는 그 두 가지 사실을 교묘하게 가렸다.

‘서술 트릭?’

작가가 독자를 속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편향된 정보를 주고 착각하도록 만드는 수법이었다.

‘추리 소설도 아니고 로맨스 판타지 소설에서 서술 트릭이라고? 장난하냐!’

나는 정보를 차분히 정리하면서도 한편으론 작가를 원망했다.

순수문학보다 작가의 의도를 알 수 없는 장르 소설이라니.

‘내가 추리 소설에서 범인은 잘 찾아도 언어 시험 칠 때 작가의 의도는 암기했다고.’

대충 정리를 끝내고 감았던 눈을 뜨자 제일 먼저 마주친 건 공작의 초록색 눈동자였다.

놀라라. 그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짐작 가는 사람이 있나?”

“음…….”

나는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범인은 유모! 라고 말할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소설 속에서 세르니아는 쌍둥이가 자신을 믿어주지 않아서 자살을 선택한 걸까?’

진실을 알았으나 진심은 모르겠다.

세르니아가 왜 자살했는지. 유모는 왜 세르니아를 저주하려고 했는지.

어설프게 정답만 알아서 과정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난감했다.

칠판에 나가서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답지엔 정답만 적혀있어서 무슨 방식을 대입했는지 모르겠는 느낌!

‘질러? 범인은 유모라고 질러?’

아니야. 4년이나 늦게 시행한 건 그만큼 철저하게 계획된 행동이라는 게 아닐까?

으음, 나는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작가님, 유모가 세르니아를 저주할 개연성 없는 거 숨기려고 서술 트릭 쓴 거예요?’라고 멱살 잡고 묻고 싶었다.

“모르겠다면 됐다. 데인 공작가의 사람을 모아라. 마부에서부터 기사까지 전부.”

“알겠습니다.”

“넌 쌍둥이와 함께 있어라.”

“네.”

일단 순순히 대답했다.

여기서 내가 더 나서봤자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

‘과학 너 왜 발달 안 했냐? 지문 조사하면 끝인데.’

과학이 들었다면 억울해 했겠지만 나는 답답한 심정에 작가와 과학 탓을 했다.

“아가씨 공작님이 반드시 범인을 찾아 주실 겁니다.”

“응. 첼시, 나는 괜찮아.”

공작과 데인이 먼저 방에서 나가고, 마지막까지 내 걱정을 하던 첼시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혼자 남았으나 쌍둥이가 있는 곳으로 가지 않았다.

‘오늘 유모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지?’

어릴 땐 셋이 같이 있었지만 커가면서 점점 다른 수업을 받게 되었고 유모는 아리엘과 함께 있는 시간이 늘었다.

에리얼은 검술 수업 빼고는 데인과 같이 있었고, 나는 책 읽거나 산책을 하는 한가로운 일과라 주로 첼시와 있었다.

티타임은 공작이 특별한 일이 없을 경우 늘 3시에 가졌다.

‘점심에 아리엘과 함께 식당에서 본 게 마지막인가.’

보통 티타임 전엔 유모가 디저트를 확인하기 때문에 티타임 전까지는 식당에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범행 시간은 오후 1시에서 오후 3시 10분 사이가 되겠군.

유모에게 그 시간 알리바이를 추궁하면 되려나?

“내가 탐정도 아니고, 이게 뭐 하는 짓이람.”

이젠 내가 환생한 소설의 장르조차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빨간 건 소설에 없었는데.

언뜻 피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도 갈색으로 변하지 않는 걸 봤을 때 피는 아니었다.

처음엔 동물 피라도 뿌린 줄 알았는데.

‘범인의 심리를 파악해보자.’

유모가 왜 나를 저주했을까. 아니, 공작이 저주는 아니라고 했으니 단순히 겁주기? 괴롭힘? 그것도 아니라면…….

또각. 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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