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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했다고 생각했을 땐 이미 늦어버렸다. 그렌드윈은 내 손을 덥석 잡더니 더욱 폭주하기 시작했다.
“눈부신 금발은 장인이 한 올 한 올 정성 담아 금실로 뽑은 것처럼 아름답고…….”
옆에 있던 에리얼이 그렌드윈을 막으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폭주 기관차 마냥 쉴 새 없이 떠드는 그렌드윈에게 질렸는지 허망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원작에서는 이런 녀석이 아니었는데.’
원작 그렌드윈은 여동생을 제외한 모든 여자는 돌보듯 본다. 그런데 데이지를 만나 호감을 가지게 되고 자신에게 가장 소중했던 여동생과 데이지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러나 역시 로맨스 소설답게 데이지가 더 소중하다며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브레이크 없이 직진으로 부딪히는 매력을 뽐냈는데!
‘데이지 만나기 전에는 그저 팔불출 오빠구나.’
상상했던 이미지와 전혀 다르지만 어쩐지 이 모습이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뭐랄까 쌍둥이 업그레이드 버전! 내가 아무 반응을 하지 않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벨라의 찬양을 늘어놓는 팔불출의 표본 그 자체.
“그리고 푸른 하늘보다 파랗고 맑은 눈동자는 수정을 박아 놓은 듯한 느낌이 들죠. 마치…….”
“장인이 정성 들여 세공한 아콰마린 같네요.”
나는 그렌드윈의 말을 끊고, 그가 했을 법한 칭찬을 가로챘다.
그렌드윈은 내가 그렇게 치고 나올 거라 예상하지 못했는지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바라봤다.
“맞습니다.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계셨군요.”
내가 원하는 반응은 아니었다. 나는 가벼운 장난을 치려고 한 말이었으나 그렌드윈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이번엔 정말 말문이 막혀 아무 대답도 못 했는데 다행히도 옆에서 듣고 있던 벨라가 그를 막았다.
“윽!”
“오라버니. 차는 식기 전에 마셔야죠. 그렇게 쉼 없이 대화하는 건 세르니아 님에게 실례에요.”
주책맞은 그렌드윈 때문인지 벨라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그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물론 테이블 아래에서. 그렌드윈의 나지막한 비명과 상체가 왼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봤을 때 가끔 아리엘이 에리얼을 꼬집는 모습과 똑같았다.
“괜찮습니다. 저도 벨라 영애를 볼 때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걸요.”
뭐, 천사 같다고 생각한 건 비슷하니까.
나는 이 상황에서 벨라가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아니, 근데 왜 네가 감동해?’
그렌드윈은 진심으로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잘 통하는 분이 계실 줄이야.”
저 눈빛은 전생에 안 친하던 대학 동기가 나와 같은 장르를 덕질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보내던 눈빛!
‘혼자 내적 친목을 다지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내적 친목을 다지는 그렌드윈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옆에서 홍차를 홀짝이는 에리얼을 힐끔 쳐다봤다. 에리얼은 폭주하는 그렌드윈을 포기했는지 이쪽 대화에는 관심을 끄고 내가 손도 못 댄 디저트들을 음미하고 있었다. 치사하게 혼자 먹고 있다니.
“에리얼, 그렌드윈 영식에게 인사해야지.”
나는 굳이 끼고 싶지 않아 하는 에리얼을 끌어들였다. 에리얼은 케이크를 입에 넣으려다가 내 부름에 흠칫하더니 느리게 포크를 내려놓으며 그렌드윈에게 인사를 했다.
“오랜만입니다.”
“네. 오랜만입니다.”
“…….”
그게 끝?
이어지는 침묵에 에리얼은 어색한지 포크를 집어 들었고, 그렌드윈도 시선을 돌리더니 다시 나를 쳐다봤다. 뭔데. 왜 나 보는 건데. 내가 또 대화를 시작해야 하는 거야?
난감한 상황에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어색한 침묵을 깨준 사람은 벨라였다.
“세르니아 님 오시는 데 불편함은 없으셨나요?”
“네. 카일렌 후작가가 이렇게 가까운 줄은 오늘 처음 알았어요.”
“맞아요. 오라버니를 따라 황궁을 방문할 때 늘 아르덴타인 공작가를 지나는데 그때마다 세르니아 님을 생각했답니다.”
“저를요?”
내 생각을 왜 했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바라봤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였다. 우물쭈물하던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네.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었고, 또…… 친해지고 싶어서요.”
아하. 친구가 되고 싶었던 거구나.
벨라는 어릴 적부터 오라버니를 따라 황궁에 놀러 가서 황태자와 친했었다. 그에 질투하는 또래가 많아 그녀는 그렌드윈과 황태자를 제외하고는 좀처럼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데이지가 첫 친구였지.’
나는 그날처럼 흘러내린 벨라의 머리카락을 귀에 꽂아주며 말했다.
“저도 벨라 영애와 친해지고 싶었어요.”
그녀는 내 손길에 고개를 들었다. 카나린과는 대등한 친구고, 아리엘이 보살펴야 할 친동생이라면 벨라는 왠지 친한 후배 같은 느낌이었다.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벨라는 발갛게 익은 얼굴로 조심스럽게 언니라고 불러도 되냐고 물었다.
“그럼요!”
“언니도 저를 벨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녀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와, 진짜 천사다. 아리엘이 화려한 붉은 장미라면 벨라는 청초한 백합! 아름다운 그녀의 웃음에 잠시 넋을 놓고 있었더니 옆에 있던 그렌드윈이 끼어들었다.
“누님, 저도 편하게 렌이라 불러주십시오.”
“어?”
그렌드윈이 갑자기 누님이라 부르자 팔에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아니 에리얼이랑 동갑이니까 틀린 호칭은 아니지만. 에리얼이 누님이라 부르는 건 괜찮았으나 그렌드윈이 누님이라 부르는 건 뭔가 이상했다.
‘얼굴이 삭아서 그런가.’
욕하는 건 아니다!
헬리오스나 시리우스만큼은 아니지만 그렌드윈도 미남이었다. 다만, 커다란 덩치와 묵직한 이미지가 나보다 어린 느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누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습니다!”
그렌드윈이 나를 누님이라 부르자 에리얼이 포크를 내려놓고 발끈하며 외쳤다. 공중에서 시선이 부딪혔다. 스파크가 튄 것은 기분 탓일까. 말없이 눈싸움을 하다가 그렌드윈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에리얼 님은 저랑 동갑이니까 말 편하게 하겠습니다.”
그렌드윈은 마이웨이를 시전 했다!
에리얼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순식간에 친구까지 먹다니. 그렌드윈은 생각보다 강적이었다. 에리얼은 그렌드윈의 막무가내에 말을 잇지 못했다. 너무 어이가 없으면 말문이 막힌다더니 지금 상황이 딱 그렇게 보였다.
“일단 둘의 우정 이야기는 다음에 하고, 우선 자기소개라도 할까요?”
나는 반문을 못 하는 에리얼을 대신해 상황정리에 나섰다. 티파티인데 디저트는 한입도 못 먹었고, 다른 영애들도 우리를 힐끔힐끔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대화도 안 하는 상황이 부담스러웠다.
특히 처음 보는 소녀는 이 공간이 불편한지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동공 지진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잘 보였기에 나는 그녀가 편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소개나 하자고 말한 것이다.
‘소개하는 동안 케이크 먹어도 되려나.’
얼굴이 익숙한 몇몇 소녀들도 눈치를 보다가 대화의 화살이 돌아오는 것이 기쁜지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그녀들도 카일렌 남매나 우리랑 안면을 트려고 왔을 텐데 계속 우리끼리만 대화하니 속이 탔을 것이다.
“그러네요. 주최자인 저희가 진행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가벼운 티파티에 진행까지야.
벨라는 어린 나이답지 않게 능숙하게 티파티를 이끌었다. 기존에 카일렌 후작가와 교류가 있는 가문이다 보니 그들끼리는 이미 알고 있는 사이였다.
‘나만 처음 보는 사람이었군.’
나는 드디어 포크를 들었다!
눈앞에 있는 케이크를 바라만 보는 것은 고역이었다. 각자 근황 토크를 시작하자 더 이상 내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행복하게 웃으며 당분을 섭취했다. 역시 케이크엔 홍차지.
“세르니아 님은 건국제에 어떤 드레스를 입으시나요?”
달콤한 생크림을 한껏 느끼고 있었는데 처음 봤던 소녀가 말을 걸어왔다.
페르수스 가문의 세이렌이었나?
“저는 벚꽃잎 색 드레스인데 자세한 건 아리가 골라서 잘 기억이 안 나네요. 세이렌 영애는 어떤 드레스를 입나요?”
진짜다. 분명 의상실은 같이 갔으나 패션 센스가 없는 편이라 드레스 색만 정하고 나머지는 아리엘과 디자이너가 진지하게 의논한다. 결과물은 언제나 예뻤기에 나도 얌전히 그들의 의견을 따를 뿐.
“그렇군요. 세르니아 님은 어떤 드레스라도 잘 어울리실 거 같아요.”
두 손을 모으고 눈을 반짝이며 말한 세이렌은 자신이 입을 드레스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나는 고개로 가볍게 맞장구를 치며 능숙하게 포크를 움직였다.
“누님, 여기 묻었습니다.”
세이렌의 수다를 들으며 열심히 케이크를 먹고 있었는데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 그렌드윈이 내 입술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나는 그의 손길보단 누님이라는 소리에 다시 한번 소름 돋아서 움찔거렸다.
‘누님이라니 진짜 적응 안 가네.’
나는 한차례 부르르 떨었으나 에리얼이 눈치채지 못하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여기서 굳이 소란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고맙지만 다음부턴 그냥 말로 해줄래요?”
그렌드윈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는데 그렌드윈은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기가 해놓고 왜 자기가 놀란담. 흡사 본인도 모르게 했다는 사람처럼, 내 말엔 대답도 하지 않고 자신의 손가락만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음, 죄송합니다. 벨에게 하던 행동이 습관처럼 나갔습니다.”
아하. 시스터 콤플렉스 아니랄까 봐 평소에 이런 소름 돋는 행동을 습관처럼 하다니 대단하네. 우리 쌍둥이는 극성이 아니었어. 나는 그렌드윈의 변명에 수긍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렌드윈의 옆에 앉아 있는 벨라가 우리끼리 무슨 대화를 하는지 궁금해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리얼이 못 봐서 다행이네.’
에리얼의 맞은편에 앉은 소녀가 그에게 관심이 많은지 자꾸 말을 걸었다. 에리얼은 귀찮아하면서도 예의상 대답은 해주고 있었기에 그렌드윈의 행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머, 이쪽은 아직 한창 담소 중이군요. 아쉽지만 벌써 해가 지고 있답니다.”
한창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으나 부드러운 후작부인의 목소리가 티파티의 종료를 알렸다. 귀부인들 쪽은 이미 준비를 마쳤는지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섰고, 자식과 같이 온 귀부인들은 후작부인과 함께 다가왔다.
앉아 있던 영애들도 카일렌 남매에게 인사하고 일어섰다. 우리도 이제 그만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