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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오늘 너무 즐거웠어요. 다음엔 공작가로 초대할게요.”
“정말요? 약속이에요! 그리고…… 혹시 편지해도 될까요?”
“그럼요. 언제든지 환영이에요.”
공작가로 초대하겠다는 말에 기뻐하는 벨라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편지를 보내도 되는지 물어왔다. 점점 펜팔 친구가 늘고 있네. 편지라는 단어에 시리우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으나 나는 얼른 머리에서 지워냈다.
‘아직 한 통도 안 왔으니 시리우스는 펜팔 친구 아니지.’
당장이라도 보낼 듯한 기세였으면서.
“건국제 때 보자. 누님도 그때 뵙겠습니다.”
뻔뻔한 그렌드윈은 에리얼의 구겨진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누님이라는 호칭을 고치지 않았으며 반말을 했다.
“하, 그래. 벨라 영애 오늘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렌드윈과 싸워봤자 소득 없다 판단했는지 빠르게 단념한 에리얼은 벨라에게만 감사 인사를 했다.
‘의외로 죽이 잘 맞을지도.’
에리얼은 아직 친구가 없으니까.
나는 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 기대하며 아르덴타인 공작가로 돌아왔다. 우리보다 일찍 돌아온 아리엘은 내가 마차에 내리기 무섭게 어떤 일이 있었냐고 물어왔다.
누님이라 부르는 그렌드윈에게 소름 돋았고 새로운 펜팔 친구가 생겼다. 나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망설였으나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에리얼이 떠들기 시작했다.
‘나는 가만히 있어야지.’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간다고 하니.
그리고 에리얼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90%가 그렌드윈의 욕이었다. 아리엘은 그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다가 벨라가 언니라고 부른 부분에서 발끈했다.
“언니! 제가 없는 사이 새로운 동생을 만들었군요. 역시 저도 갔어야 했는데.”
에리얼과 아리엘은 단숨에 의기투합하며 카일렌 남매를 질투했다. 나는 저녁 식사 내내 카일렌 남매 욕을 귀에 못 박히도록 들어야 했다. 이러다 미운 정 들겠군. 나는 생각을 삼키며 멋쩍게 웃었다. 쌍둥이의 질투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찌 보면 오늘도 평화롭게 지나갔네.
***
천년을 이어온 아슬란데 제국은 건국일을 기점으로 새해를 맞는다. 그러니까 오늘이 제국력으로 1월 1일인 것이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는 안 하지만.’
대신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수도는 아침부터 활기가 넘쳤다. 평민부터 귀족까지 건국제를 맞이해 축제를 즐긴다고 여념 없기 때문이었다.
건국제는 일주일 동안 이어진다. 수도에는 떠돌이 악단과 건국제를 위해 멀리서 달려온 상인들로 북적였고, 희귀한 볼거리와 노점상을 구경하려는 아이들로 넘쳐났다.
거리는 건국제 풍습을 따라 하얀 리본으로 장식되어있었다. 황족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색이며 빛을 상징하는 은색. 귀족들은 쉽게 구할 수 있으나 평민들에겐 너무 비쌌기에 은색을 대신해 흰색을 쓰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공작가도 아침부터 부산스러웠다.
복도 여기저기에 유리로 된 태양을 장식하거나 은사로 수놓아진 테이블보로 바꾸는 작업을 한다고 일꾼들이 부지런히 움직였고, 쌍둥이와 공작은 오늘 밤에 있을 건국제 파티를 위해 아침부터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조금 다른 문제 때문에 고민에 잠겨 있었다.
‘시리우스가 파티에 참석할 거 같진 않고, 어디서 만나야 하지?’
한동안 베개 밑에 숨겨뒀던 옷은 꾸깃꾸깃 해져서 도저히 그냥 돌려줄 수가 없었다. 결국 저번에 초콜릿을 줬던 하녀를 조심스럽게 불러 세탁을 부탁했고, 현재는 내 드레스 룸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들고 갈 때 삼촌 눈에 띄면 뭔지 물을 텐데.’
매의 눈을 가진 공작이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손에 들고 가기도 애매했고,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좋은 방법을 떠올렸다!
‘선물인 것처럼 포장을 하자.’
카나린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둘러대면 공작도 쌍둥이도 별말 없이 넘어갈 것이다. 나는 스스로의 발상에 뿌듯해하며 상자와 리본을 찾았다.
‘잠깐. 만약 쌍둥이가 카나에게 선물 뭐 받았냐고 물어보면 어쩌지?’
쌍둥이라면 충분히 물을 가능성이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카나린에게 줄 선물도 준비해야겠네. 그런데 뭘 주지? 고민을 해결했더니 새로운 고민이 등장했다. 팔짱을 끼고 선물에 대해 생각하다가 일단 나가자는 결론이 나왔다.
‘오늘 축제니까 상인들이 많을 테니 작은 액세서리류로 사면 되겠다.’
드레스에 숨길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선물 종류는 별로 없다. 그중에서 가장 알찬 선물이 보석 박힌 액세서리지! 나중에 카나린에겐 따로 부탁해서 과자랑 같이 받았다고 말해 달라 해야지. 겉옷과 액세서리의 크기 차이가 나니까 큰 상자에 귀걸이나 반지만 들어있었다고 들으면 이상함을 눈치챌 것이 뻔했기에.
“아가씨 준비하셔야 합니다.”
“첼시, 조금 피곤해서 그러는데 점심 먹고 준비할게.”
“많이 안 좋으세요? 의원님 불러올까요?”
“아니. 그 정도는 아니고 어제 잠을 설쳤더니 조금만 더 자고 싶어서.”
“알겠습니다. 그럼 점심 식사 때 다시 깨우러 오겠습니다.”
파티가 있는 날은 아침부터 목욕에 마사지에 이것저것 준비해야 하는데 나는 잠을 설쳤다는 핑계로 미뤘다. 내가 워낙 귀찮아하는 것을 아는 첼시는 내 변명에 의심하지 않고 물러났다.
‘좋아. 시간은 벌었다.’
나는 책상 서랍 가장 아래 칸에 숨겨둔 옷을 꺼냈다. 까슬까슬한 재질의 평민 옷.
내가 아무리 외출 안 하고 공작가 안에서만 살았다지만 매년 건국제만큼은 그냥 넘기지 않았다. 어린 시절 쌍둥이의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어 처음에는 기사들과 함께 밖에 나갔고, 다음 해엔 쌍둥이가 평민 옷을 준비해오더니 몰래 탈출하자고 졸랐다.
‘올해는 건국제 파티에 참석해야 하니 못 나갈 거라 생각했는데.’
어쩌다 보니 혼자 나가게 됐다. 나는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시녀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일꾼들이 다니는 문으로 향했다. 뒷문이라도 당연히 경비병은 있었다. 내 목적지는 뒷문이 아니었다.
‘여기서 열 걸음.’
공작가의 비밀통로.
쌍둥이의 말로는 직계에게만 전해지는 통로라고 한다. 비상용인지 아니면 유희용인지는 모르겠으나 뒷문으로 가는 길 조각상이 있는데 그곳에서 열 걸음을 걸으면 비밀 통로가 나온다.
“멍멍!”
“쉬잇!”
후원에서 뛰어놀던 밤이가 귀신같이 내 냄새를 맡고 달려왔다.
나는 사람의 이목이 쏠릴까 화들짝 놀라며 다급하게 검지로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다행히 알아들었는지 밤이는 헥헥거리며 제자리에 앉았다.
“착하지. 나 나갔다 올 테니까 얌전히 있어야 한다.”
“끼잉!”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돌아섰더니 밤이가 내 치맛자락을 물고 놔주지 않았다.
같이 가겠다는 건가? 난감했다. 시리우스와 마력으로 연결된 것도 찝찝했으나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목줄도 없는데 어떻게 데려가지?’
따로 산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넓은 후원에 풀어놓고 지냈기에 목줄이 없었다. 거기다 지금은 축제 기간이라 사람이 더욱 붐빌 터.
“밤아, 데려가고 싶지만 목줄이 없어서 안 돼. 금방 갔다 올 테니까 이것 좀 놔주면 안 될까?”
“끼잉, 끼잉.”
밤이는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하게 낑낑대기 시작했다. 고민은 짧았다. 아니 고민할 시간조차 없었다. 주어진 시간은 고작 점심시간 전까지. 아무리 상가 거리까지 가깝다지만 마차 없이는 30분 이상 걸렸다.
“얌전히 있어야 한다.”
“멍!”
나는 한숨을 쉬고 머리카락을 묶은 리본을 풀었다.
만약을 대비해서였다. 혹시나 떨어지더라도 목에 리본을 묶어 놓으면 주인이 있다고 생각할 테니.
‘진짜 똑똑하단 말이야. 감각은 안 이어졌겠지?’
나는 약간 의심스러운 눈으로 품에 안긴 밤이를 내려다봤다. 밤이는 순진한 눈망울로 나를 보더니 얼굴을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내가 귀여운 거에 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하는 행동 같았다. 휴, 귀여우니까 어쩔 수 없지.
밤이 때문에 잠시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조각상에서 열 걸음 떨어진 비밀 통로. 환영 마법이라도 걸려있는지 평범한 성벽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성벽을 향해 걸어갔다.
‘언제 봐도 신기하네.’
성벽은 내가 통과할 때 꿀렁거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빨리 움직이자. 밤이 때문에 예정보다 늦어졌어.’
나는 밤이를 안고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3시간 정도면 충분할 거라 생각했는데 밤이랑 실랑이를 벌이다 보니 조금 촉박해졌다.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데 대략 1시간이라 치고 빠르게 선물을 고르면 점시 시간에 맞춰 돌아갈 수 있겠다.
“동쪽에서 들어온 희귀한 과일 한번 맛보세요!”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1년에 단 한 번! 건국제 기간에만 만날 수 있는 필린 유랑단이 돌아왔습니다!”
“아가씨 여기 구경하고 가!”
거리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이 많아졌다. 구경꾼들과 상인들로 넘쳐나는 거리는 평소보다 훨씬 떠들썩했다.
“가만히 있어야 해.”
이렇게 많은 인파를 보는 게 처음인 밤이가 놀라진 않을까 걱정됐다. 그러나 내 걱정과 달리 밤이는 멀쩡해 보였다. 평범한 강아지가 아니었다는 걸 잊었네. 나는 밤이에 대한 생각을 접고 호객들을 지나 잡화류가 많은 노점상 쪽으로 이동했다.
거리 곳곳에 하얀 천막을 친 노점상이 늘어져 있었다. 상인의 말대로 보기 힘든 동대륙의 장신구부터 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생활용품까지 다양한 종류의 물건들이 즐비했다.
‘주황색이나 빨간색 계열로 사고 싶은데.’
나는 그녀에게 어울릴 만한 액세서리를 찾아 돌아다녔다. 품에 안고 있는 밤이가 무거웠으나 가만히 있는 것에 감지덕지라 생각하며.
“멍멍.”
“왜 그래? 배고파?”
“머엉. 멍!”
미안하지만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전혀 모르겠다.
얌전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밤이는 앞발로 꼼지락댔다. 내려달라는 건가? 하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밤이를 내려놓는 순간 인파에 쓸려 갈 것 같았다. 나는 품 안에서 버둥거리는 밤이를 달래며 고쳐 안으려고 했다.
“세르니아?”
그런데 뒤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시장통에서 나를 부를 사람이 있었나? 내 좁은 인맥을 떠올리며 돌아봤는데 거기엔 의외의 사람이 서 있었다.
“황태자님?”
“어이. 아무리 눈치 없다지만 여기서 그렇게 말하는 건 너무하지 않아?”
헬리오스는 능글맞게 웃으며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