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50화 (5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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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이 저주를 푸는 쪽이고, 이성이 저주를 하는 쪽이었습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나를 갈구하는 마음 자체가 감정을 느끼는 것이고 이성으로 억누르는 것은 감정을 억제하는 일이었기에. 이성과 본능을 이야기하던 시리우스가 갑자기 내게 질문을 던졌다.

“정령의 힘으로 이루어진 저주와 마력으로 이루어진 저주와 차이를 아십니까?”

“차이?”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태껏 저주나 마법에 관한 책은 많이 읽었으나 정령과 연관된 저주는 어떠한 책에도 나오지 않았었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신유신’에서 언급된 부분이 다였다.

‘정령이 있는 곳에서 저주가 약해지는 건가?’

나는 그의 뒷말을 기다렸다. 대화 도중 처음으로 머뭇거린 그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정령의 힘으로 이루어진 저주는 살아있습니다.”

“저주가 살아있다고?”

“네. 정확히 말하자면 정령의 힘으로 저주를 거는 것이 아니라 정령을 매개로 저주를 겁니다.”

정령을 매개로 하다니. 소설에도 서술되지 않은 부분이었다. 나는 저주가 살아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해 미간을 찌푸렸다. 저주가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단 말인가.

“어머니에게 걸린 저주는 탯줄을 타고 제게 이어졌습니다. 제 몸속에 저주의 매개로 이용된 정령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정령이 살아있기 때문에 저주가 살아있다는 건가? 아니, 아니었다. 설마. 나는 어렴풋이 그가 왜 시계탑에 갇혀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왜? 만약 내가 시리우스였다면 절대 하지 않을 선택이었다.

“저는 이성을 선택했고, 제 몸속에 있는 정령의 힘을 빌려 저주를 강하게 했습니다. 문제는 정령의 힘이 폭주해서 혼자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루카리온 선생님에게 부탁했습니다.”

스스로 감정을 봉인했다. 그리고 자신의 발로 시계탑 지하실로 들어간 것이겠지. 시리우스를 시계탑에 감금시킨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기에. 검성은 알고 있었구나. 나는 걱정 말라고 하던 단호한 검성을 떠올렸다. 어쩌면 사슬을 감은 사람이 검성일지도.

‘저주가 살아있다는 건 조건이 만족되면 자동으로 풀리는 저주가 아니라 정령의 뜻대로 저주가 강해지거나 약해질 수 있다는 뜻이구나.’

단순하게 정령으로 이루어진 저주라서 정령이 많은 곳에 가면 약해진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 또한 저주가 살아있기 때문이었다. 별거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그의 말은 복잡했다. 한 문장 안에 짚고 넘어갈 점이 많았다. 어디서부터 물어야 할까.

“정령과 소통이 가능한 거야?”

첫 번째 의문이었다.

‘소설에서 분명 저주에 이용된 정령은 타락하거나 소멸한다고 했었지.’

시리우스의 몸 안에 있다는 것은 타락했다는 뜻. 그런데 정령의 힘을 빌려 저주를 강하게 했다는 말은 타락한 정령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시리우스는 내 질문에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을 했다.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직접적인 대화는 물론이고 간단한 소통도 불가능합니다. 다만 정령의 존재만큼은 분명하게 느껴집니다.”

시리우스는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렸다. 심장에 정령이 존재한다는 건가. 시리우스는 내가 궁금해하는 바를 정확하게 캐치하고 자세하게 설명했다.

“정령의 힘을 빌려 저주를 강하게 한 건 정령과 소통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저주 자체를 자극시켰습니다. 기존에 있던 저주의 전제를요.”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가 지금 의문을 푸는 건지 의문을 늘리는 건지. 내 머리로 그의 말을 열심히 따라가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시리우스의 저주는 황후가 출산을 못 하도록 황비에게 건 것이라 생각했는데 다른 건가?

“어머니가 받은 저주는 영혼의 봉인이었습니다. 육체는 살아있으나 의식이 없는 상태였죠. 그 저주가 제게 이어지면서 조금 약화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감정만 봉인된 상태로 태어난 것입니다.”

순간 머리가 띵했다.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저주였다.

소설에서는 2주 정도 늦게 태어났다고 서술되어있었기에 나는 당연히 황후가 출산을 못 하는 저주를 걸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의식을 잃어서 출산을 하지 못한 거구나.’

이 세계에 제왕절개가 있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겠지. 식물인간이 되더라도 희박한 확률로 자연분만이 가능하다고 들은 적 있었는데 사실이었다니. 그 상황에서 시리우스가 무사히 태어난 것이 기적이라 느껴질 정도다.

“저주에 제 마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저주가 강해지도록. 정령이 폭주할 거라고는 예상 못 했지만요.”

질척이고 기분 나쁜 어둠이 저주받은 정령에 기운이었다니. 첫 번째 의문이 풀리자 곧바로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그럼 저주가 강해져서 눈 색이 다시 검은색으로 돌아갔잖아. 그런데 어째서 여전히 감정을 느끼는 거야?”

그가 흘린 눈물은 연기가 아니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그의 감정이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절대 흘릴 수 없었다.

“구멍 난 그릇이라고 연상하시면 이해가 편할 겁니다. 이미 한 번 느꼈던 감정이었기에 아무리 막아도 세르니아 님을 만나는 순간 다시 흘러넘치거든요.”

오글거리는 대사를 잘도…….

이번에도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었다. 나는 다음 질문을 하는 대신 잠시 숨을 골랐다. 솔직히 이건 물어볼지 말지 망설여졌기에.

“왜…… 왜 이성을 선택한 거야?”

해소되지 않는 마지막 의문.

대부분의 인간은 자기중심적이다. 내가 시리우스의 입장이었다면 본능을 택했을 것이다. 저주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 그런데 시리우스는 이성을 선택했다. 왜 스스로 저주를 강화하고 시계탑으로 들어간 거지?

“세르니아 님과 약속했으니까요.”

그렇게 말한 시리우스는 달빛보다 하얀 웃음을 머금었다.

‘약속이라니. 겨우 그런 약속 때문에…….’

무려 1년이 넘는 시간이었다. 내가 공작가에서 평안한 일상을 보내는 동안 그는 어두운 지하실에 갇혀있었다.

시리우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아 쉽사리 뱉지 못했다. 대체 내가 그에게 뭐라 할 수 있을까. 저주를 풀기 위해 본능에 충실하라고?

‘아니. 나는 아까처럼 거부하겠지.’

본능에게 잠식된 시리우스는 내가 감당하기 어려웠다.

다가가는 것도 물러서는 것도 그를 힘들게 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순식간에 거리감을 잃어버린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나는 입을 벙긋거리기만 할 뿐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세르니아 님의 탓이 아닙니다. 이건 저 혼자만의 감정인걸요.”

“…….”

마치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안다는 얼굴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나를 멋대로 휘두르고 집착하던 녀석이 무슨 심경의 변화일까.

“제가 옆에 있도록 허락만 해주신다면야 제가 더 노력해서 세르니아 님 마음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이 녀석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정말 한숨이 끊이질 않는다. 장난스러운 말투였으나 장난이 1도 섞이지 않았다는 것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선뜻 대답 못 하고 곤란해하자 시리우스는 자연스럽게 주제를 돌렸다.

“저도 궁금한 것을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응.”

“지하실에 세르니아 님이 나타났을 때는 환상인 줄 알았습니다. 목소리를 듣고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질문을 한다던 시리우스는 뜬금없이 지하실에서 만났던 감상 소감을 이야기했다. 검은 눈을 반짝이며 ‘꿈에 자주 나와서 이번에도 꿈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궁금한 거 묻는다더니.

“아카데미에는 어떤 일로 오셨나요?”

시리우스는 1년이나 넘는 시간 동안 지하실에 있었기에 아카데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임시 선생님으로 취업했거든.”

나는 최근 있었던 일을 시리우스에게 간략하게 말했다.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 인력이 부족해서 내가 왔다고.

“안타까운 일이었군요. 사상자가 없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요.

시리우스는 굉장히 기쁘게 웃으며 말했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눈웃음을 보자 왠지 모르게 안심됐다. 오늘 겪은 일이 너무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일까. 어쨌든 대화가 적당히 마무리되고 슬슬 기숙사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기숙사에 통금시간은 없었지?’

학생들은 모르겠으나 선생님은 없었던 것 같다고 혼자 생각하다가 문득 시리우스는 상체 탈의를 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진지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잊고 있었다. 자업자득이지만. 가을이라 밤이 되면 꽤 쌀쌀해서 조금 걱정되긴 했다.

“안 추워?”

“네. 괜찮습니다.”

예전부터 느낀 건데 그의 몸은 예뻤다.

굵은 뼈대에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적당하게 붙은 잔 근육. 핏줄이 비칠 정도로 하얀 피부까지. 장인이 대리석으로 섬세하게 깎은 조각상 같았다.

‘핑크…….’

찬찬히 감상하던 나는 존재감을 뽐내는 핑크색을 보고 당황해서 얼른 시선을 돌렸다. 민망해라. 빨개진 얼굴이 티 날까 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세르니아 님?”

“아, 아니. 그만 돌아갈까? 오래 앉아 있었더니 이제 걸을 수 있을 것 같아.”

“힘드시면 제가 안아서 데려다드리겠습니다.”

“그건 좀.”

웃통 벗은 남학생에게 안겨서 교직원 기숙사까지 가면 지나가는 학생들의 시선은 물론이고 출근 첫날 징계 받을지도 몰랐다.

“아쉽습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내일 아침에 보잖아.”

“내일 볼 수 있는 거군요.”

“응. 그러니까 먼저 돌아가. 괜히 같이 있는 모습을 다른 학생에게 보이면 이상한 오해가 생길지도 모르니.”

상체 탈의한 남학생과 옷이 찢어진 선생님이라니. 보는 순간 신고감이었다.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말에 시리우스는 수긍하고 기숙사로 돌아갔다. 나는 시리우스를 보내고 한참이나 더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하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엔 시간이 더 필요했기에.

***

아침부터 나는 거울을 보고 충격에 빠져있었다. 어제는 정신없어서 못 봤는데 쇄골 쪽이 열꽃이 피어있었다. 울긋불긋한 자국이 너무 생소해서 잠결에 벌레에 물린 건가 하고 생각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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