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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겠네.’
성대 옆까지 키스 마크가 남아있어서 문제였다. 셔츠로 가려지지 않는 자리라 목까지 다 덮는 옷이 필요했다.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겨울옷을 많이 챙긴 것이 신의 한 수였다.
‘이게 최선인가.’
가져온 겨울옷은 너무 두꺼워서 도저히 지금 입을 수가 없었다. 잠깐 절망에 빠졌지만 다행히도 스카프를 발견했다. 챙긴 기억은 없었으나 데이지나 첼시가 넣어놨겠지. 흰 셔츠에 진녹색 스카프를 두르자 어제의 흔적이 감쪽같이 가려졌다. 전쟁 같은 준비가 끝나갈 무렵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똑.
“누구세요?”
이른 아침부터 나를 찾을 사람은 쌍둥이밖에 없을 텐데. 교직원 기숙사는 학생 출입금지였기 때문에 쌍둥이는 아니었다.
“세르니아 님, 일어나셨습니까?”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케인이었다.
무슨 전달사항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문을 열었더니 케인이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케인 님, 좋은 아침입니다. 무슨 일 있나요?”
“좋은 아침입니다만 뒤에 질문은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네?”
무슨 일? 당연히 있었다. 시리우스와 있었던 일을 알고 묻는 건가?
케인이 어떤 의도로 묻는지 추측이 안 돼서 바로 답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내가 어색하게 웃기만 하자 케인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어제 종례를 빠진 이유를 묻고 있는 겁니다.”
“아!”
깜빡 잊었다. 수업은 아직 없었으나 조례와 종례를 꼭 들어가라고 했었는데. 케인의 표정은 내 탄식에 한층 더 험악해졌다.
“아? 지금 아 소리가 나옵니까? 타당한 이유가 아니면 시말서 쓰셔야 합니다.”
아…… 시말서라니.
그래도 케인은 이유를 듣고 화내려는지 분노를 꾹 누르고 있었다. 말 잘못 하면 하루 만에 잘릴지도. 나는 아침이라 굳어있는 머리를 맹렬히 돌렸다. 생각해, 케인이 납득할 변명을 생각해!
“그, 그게 어제 병결인 학생 상태를 보러 갔는데 생각보다 심각해서 간호한다고…….”
나는 뇌가 없는 걸까.
어떻게 저게 변명이냐고! 진실이 절반쯤 섞인 거짓말이었으나 케인이 납득할 만한 변명은 아니었다. 나는 벼락처럼 떨어질 그의 분노에 눈을 꼭 감았으나 벼락 대신 바람이 내려왔다. 깊은 한숨을 쉰 케인은 내게 종이 뭉텅이를 건넸다.
“다음부턴 절대로 빠지지 마세요. 첫날이라 봐주는 겁니다. 알겠습니까?”
“네! 명심하겠습니다.”
최대한 신뢰감 있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런 나를 복잡 미묘한 눈으로 보던 케인은 안경을 올리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어제 종례를 마치고 할 예정이었으나 세르니아 님이 종례를 빠진 덕분에 제가 챙겨왔습니다.”
“계약서?”
나는 종이 제일 위에 적힌 글자를 읽었다.
장황하게 쓰여 있었으나 핵심만 요약하자면 아카데미 임시 선생님으로 고용한다는 근로계약서였다.
“네. 월급과 복지 혜택이 적혀있으니 확인하고 서명해주세요.”
“아, 네.”
나는 방으로 들어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깃펜을 들었다. 케인은 방에 들어올 생각이 없는지 문 앞에서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주 5일 근무, 숙식 제공, 휴식 시간도 있었고, 야근도 없고 은근히 복지가 좋네.’
거기다 통신사 할인 카드마냥 마을 가게와 제휴가 되어있는지 50% 할인도 됐다. 나는 3장이나 되는 근로계약서를 꼼꼼히 읽어보고 마지막 장에 사인을 했다.
‘이름을 쓸 때는 신중히!’
종이 뭉텅이는 책 한 권 정도 분량이 됐다. 이게 다 서류야? 나는 계약서를 넘기고 남은 종이를 후루룩 훑어봤다.
“계약서에 서명하셨으면 뒤에 있는 동의서에도 서명해주세요. 나머지는 아카데미 생활 규칙과 안내서입니다.”
안내서는 보통 책자로 주지 않나 생각하며 동의서를 읽었다. 아카데미에서 일하는 동안 신분에 관계없이 아카데미 내의 직급에 따라 명령을 수행한다는 동의서였다. 신분제 사회라서 예민하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라 동의서를 따로 쓰나 보다.
“여기요!”
기다리고 있던 케인에게 서류를 건넸다. 그는 서명된 곳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빼먹지 말고, 지각하지 말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자기에게 물어보라는 긴 충고를 남기고 그는 돌아갔다.
‘정말 아침부터 무슨 난리야.’
일찍 일어나서 다행이었지 준비가 늦었다면 울긋불긋한 목을 보일 뻔했다. 봤다면 진짜 해고당했겠지.
‘오늘 일진이 사나운데.’
몸 사려야겠다.
나는 두툼한 안내 종이를 가방에 넣고 교실로 향했다. 안내 종이는 개인 연구실에 놔두고 보기 위해 챙긴 것이다. 딱 봐도 잠 올 것 같은 내용이라 침대에서 읽으면 꿀잠 예약이었다. 물론 방에도 책상은 있으나 침대랑 가까우면 자꾸 눕게 되는 습관이 있어서 방에서 공부는 불가능했다.
기숙사에서 나오자 학생들이 등교하고 있었다.
하얀 아카데미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모두 생기가 넘쳐 보였다. 그들을 보고 있으니 흐뭇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좋을 때지. 아카데미 다닌 적은 없지만.
“안녕하세요.”
“응. 안녕.”
반 아이였는지 조심스레 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확실히 유치원이랑은 다르구나. 당연한 거지만. 쌍둥이가 하도 유치원생처럼 행동해서 다른 또래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행동이 성숙해 보였다. 내가 건물에 도착하자 타이밍 좋게 아침 종이 울렸다. 약간 긴장돼서 교실 앞에서 심호흡을 하고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야! 어제는 내가 일이 있어서 종례 못 했어.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미안해.”
자리에 앉아 있던 아이들의 인사를 받으며 어제 일에 대해 사과를 했다. 그들은 내게 관심이 없는 건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몇 명은 빼고.’
특히 두 명이 아침에 봤던 케인만큼이나 무서운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쌍둥이에겐 뭐라고 변명하나 고민하며 반을 훑어봤다. 어제 무슨 일 있었는지 호기심 묻은 눈으로 보는 헬리오스와 걱정을 담은 카나린, 별생각 없어 보이는 그렌드윈과 교실에 내가 들어와서 놀란 시리우스까지!
‘담임이라고 말하는 거 잊었네.’
정신이 없어서 그냥 임시 선생님이라고만 설명했었다. 시리우스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아침햇살보다 화사하게 웃었다. 나는 차마 미소에 화답하지 못하고 쌍둥이의 눈치를 보며 시선을 돌렸다.
“오늘 전달사항은 없다. 다들 수업 잘 들어!”
시리우스의 웃음을 무시한 게 되어서 가슴이 따끔했지만 여기서 아는 척하면 적어도 아리엘에게는 들킬 것이다. 어제 종례를 빠진 이유가 시리우스와 관련됐다는 것을.
‘아리엘은 눈치가 빠르니까.’
내가 문을 나서기 무섭게 쌍둥이가 따라 나왔다.
올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기세가 생각보다 무서워서 변명이고 뭐고 그냥 도망칠까 하고 잠시 망설였다.
“언니! 어제 대체 무슨 일 있었어요?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맞아요. 케인 선생님도 루카리온 선생님도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하시고.”
케인이랑 검성을 들먹이며 변명하려고 했는데 빼야겠군. 나는 벽으로 몰아붙이는 쌍둥이에게 일단 진정하라고 했다.
“어제 갑자기 원장님이 부르셨거든. 계약서랑 이것저것 서류처리 해야 할 게 있다고.”
좋아. 케인에게 했던 변명보단 믿을 만한 변명이었다.
쌍둥이도 내가 원장실에 있었다고 하자 더 이상 다그치지 않았다. 그저 걱정했다고 칭얼거릴 뿐.
“괜찮아. 설마 아카데미에서 무슨 일 있겠어?”
“…….”
아, 무슨 일 있었구나.
최근에 있었던 아카데미 테러 사건. 요 며칠 쌍둥이가 공작가에 있을 때보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신경 쓰는 것 같더니.
아카데미는 원래 철저한 보안으로 제국 내에서 황궁 다음으로 안전한 구역이라 불렸다. 그 명성은 이번 테러 사건으로 무너졌지만. 그래서 쌍둥이는 뒤숭숭한 시점에 아카데미 선생님으로 온 내 안전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야 범인을 알아서 걱정 없는 거지.’
무신경하긴 했다. 아직 범인과 테러에 관해 밝혀진 것이 없었기에 아카데미 내에선 조심하는 분위기였다.
“아카데미에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다고 들으셨죠?”
“응.”
“루카리온 선생님이 조사 중이시긴 한데 아직 위험하니까 혼자 다니지 마세요! 알겠죠?”
“맞아요. 누님은 오지랖이 넓으니까요.”
뼈를 너무 세게 때리는데요. 적어도 불의를 참지 못한다거나 정이 많다고 포장이라도 해주면 안 될까.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조심할게. 그런데 너희들 아무리 사촌이라지만 여기선 선생님이라고 불러야지!”
“아, 입에 언니가 붙어서…….”
“선생님이라니 안 어울…….”
나는 쌍둥이가 테러 사건에 관심을 가지지 않도록 에리얼의 볼을 잡아당기며 주제를 바꿨다. 그들이 테러 사건으로 불안에 떨지 않았으면 했기에. 어차피 걱정하는 일도 없을 거고.
“그보다 너희 너무한 거 아니야? 어제 자기소개 하고 얼마나 민망했는데. 카나가 박수 안쳤으면 나는 거기서 부끄러워서 죽었을 거야.”
“그게 언니가, 아니 선생님이 교단에 있는 게 신기해서요.”
“자알 못 해써여.”
아리엘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말했고, 에리얼은 볼을 꼬집혀서 새는 발음으로 잘못했다며 울상을 지었다.
“그래. 오늘 수업 잘 듣고 종례 시간에 보자.”
“네!”
“네.”
쌍둥이는 각자 선택한 수업을 들으러 갔고, 나는 연구실로 향했다. 어제는 시리우스 때문에 정신없어서 잊고 있었으나 헬리오스보다 먼저 증거를 찾아야 했다.
‘검성이 조사라니. 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하지 못한 거였나.’
원작에서 검성은 사건을 조사하지 않았다.
아카데미에서 따로 수사팀을 만들지만 그 안에는 검성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제 보니 룬반 담임선생님을 맡고 있어서였나?
나는 2학년 때 소설 주요 등장인물이 전부 모여 있었던 것이 스토리 전개상 인물들이 자주 부딪혀야 하기 때문에 넣어놓은 설정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고 관리하기 어려운 애들 한 반에 몰아넣고 검성에게 맡긴 거군.’
아카데미가 아무리 신분이 상관없는 장소라지만 은연중에 어쩔 수 없이 신경 쓰게 되어있다. 신분이 낮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황족이나 공작가의 아이들에게 막 대할 수 있는 선생님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나마 검성 정도 돼야 가능한 거지.
‘내가 와서 검성이 테러를 직접 조사하는 건가.’
아카데미에서 굳이 나를 부른 것은 검성이 반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조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