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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설명을 듣고 겨우 납득했는지 헬리우스는 나를 더 이상 막아서지 않았다. 그런데.
“왜 따라오는 거야?”
나는 따라오는 헬리오스를 제지하며 물었다.
그는 당연히 따로 조사할 거라 믿었기에. 그러나 헬리오스는 무슨 소리를 하는 눈으로 말했다.
“방금 선생님의 입으로 말씀하셨죠. 드란 선생님이 가장 큰 단서라고. 그걸 놓칠 순 없잖아요?”
맞는 말이긴 하나 이대로 헬리오스도 같이 원장실로 가면 테러 조사를 하기 위해 아카데미에 왔다는 거짓말이 들통난다!
나는 초조한 마음을 숨기며 그를 막으려 했다.
“너는 현장을 더 조사해보는 건 어때? 드란 선생님이 회복되면 알려줄게.”
“건물은 이미 다 둘러봤으니까 괜찮습니다.”
헬리오스는 멈추지 않고 쫓아왔다
연구실에서부터 시작된 실랑이는 건물을 빠져나갈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너 혼자 몰래 조사하는 거 아니었어? 원장님이 아셔도 괜찮은 거야?”
“제가 혼자 조사한 건 선생님들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그랬어요.”
말문이 먼저 막힌 사람은 나였다.
더 이상 변명해봤자 그의 의심만 키울 것 같아서 포기했다. 헬리오스를 떼놓으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어쩔 수 없이 다 같이 원장실로 향하려고 했다. 내 목을 노리고 날아오는 단검이 아니었더라면.
깡!
정확하게 목을 노리고 날아오던 단검이 눈앞에서 튕겨 나갔다. 반투명한 막이 일순간 내 앞을 막아줬기에. 아마도 시리우스의 마법이겠지.
‘기습?’
단검이 마법에 막히자 나무에서 복면을 쓴 사람들이 나타났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나는 그들을 보며 데자뷔를 느꼈다.
‘데이지를 공격했던 복면인들인가?’
아무 표식도 없이 검은색 옷과 복면을 쓰고 있지만 왠지 모르게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일순간 격변한 분위기에 헬리오스는 검을 뽑았고, 시리우스도 드란을 내려놓으며 전투태세로 들어갔다.
“너희들은 누구냐!”
복면인들은 헬리우스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우리를 둘러쌌다. 그는 복면인들이 순순히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것을 느꼈는지 입술을 꾹 깨물며 검을 고쳐 잡았다.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아카데미에 어떻게 들어왔지?’
아카데미가 괜히 철통 보안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아카데미를 지키는 경비병, 황궁에 설치된 것과 똑같은 방어 마법뿐 만아니라 고대의 유물이라 전해지는 결계가 외부인을 통과시키지 않는다. 결계와 연결된 중앙 장치에 등록한 사람만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데 여기서 등록이란 게 단순한 정보 입력이 아니라 피까지 채취한다.
‘즉 아카데미 내부에 내통자가 있다는 거군.’
누군가 복면인들의 피를 중앙 장치에 넣어서 등록시켰기 때문에 침입이 가능했을 것이다. 진짜 환장하겠네. 껍데기만 튼튼했지 속은 썩어있었다.
“세르니아 님, 제게서 떨어지지 마세요.”
시리우스가 나를 품으로 당기면서 말했다. 예전에 혼자서 복면인을 다 해치운 시리우스라면 괜찮겠지. 나는 얌전히 시리우스의 옆에 붙어있었다.
‘헬리오스는 괜찮나?’
황태자라 기본적인 검술은 배웠겠지만 소설에서도 그의 무력이 표현된 장면은 없었다. 소드마스터라고 나왔던 에리얼과 최연소 기사단장이 될 그렌드윈에 비해서 평범했기에 헬리오스는 대체적으로 머리로 활약하는 장면이 자주 나왔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 유독 덩치가 큰 복면인이 손을 까딱했다. 동시에 복면인들이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검이 사방에서 덤벼들었으나 시리우스의 마법을 뚫진 못했다. 복면인들은 반투명한 막에 막혀 튕겨 나갔지만 가볍게 착지한 후 다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마법을 뚫지 못한다고 판단하고 행동을 바꾼 건가.’
투척무기와 근거리 공격까지 효과가 없자 당황한 기색이었다.
아카데미에 이 정도로 강한 마법사가 있을 거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헬리오스도 복면인들과 같은 마음인지 눈을 크게 뜨고 시리우스를 쳐다봤다.
복면인들은 마법사를 상대로 거리를 벌리면 더욱 불리해진다는 것을 알고 실드 마법을 뚫기 위해 일제히 공격했다. 그러나 돔형으로 우리를 감싸고 있는 마법은 그대로였다.
“멈춰.”
처음 손을 까닥한 복면인이 묵직한 한마디를 뱉었다. 나머지는 공격을 멈추고 뒤로 물러섰고, 대장으로 보이는 복면인이 검을 빼 들었다.
“오러!”
헬리오스는 남자의 검에서 일렁이는 시퍼런 마력을 보고 다급하게 외쳤다.
암살자 중에서 오러를 다룰 수 있는 자는 매우 드물다. 소드마스터보다는 아래였으나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한 번에 튕겨 나가던 복면인들과 확실하게 달랐다. 마치 단단한 쇠끼리 부딪친 것처럼 격렬한 소리가 퍼졌다. 끼이이익하는 소리가 커지더니 반투명한 막에 금이 갔다.
불안해하는 헬리오스와 반대로 시리우스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금이 점점 커지고 결국 실드 마법이 깨졌다.
“죽어라.”
복면인의 검이 시리우스를 향해 내리쳤다.
헬리오스가 황급히 막아서려고 했으나 시리우스의 손이 조금 빨랐다.
“컥…….”
날카로운 검이 시리우스의 머리카락에 닿기 전에 멈췄다. 복면인의 입에서 선혈이 흘렀다. 이내 몸이 서서히 무너졌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눈이 따라가지 못했다. 다만 시리우스가 손을 뻗자 복면인의 가슴에서 잠깐 빛이 반짝였던 것 같았다.
“무, 무슨!”
헬리오스는 경악했고, 나머지 복면인들은 상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들의 리더가 이리도 쉽게 죽을 거라고는 예상 못 했는지 서로 시선만 교환할 뿐 행동하는 이가 없었다.
시리우스는 무심한 눈길로 남은 복면인들을 훑었다. 허공에서 손을 휘젓자 하늘에 빛나는 화살이 무수히 만들어졌다. 빽빽하게 만들어진 화살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빛으로 만들어진 화살이 빗방울같이 떨어지는 장관은 굉장히 아름다웠으나 결과는 참혹했다. 끔찍한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우리를 제외하고 서 있는 사람이 없어지자 비가 그쳤다. 하얀빛이 사라지자 주위는 온통 붉었다.
‘저번보다 심한 것 같은…….’
처참한 풍경을 보고 씁쓸해하고 있었는데 시야가 가려졌다. 촉감만으로도 시리우스의 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험한 광경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실드 마법이 깨진 것 때문에 놀라서 힘 조절을 못 했다며.
그의 말을 들은 나는 한숨을 쉬었다. 시리우스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기에. 껄끄러운 침묵을 깬 건 쓰러진 복면인의 신음이었다.
“살아있는 건가?”
나는 복면인을 살펴보기 위해 시야를 가린 손을 치우려 했다. 그러자 시리우스가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 곧 익숙한 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렸다. 대체 무슨 일이지? 나는 앞도 안 보이는데 지진이 난 듯이 흔들려서 시리우스의 손에 의지해 균형을 잡았다.
“맙소사.”
헬리오스의 목소리였다. 그의 이상한 감탄사가 들리자 시리우스의 손이 떨어졌다. 시야에 존재했던 붉은 시체들이 사라져 있었다.
‘마법으로 땅에 시체를 묻은 건가.’
나는 깔끔하게 사라진 시체들의 행방은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유령이라도 본 얼굴을 하고 있던 헬리오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약간 질린 얼굴로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충격이 큰가 보군.’
헬리오스가 받은 느낌이 공감됐다. 경이로울 정도의 강함. 나는 평소와 같이 웃고 있는 시리우스를 보자 씁쓸한 마음이 커졌다.
괜히 나 때문에 또 이런 일이 생긴 것 같아서. 여전히 생명을 길가에 있는 돌멩이보다 가벼이 여기는 것 같아서. 사실 이번은 그때와 다르게 내가 부탁한 것도 아니었지만 내 마음이 무거웠다.
“죽이진 않았습니다. 이 녀석을 심문하면 뭔가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칭찬해달라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시리우스를 애써 무시하며 실드를 깬 대장 복면인의 코에 손을 가져다 댔다. 시리우스의 말대로 아주 희미했으나 숨은 쉬었다. 오른쪽 가슴에서 흐르는 피를 보니 즉사는 피했나 보다.
“너희들!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드란과 복면인을 원장실로 옮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노성이 들려왔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딱딱하게 굳었다.
“루카리온 선생님!”
“혼자 먼저 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뒤이어 다른 선생님들이 헥헥거리며 뛰어왔다.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다가오는 검성을 보며 시체를 치운 다음에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드란은 왜 쓰러져 있고, 이 녀석은 또 뭐냐?”
피를 흘리고 쓰러진 복면인을 발로 툭 차며 물었다.
‘망했다.’
내 머릿속에는 한 단어만 맴돌았다. 솔직히 지금 상황은 수습 불가능이었다.
헬리오스에게 친 거짓말을 들키지 않고 드란이 의식을 잃은 것과 복면인들에게 기습당한 것을 설명하는 것은 무리였기에. 다른 선생님들도 헬리오스와 시리우스도 나를 쳐다봤다.
‘이렇게 과한 관심은 좋지 않아.’
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헛기침을 했다. 우선, 시간을 벌어야 했다. 변명을 지어낼 시간을.
“일단 사제님을 부를 수 있을까요. 둘 다 생명이 위험합니다!”
나는 다급한 척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키가 작은 남자 선생님이 허둥거리며 자기가 불러오겠다고 사라졌다. 자, 이제 사제는 부르러 갔고. 나는 태연함을 가장하고 검성에게 다가갔다. 헬리오스와 시리우스를 힐끔 쳐다보며.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잠시 자리를…….”
내가 의미심장하게 이야기를 꺼내자 검성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옮겼다. 헬리오스와 검성이 같이 있는 자리에서 무리지만 따로 말하면 어느 정도 속일 수 있지 않을까.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뭐라는 거야.’
나와 검성이 자리를 이동하려는데 헬리오스가 입 모양으로 벙긋거렸다. 뭔가를 전하려고 열심히 벙긋거렸으나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검성은 팔짱을 끼고 매섭게 노려봤다.
나는 그의 시선을 받으며 담담히 말을 꺼냈다.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전에 루카리온 선생님에게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장난하는 건가? 아니면 아직 상황파악을 못 했나?”
검성은 진심으로 화났는지 노기를 숨기지 않았다.
가해지는 압력에 본능적으로 손끝이 떨렸지만 꾹 참고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테러 사건 현장에 몰래 들어온 것은 이번 일이 끝나고 벌 받겠습니다. 다만 제가 알게 된 사실은 루카리온 선생님의 대답을 듣지 않는 이상 먼저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