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선생님이 저를 부르다니. 무슨 일 있었나요?”
헬리오스는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그는 마치 내가 불러줘서 영광이라는 어투로 짓궂게 웃으며 다가왔다.
사감은 불러만 주고 자신의 볼일을 보러 갔는지 헬리오스 혼자 있었다.
“테러 사건 조사가 끝났어. 일단 너도 같이 조사했으니 알려주려고.”
다짜고짜 미심쩍은 부분이 뭐였냐고 물을 순 없어서 일부러 그가 관심 가질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아니나 다를까 사건이 해결됐다고 알려주자 헬리오스는 눈을 반짝이며 어떻게 됐는지 물었다.
‘그리고 헬리오스는 단검을 봤기 때문에 미리 설명해 둬야 해.’
이틀 뒤, 공식적으로 발표할 때는 황실에 관한 것들을 제외할 거라 따로 말해두지 않으면 헬리오스가 또 의심할 가능성이 컸다.
‘근데 어디까지 설명하지.’
전부 밝힐 생각은 없었다.
헬리오스가 황후의 아들이지만 그녀의 계획까지는 모르고 있을 것이다.
“아카데미 내부에 내통자가 있었고 배후 세력이 아카데미에 혼란을 주려고 테러 사건을 일으킨 것 같아.”
“배후 세력이라니…… 어떤 자들인가요?”
“그건 아직 루카리온 선생님이 조사 중이야.”
“조사가 끝났다고 했잖아요.”
차마 황후라고는 말 못 하고 뭉뚱그려서 말하자 헬리오스가 어이가 없는 눈으로 봤다. 조사가 끝났다 했으면서 왜 또 조사하냐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드란 선생님이 가지고 있던 단검은 독단적으로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잖아. 그렇다고 공식적으로 밝히기도 애매하다는 거 알지? 아직 어떤 세력이 연관됐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단검의 존재를 밝히면 오히려 아카데미 입장이 불리해져. 그래서 단검에 대한 것은 빼고 사건이 해결됐다고 발표하고, 배후를 추적하는 거지.”
“황실에 도움을 요청하면 되잖아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만약 황실과 관련 있다면?”
“지금 황실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헬리오스의 얼굴이 대번에 구겨졌다.
확실히 방금 발언은 위험했다. 황태자 앞에서 할 말은 더더욱 아니었고. 하지만 그도 언젠가 알아야 했다.
‘황후의 목적이 헬리오스를 황제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브릴리언 왕국에 넘기는 거라면 언젠가 헬리오스와도 척을 지게 될 거야.’
헬리오스는 멍청하지 않았다.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니었고. 가끔 빈정거리는 말투가 짜증 나긴 하나 그는 현명한 황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황실의 의심하는 게 아니야. 황실 깊은 곳에 제국을 흔들고 싶어 하는 세력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 아카데미에 숨어 있었던 것처럼.”
“…….”
그러니 아주 작은 의심을 그에게 심는 것이다. 황궁의 사람을 절대적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자신이 진심으로 신뢰할 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그는 입을 다물고 깊은 갈등에 빠졌다. 내가 하는 말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이해했을 것이다.
“근데 너는 왜 테러 사건을 조사한 거야? 그때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고 했지.”
나는 침묵이 흐르는 틈을 이용해 본론을 꺼냈다.
상념에 잠겨 있던 헬리오스는 잠시 머뭇거렸으나 의외로 쉽게 말했다.
“어머님에게 편지를 받았습니다.”
황후의 편지?
나는 무슨 내용이 적혀 있을지 궁금한 한편으로 그녀의 철저함에 혀를 내둘렀다. 헬리오스가 움직인 것마저 황후의 계획이었다니.
“이번에 황궁에서 새로운 연구원이 이동했는데 옛날에 루카리온 선생님과 안 좋은 일이 있었던 자라서 걱정된다고 하더군요. 혹시 모르니 그를 지켜봐달라는 부탁이 담긴 편지였습니다. 그 편지를 받은 바로 다음 날 테러 사건이 일어났고 하필 그 연구원이 있던 곳에서 발생한 일이라 어머님의 걱정이 진짜가 된 것은 아닌가 확인하러 간 거였습니다.”
역시.
모든 것이 황후가 만든 판 위에서 체스 말처럼 움직였다.
‘그녀의 계획을 알아차리지 못한 결과가 원작의 결말이라는 건가.’
나는 서술 트릭에 숨겨진 것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소설의 흐름대로 가서는 안 된다는 것도.
“그랬구나. 알려줘서 고마워. 근신 잘하고, 나중에 뭔가 더 나오면 알려줄게.”
“근신은 언제까지입니까?”
외향적이고 활달한 헬리오스는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게 괴로워 보였다. 나랑은 상관없지만. 나는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야 나는 모르지. 루카리온 선생님이 내리신 거니.”
궁금증을 해결했으니 볼일은 끝났다. 나는 입술이 불퉁하게 나온 헬리오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개인 연구실로 향했다. 생각을 정리할 것이 많았기에.
‘황후가 긴 시간 동안 숨죽여 준비한 계획. 이건 빙산의 일각이겠지.’
이번 사건이 실패로 돌아갔으니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바뀔 수도 있었다.
여전히 나는 힘이 없었다. 그녀와 대치할 세력도 혼자 싸울 힘도 없이 나약했다. 그렇더라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을 하기 위해선 머리를 돌려야 했다.
‘겨우 첫걸음인가.’
***
5. 결정은 소신으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뭐지?’
낯선 감각이었다.
내가, 내가 아닌 기분. 마치 1인칭 관찰자가 된 느낌이었다. 시야가 변하고 몸은 움직이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지켜보는 것밖에 없었다. 보이는 풍경은 익숙한 아카데미였다. 싱그러운 봄의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꿈인가?’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시각은 있지만 나머지 감각들이 흐릿했다. 소리도 냄새도 희미하게 느껴졌다. 이게 자각몽이라는 건가. 보통 꿈이라고 깨달으면 깬다고 하던데 깨진 않았다.
‘날고 싶다고 생각하면 날 수 있다고 했나?’
어딘가에서 얼핏 들은 적 있는 지식 떠올라 날고 싶다고 생각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실망한 나는 그저 꿈에서 깰 때까지 영화 관람하듯이 지켜보고 있었다. 뭔가를 하고 싶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반강제적인 시청이었지만.
‘어? 익숙한데.’
언제까지 계속될 것만 같은 지루한 아카데미 전경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헬리오스였다. 나와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입은 벙긋거렸으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또 아는 얼굴이 있었다.
‘에리얼이랑 아리엘이다!’
나는 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신나게 부르려고 했다. 그러나 내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쌍둥이가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눈이 잠깐 마주친 아리엘이 미간을 찌푸린 건 기분 탓일까.
‘무슨 꿈이 이렇게 답답해. 꿈이라 눈도 못 감네.’
꿈에서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다니.
나는 차라리 얼른 꿈에서 깨길 바랄 정도였다. 그러나 내 바람과 달리 꿈은 길게 이어졌다. 익숙한 아카데미에 익숙한 얼굴들이 등장했고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익숙한 상황이 일어났다. 그것을 인지하자 순간적으로 모든 감각이 생생해졌다.
“신입생 대표인 데이지 학생의 연설이 있겠습니다.”
커다란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낯선 강당 냄새와 따뜻한 봄의 햇살이 느껴졌다. 내 몸이 움직였다. 위풍당당한 걸음으로 단상 위에 올라섰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수많은 학생들의 시선을 받으며 당당히 연설을 시작했다. 내가.
나는 데이지였다.
***
“하. 또 이 꿈인가.”
아카데미 테러 사건 이후 나는 종종 꿈을 꿨다. 내가 데이지가 되는 꿈을.
꿈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일어나는 일을 지켜볼 뿐. 소설이 드라마로 제작되어 감상하는 기분이었다.
‘단점이 있다면 스킵이 안 되는 거.’
궁금하지도 않은 내용을 억지로 봐야 하는 것이 사람을 환장하게 만들었다.
그만 보고 싶어도 깨어날 수 없는 답답함! 흥미 없는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보다 더 괴로웠다.
‘예고도 없고.’
전조 증상도 일정 조건도 없이 랜덤으로 데이지 꿈을 꿨다.
내용은 소설 순서대로 차근차근 흘렀지만 꿈의 주기는 일정하지 않았다. 바로 다음날 다시 꾸기도 하고, 한 달이나 지난 후에 꾸기도 했다.
내가 데이지나 소설 내용을 생각하며 잠든다고 그 꿈을 꾸는 것도 아니었고 다른 일 때문에 바빠 죽겠는데도 데이지 꿈을 꾸는 날도 있었다.
‘대체 이유가 뭘까.’
처음 이 꿈을 꿨을 때는 아카데미에 와서 무의식적으로 소설을 떠올리고 자서 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꿈은 계속 이어졌다. 공작가에 돌아와서도.
솔직히 전생에 읽었던 소설에서 환생도 한 것도 말이 안 되는 상황이긴 했다. 그러니 더 이상한 일이 벌어져도 이상할 게 하나 없는 상황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며 내가 데이지일 가능성은 얼마나 될지 진지하게 고민도 했었다!
‘그건 절대 아닌 것 같지만.’
내가 데이지라는 것은 말이 안 됐다.
선명하게 기억나는 전생과 소설 내용, 이미 해피엔딩이 난 이야기에 데이지가 아닌 존재로 태어날 이유가 없었기에.
‘그렇게 된 거면 환생이 아니라 회귀인가? 데이지가 아닌데 회귀라고 쳐야 해?’
카오스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다. 데이지의 존재가 사라졌음에도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은 여기가 소설이 아니라 현실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한 후론 이제 여기가 현실인지 소설인지도 혼란스러워졌다. 결국 나는 명확한 답을 찾는 것을 포기했다.
‘답도 안 나오는 문제는 빠른 포기가 최고야.’
긴 꿈 때문에 자고 일어나도 영 개운치 않았다.
졸린 눈을 끔뻑이며 다시 잘까 잠시 고민했으나 이내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오늘은 졸업식이니까 꾸물거릴 수 없지.’
신기하게도 오늘의 꿈은 현실과 겹쳤다. 안 그래도 졸업식 장면 꿨는데.
찝찝한 기분과 반대로 겨울 하늘은 시리도록 푸르렀다.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방에서 나섰다. 쌍둥이를 맞이하려면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아가씨 식사준비가 다 됐습니다.”
노크를 하고 데이지가 들어왔다.
그녀를 보니 또 다시 꿈이 떠올라서 심란해졌으나 주어진 시간이 촉박했기에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작가에 돌아온 지 벌써 한 달인가.’
나는 아침을 먹으며 아카데미에서 추억을 곱씹었다.
3개월은 금방 지나갔다.
테러 사건 이후 특별한 일도 없어서 무난하게 아카데미 생활을 끝마쳤다. 사실 내 존재 자체가 검성이 테러 사건을 조사할 수 있도록 룬반을 임시로 맡는 것이었기 때문에 테러 사건이 정리되고는 딱히 있을 필요가 없었다.
‘3개월 안 채우고 가도 됐는데.’
그래도 인력이 부족한 것은 진짜라 건국제 지원을 나갔던 선생님이 돌아올 때까지 계속 일해야 했다.
‘나름 재밌는 경험이었어.’
1학년 아이들에게 수업하는 것도 즐거웠었다.
가르치는 직업은 내게 천직이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또 하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