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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 일어서자 대기하고 있던 첼시가 다가왔다.
“아가씨, 홀 정리 끝났습니다.”
“고마워. 장식은 어떻게 됐어?”
“지시대로 붉은 장미와 와인색 벨벳 원단으로 꾸몄습니다.”
오늘 있을 졸업식 축하 파티 준비로 공작가의 일꾼들은 부산스러웠다.
가족끼리 하는 가벼운 파티지만 성인식의 의미도 있기 때문에 정성스럽게 준비하고 있었다.
제국은 만으로 나이 계산하지만 성인이 되는 날은 특이하게 아카데미 졸업식을 기준으로 했다.
‘나처럼 아카데미를 졸업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저 성인식이지만.’
사실 졸업식에 가고 싶었다.
나름 기념적인 날이라 직접 가서 축하해주려 했으나 쌍둥이의 격한 거부로 무산됐다.
‘자업자득인 건 아는데 아쉽네.’
나는 테러 조사를 마치고 약속대로 쌍둥이에게 있었던 일을 이실직고했다. 물론 조금 순화시켜서. 침입자나 단검 이야기도 다 빼고 그냥 원장님이 테러 사건과 관련된 자료조사를 시켜서 바빴다고 말했다.
현장에는 잠시 갔다 왔으나 검성도 함께 갔기에 위험한 일은 전혀 없었다는 변명도 함께.
하지만 그들은 내가 자꾸 위험한 사건에 휘말리는 게 걱정이라며 공작가에 있기를 바랐다.
‘뭐 그렇게 큰 사건은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말이지.’
어쨌든 쌍둥이가 싫어해서 오늘은 얌전히 공작가 안에서 파티 준비에 집중하기로 했다.
홀을 둘러보고 시녀들과 함께 어떻게 하면 더 예쁘게 장식할 수 있을까 회의하다 보니 시간이 금방 갔다.
나는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공작부인과 차라도 마실까 생각하며 응접실을 지나 계단을 올랐다. 그때 밤이가 폴짝거리며 내게 달려왔다.
“밤아, 밥은 먹었어?”
“멍!”
겨울이 되어 밤이는 공작가 안에서 생활하고 있다.
꼬리를 흔들며 다가온 밤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기분 좋은지 안아달라며 앞발을 들고 낑낑거렸다.
“안 돼. 지금은 숙모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
“끼잉.”
밤이가 꼬리를 추욱 늘어뜨리고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생물체가 정말 강아지가 맞는 걸까 의심하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좀 있다가 놀아줄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멍멍!”
금세 밝아진 밤이는 꼬리를 흔들며 다른 곳으로 뛰어가는 모습을 보며 나도 계단을 올라 공작부인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세르니아 입니다.”
“들어와.”
그녀는 책상에 앉아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
원래 공작부인은 파티 준비를 같이하고 싶어 했었다. 안타깝게도 밀린 서류 때문에 참여할 수 없었지만.
‘삼촌도 그렇고 숙모도 그렇고.’
종이의 산에 묻혀 살았다.
건국제가 끝나고 신년 예산을 정해야 해서 최근 더 바빠졌기 때문이었다.
“준비는 잘 되어가니?”
“네. 숨 돌릴 겸 숙모랑 차 한잔하려고요!”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놨다. 옆에서 대기 중이던 첼시는 차를 준비하러 갔고 우리는 창문 너머 풍경을 보며 가벼운 잡담을 나눴다.
“신기하구나.”
“뭐가요?”
첼시가 준비해온 홍차를 입에 머금은 공작부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너와 이렇게 차 마시는 게.”
“1년이나 지났는걸요.”
“문득 공작가에서 다시 지낼 거라는 상상도 못 하던 과거가 떠올라서. 그땐 내 아이들의 성인식을 축하해 줄 거란 생각도 못 했었고.”
그녀는 아련한 과거를 음미하듯 말했다. 기분이 싱숭생숭하겠지. 자기 자식이 벌써 성인이 되었으니.
“가끔 현실이 믿기지 않을 때도 있어. 그래도 너와 마주 보고 차를 마시면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든단다.”
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숙모의 용기가 바꾼 현실이죠. 저는 언제나 숙모에게 감사하고 있답니다.”
진심이었다.
공작과 쌍둥이의 관계개선에는 내가 열심히 노력했으나 공작부인과 쌍둥이의 관계는 그녀 스스로 해결한 것이었다. 다시 공작가로 돌아온 것도 쌍둥이에게 다가간 것도.
“고맙구나.”
평온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로의 마음을 잘 알았기에 말이 필요 없었다. 오후의 티타임이 끝나고 나는 파티 준비를 마무리하기 위해 일어섰다.
***
“아가씨 아리엘 님과 에리얼 님이 돌아오셨습니다.”
데이지가 쌍둥이의 도착을 알렸다.
그리고 그녀의 뒤엔 쌍둥이가 있었다. 마중 나가려고 했는데 늦어버렸네.
“언니!”
“누님!”
쌍둥이를 향해 두 팔을 벌리자 그들은 내게 와락 안겼다.
2년이란 시간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갔다. 어리기만 하던 쌍둥이가 아카데미에 가기 싫다며 징징거린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졸업이라니. 감회가 남달랐다.
“졸업 축하해! 자세한 이야기는 저녁 먹으면서 하자. 얼른 짐 풀고 삼촌에게 인사하러 가야지.”
“네!”
“네!”
집무실로 올라가는 쌍둥이를 보며 나와 시녀들은 파티 준비를 마무리했다. 나도 방으로 가서 가벼운 파티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어서 가자꾸나.”
“네!”
드레스를 갈아입고 방을 나서자 공작부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도 서재에서 봤을 때와 다르게 남청색 드레스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졸업 기념 파티는 오직 공작가의 사람들만 초대했다.
신분에 상관없이 잡일을 하는 어린 하녀와 마부까지 모두 불렀다. 쌍둥이의 졸업과 성인이 된 것을 축하하는 파티라서 공작가의 사람들도 들떠있었다. 모시는 주인의 경사스러운 날이었으니.
“아가씨 빠짐없이 준비를 마쳤습니다!”
데이지가 발랄하게 문을 열며 말했다.
마지막까지 확인한 게 나인데도 막상 이렇게 보니 새로웠다. 붉은 장미로 꾸며진 홀은 아르덴타인과 잘 어울렸다.
“공작님과 에리얼 도련님, 아리엘 아가씨가 도착했습니다.”
나와 공작부인이 파티장을 구경하고 있는 사이 주인공들이 모두 모였다.
그들이 착석하자 파티가 시작됐다. 일하는 사람들도 모두 모여서 하는 파티라 음식은 미리 세팅되어 있었다.
“성인이 된 것을 축하한다.”
여전히 고저 없는 목소리였으나 쌍둥이는 감동한 얼굴로 공작을 바라봤다.
공작부인도 축하 인사를 전했다.
“무사히 자라줘서 정말 고맙구나.”
아리엘의 눈이 촉촉하게 젖었고 에리얼의 귀 끝이 빨개졌다.
나는 흐뭇하게 그 모습을 지켜봤다. 원작에서는 조각조각 흩어졌던 가족이었다.
원작과 달리 아리엘이 죽지 않고 무사히 졸업한 것도 너무 기뻤고, 공작과 공작부인 그리고 쌍둥이까지 모두 모여 웃고 있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다행이야.’
나는 그들을 지켜보다가 쌍둥이를 위해 준비한 선물을 꺼내기 위해 데이지를 찾았다. 그녀에게 미리 선물을 부탁해 놨었다. 그녀는 중앙에서 떨어진 구석 테이블에 있었다.
“데이지 내가 부탁한 선물은?”
“…….”
평소라면 빠릿하게 대답하는 데이지가 반응이 없었다. 나는 멍하게 쌍둥이를 바라보고 있는 데이지를 한 번 더 불렀다.
“데이지?”
“네. 네?”
그녀의 얼굴 앞에서 손을 흔들자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왜 그래?”
“아, 죄송합니다. 도련님과 아가씨가 저렇게나 행복하게 웃는 모습은 처음이라 무심코 넋을 놓고 보고 있었습니다.”
데이지가 쌍둥이를 본 것은 고작 3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공작가에서 일한 지 2년이 다 되어 가나 쌍둥이는 아카데미에 있었고, 방학 때도 공작가로 바로 돌아오지 않고 아카데미에서 머무를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마치 오랜 기간 그들을 봤던 것처럼 말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에 잠기려던 때 데이지가 재빠르게 선물을 찾는 거냐며 나를 이끌었다. 나는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데이지의 페이스에 말렸다.
“여기 준비했습니다! 예쁘게 빨간 리본으로 장식했어요!”
평소의 데이지였다.
그녀는 내게 선물을 건네고 등을 떠밀며 얼른 전해주세요. 하고 말하며 양손을 불끈 쥐었다.
‘방금 뭐였을까.’
데이지의 이상한 행동을 깊이 생각할 수는 없었다.
어느새 다가온 쌍둥이가 내 손에 들린 선물을 궁금해하고 있었기에.
“졸업 축하 선물이야. 둘 다 정말 고생했어.”
“언니, 이런 걸 받을 만큼 대단한 일은…….”
“누님! 지금 뜯어봐도 되나요?”
아리엘이 분위기 파악하라며 에리얼에게 핀잔을 주자 상반되는 반응에 파티장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유쾌하고 떠들썩한 파티는 깊은 밤이 되도록 이어졌다.
***
나는 파티장에서 먼저 나왔다.
와인 몇 잔에 취해버렸다. 쌍둥이가 걱정했으나 단순히 술에 취한 것뿐이라 쉬러 간다고 말하자 간단하게 풀어줬다.
‘쌍둥이는 술이 세네.’
나는 술이 약하다는 것을 재작년에 뼈저리게 느껴서 자제했는데 에리얼과 아리엘은 보드카같이 도수가 센 술을 스트레이트로 마셔댔다. 무서운 녀석들. 나는 데이지의 부축을 받아 방에 도착해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아, 분위기에 취해서 주량보다 많이 마셨나.’
데이지가 나가고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어지러운 시야를 진정시켰다.
얼굴에 오른 열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바람이라도 쐬면 가라앉을까 싶어 테라스로 향했다.
‘뭐지?’
그런데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움직일 때마다 진득한 시선이 달라붙는 느낌. 방 안에 누군가 있는 걸까. 주위를 둘러봤지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엄마야!”
어둠 속에서 선명한 분홍색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시, 리우스?”
바람도 안 쐤는데 술기운이 훅 깼다.
무슨 공포영화도 아니고. 숨죽이고 숨어 있는 시리우스를 보고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
시리우스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체 뭐지. 나는 머뭇거렸으나 방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시리우스 무슨 일 있어?”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달빛을 받아 빛나는 분홍색 눈동자만 존재감을 나타냈다.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도 이랬는데.’
황궁 연못에서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시리우스가 생각났다. 그때는 눈동자가 검은색이었지만. 검은색?
분명 아카데미에서 봤을 때는 검은색이었는데 어째서 오늘은 분홍색으로 변한 거지?
“……세르니아 님.”
추억을 떠올리고 있었는데 시리우스가 내 이름을 불렀다.
지독히도 낮은 목소리는 어딘가 애달프게 들렸다. 그의 눈빛과 목소리를 봤을 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왜 그래?”
바짝 다가가자 어둠에 묻혀 있던 시리우스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그는 괴로워 보였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렀고 다문 입술 사이로 불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어디 아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