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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86화 (86/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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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는 공작과 공작부인, 에리얼이 먼저 내려와 있었다. 그리고 비어있는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아리는요?”

“입맛이 없다는구나.”

나는 공작부인의 대답을 들으며 자리에 앉았다.

저녁 식사는 평범했다. 아리엘이 없어서 쌍둥이의 티격거림은 들리지 않았으나 편안한 침묵 속에서 간간이 대화가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오늘 렌이 왔다고 들었습니다. 그 녀석 왔으면 인사라도 하고 가지. 치사하게 누님만 만나고 가다니!”

스테이크를 썰던 에리얼이 나이프를 멈추며 내게 말했다. 그는 그렌드윈이 자신에게 연락도 없이 찾아와서 인사도 없이 돌아간 것이 조금 섭섭했나 보다. 입술을 비죽이며 투덜거리는 말에는 아쉬움이 느껴졌기에.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썰어놨던 스테이크를 입에 넣었다. 입안에 육즙을 느끼며 적당한 변명거리를 생각하기 위해서였다.

‘어제 황후와 티타임을 가진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카나린조차도 내가 헬리오스를 만났다고 믿고 있으니. 황후에 대한 이야기를 공작에게 해야 하긴 하지만 여기선 아니었다. 머릿속을 정리한 나는 스테이크를 꼭꼭 씹어 넘기고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근무 중에 잠시 들린 건가 봐. 어제 황궁에 갔을 때 그렌드윈을 만났었거든. 그때 갑자기 빈혈이 일어나서 쓰러질 뻔했더니 걱정되어서 안부 차 들렀대.”

어쨌든 나를 걱정해서 찾아온 것은 맞았으니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지. 에리얼은 쉽게 수긍했다. 공작의 시선이 내게 머물긴 했으나 금방 떨어졌다. 반응을 보인 사람은 의외로 공작부인이었다.

“렌이라면 카일렌 후작가의 영식이니?”

“네.”

공작부인이 그렌드윈에게 관심을 가질 줄이야.

어째서 호기심을 가지는 걸까. 나는 그녀의 의중을 읽으려고 했으나 의문은 그보다 빨리 풀렸다.

“그 아이도 아직 약혼자가 없다고 들었는데.”

한 마디였지만 안에 담긴 속뜻을 모르는 사람은 식당에 없었다.

그녀가 그렌드윈을 누군가의 혼담 상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현재 아리엘도 나도 둘 다 약혼자가 없었기에 누구의 상대로 고려하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어 나는 그녀의 뒷말을 기다렸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공작부인은 내 의향을 물었다. 역시 나인가.

나는 청춘이라 생각하는 파릇파릇한 스무 살 초반이 이 세계에선 혼기가 꽉 찬 나이였다. 그런데 약혼자도 없이 공작가에서 놀고먹고 있으니 공작부인이 걱정 됐나 보다.

‘내 미래를 걱정해서 이런 말을 꺼낸 것이겠지.’

공작부인이 나를 군식구라고 생각해 쫓아내려는 것이 아니라 그녀 나름대로 내 앞날을 걱정해서 던진 말이라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에 섭섭하진 않았다. 솔직히 그렌드윈은 일등 신랑감에 속하는 편이었고.

‘잘생긴 얼굴에 카일렌 후작가의 장남이고, 과묵하지만 하나뿐인 여동생에겐 지극정성이라는 소문이 자자하니.’

공작부인이 봤을 때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나쁘진 않았다. 내가 조금만 더 어렸다면 흔쾌히 약혼했을 수도.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수저를 내려놓고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사교계에서 손꼽히는 일등 신랑감이지요. 다만 저와는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내 말이 끝나자 식당은 정적에 휩싸였다.

공작도 공작부인도 에리얼도 각자 다른 감정을 담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들이 왜 그런 시선을 보내는지 알고 있었다. 내 대답이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기에.

단순하게 해석하면 성격이 맞지 않다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깊게 생각하면 신분이 맞지 않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외부에서 봤을 때 나는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니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의지할 수 있는 뒷배도 없었다. 전 공작의 유일한 자식이니 후계 후보 선상에 놓일 수 있으나 그것이 독이었다.

‘다른 귀족가에서 봤을 때 나는 현 공작의 위치를 위협하는 존재라서 공작의 미움을 받을 거라 생각할 테니.’

실상은 다르지만.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권력을 추구하고 후계 다툼이 치열하게 일어나는 귀족들 사이에서 내 입장은 딱 그 정도였다. 실제로 내가 10살 채 안 됐을 때 나를 쥐고 흔들려는 가신들이 몇몇 있었다. 황후처럼 원래 자리를 찾아야 한다며 자신이 지지해주겠다는 말로 회유했다.

‘나야 권력에 관심 없었기에 일찍이 거리를 뒀으나 내가 관심 없다고 해도 억지로 나를 휘두르려는 가신도 있었고.’

지금은 공작에 의해 좌천되거나 공작가에서 완전히 쫓겨났다.

아버지를 따르던 충신들은 대부분 현 공작을 그대로 따랐다. 형제끼리 사이가 좋기도 했고 아버지의 유언이었기 때문에 큰 충돌 없이 공작위는 현 공작에게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물론 그들도 내가 어느 정도 자라자 내 의견을 물어보긴 했었다.’

공작위를 계승할 생각이 있냐고. 심지어 공작이 직접 물어봤었다. 하지만 나는 단칼에 없다고 대답했다.

‘소시민 마인드로 대기업 운영은 무리야.’

전생의 가치관이 이어져서인지 나는 귀족이면서도 귀족이라는 인식이 옅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이해할 수는 있으나 실천하기 힘들었고, 공작위는 내 결정에 따라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으니 더욱 책임감이 무거웠다.

거기다 서명 한 번으로 1, 2억이 왔다 갔다 한다고 생각하면 손이 덜덜 떨렸다. 월급을 주는 쪽보다는 월급을 받는 쪽이 마음 편했고, 돈 많은 백수가 제일 좋았다.

‘공작가와 친분이 있는 귀족들은 나와 삼촌의 사이가 좋다는 걸 알고 있겠지만 공작가 자체가 사교계에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모르는 귀족들이 더 많을 뿐.’

어쨌든 그들은 나와 그렌드윈은 맞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내가 공작위를 물려받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엄연히 아르덴타인의 성을 이어받았고, 공작가의 일원이다. 따라서 신분이 맞지 않다고 들먹이는 것은 공작가를 무시하는 짓이다. 그럴지라도 사교계에서는 나를 깎아내리겠지. 카일렌 후작가의 영식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왜냐하면 자신들의 딸과 결혼시키고 싶을 테니까.’

그렇지만 내 말의 의도는 둘 다 아니었다.

마음에 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을 에둘러 말한 것이다. 여기서 곧이곧대로 그렇게 말해 버리면 세 사람이 눈에 불을 켜고 누군지 물을 것이다. 끝도 없이 이어질 추궁을 받으며 밥을 먹고 싶지 않았기에.

“안 해도 된다.”

거칠게 수저를 내려놓고 뭐라 말하려던 에리얼보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공작이었다. 안 해도 된다니. 나는 누가 신분을 지적했냐고 묻거나 그렌드윈에게 내가 아깝다는 팔불출적인 말이 돌아올 거라 생각했는데 맥락이 맞지 않는 대답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숙모가 그렌드윈은 약혼자로 어떤지 돌려서 물었고, 나는 나랑 안 맞는다고 대답했지.’

아하, 내 대답이 아니라 첫 질문에 대한 말이었군. 공작이 생략한 주어와 목적어를 유추 할 수 있었다.

“입 하나 더 있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고 네가 아무것도 안 하더라도 손가락질할 사람도 없다.”

파격 조건!

올해 들은 말 중에 가장 기분 좋은 말이었다. 결혼도 안 해도 되고 일도 안 해도 된다니. 여태껏 그래왔지만 그래도 내심 뭔가 해야 하진 않을까 눈치 보고 있었는데. 공작이 직설적으로 말해주니 마음이 편해졌다. 앞으로 더 격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으리라.

나는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최대한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에리얼도 고개를 끄덕이며 공작의 말에 찬성하는 의사를 보냈다. 처음 이야기를 꺼낸 공작부인도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요즘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오지랖이 늘었구나. 강요하려던 것은 아니었단다.”

아니요. 저만할까요.

공작부인의 사과에 나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어디 가서 오지랖 하면 밀리지 않을 나에 비하면 그녀는 약과였으니.

어쨌든 저녁 식사는 훈훈하게 마무리됐다.

결혼 주제 이야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고, 사소한 잡담 뒤에 ‘블레닌의 밤’ 행사의 참석 여부만 정하고 끝났다. 나는 디저트까지 야무지게 먹고 방에 돌아왔다. 아리엘의 방에 들를지 잠시 고민했으나 포기했다. 입맛이 없다고 했으니 오늘은 일찍 잠들었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나도 피곤했고.’

막 저녁을 먹고 왔으나 어제부터 쌓였던 피로가 밀려와서 졸음이 쏟아졌다.

따끈한 물에 몸 좀 담그고 바로 자야겠다고 생각하는데 기묘한 감각이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찾았다!”

뭐지? 아무도 없는데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느다란 미성은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는 중성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이조차 가늠이 안 되는 모호한 목소리는 또다시 귓가를 간지럽혔다.

“뭐야. 내가 안 보여? 기대하고 왔는데.”

“누구야?”

“누구라고 생각해?”

장난기 어린 말투.

내 기억 속에는 없는 목소리였다. 나는 우선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깜깜한 방안에서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 때문에 화들짝 놀랐으나 침입자는 내게 적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짙은 호기심이 묻어났다.

“내가 어떻게 알아?”

그랬기에 일부러 강하게 나갔다.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어떻게 할지 판단해야 했기에. 목소리의 주인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왜 몰라! 나는 너만 생각하고 여기까지 힘들게 날아왔는데!”

날아왔다고?

시리우스……는 아니겠지. 그가 10살 때도 저런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잘 들어보니 목소리가 앞에서 나지 않았다. 마치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왼쪽에서 크게 들렸다가 오른쪽에서 크게 들렸다.

“어디서부터 날아왔는데?”

“황궁!”

어린아이 같은 말투 때문인지 거짓말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생각의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막 뱉는 느낌이랄까.

‘하필 황궁이라니.’

황후와 시리우스 중 한 사람과 연관됐을 것이다. 정확히 누구와 관련됐는지에 따라 내 위험도가 0인지 100인지 정할 수 있을 텐데. 황후의 사람이라면 섣불리 자극해서는 안 됐기 때문에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왜 찾아왔냐고 물었다가 갑자기 죽인다거나…….’

음, 아니겠지. 황후는 신중한 성격으로 보였는데 이렇게 방정맞은 암살자를 보냈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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