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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87화 (87/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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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끝까지 긴장을 풀진 않았다. 나는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있었으나 미성은 멈추지 않고 혼자 떠들어댔다.

“원래는 저주가 풀리자마자 바로 오려고 했는데 그 녀석이 안 풀어줬어. 나쁜 인간!”

저주? 나쁜 인간?

여전히 긴가민가했다. 어느 쪽인지 고민하고 있는 동안 모습이 보이지 않는 존재의 목소리는 하소연을 이어갔다.

“나보고 시끄럽게 쫑알거리지 말라고 하고, 정신 사나우니 얌전히 있으라고 했다니까! 귀찮으면 풀어주지. 가기 싫은 마탑까지 강제로 끌고 가고!”

조잘거리는 말에 익숙한 단어가 들렸다.

최근 시리우스가 취업했다는 곳. 그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리우스와 연관된 존재가 내게 해를 끼칠 리 없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정령?”

불현듯 머릿속에 원작 내용이 스쳐 지나갔다. 저주의 매개체가 되었던 존재. 어린이 같은 말투나 목소리가 상상하던 정령의 이미지와 닮아 있었다.

‘데이지가 소환했던 정령들은 대부분 물의 정령이라 차분한 이미지가 강했지만.’

장난기 넘치는 목소리가 딱 바람의 정령 같았다.

저주에 이용된 정령의 소개는 나오지 않았으나 어쩐지 이 녀석이라는 촉이 왔다. 그런데 시리우스의 저주에 타락했다던 정령이 여긴 어쩐 일일까.

“맞아! 알고 있었는데 모르는 척한 거야?”

아니. 몰랐는데.

하지만 수다스러운 정령은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정령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한층 상기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너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어! 착한 인간 고마워!”

다른 의도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감사 인사였다.

타락해서 소멸할 운명이었던 자신을 저주에서 해방시켜 줬으니 그것에 대한 감사 인사겠지. 다만 너무 급작스러워서 얼떨떨했다. 정화된 정령이 날 찾아올 거라 예상도 못 했었고. 그것보다 중요한 건.

“어떻게 나를 찾아왔어?”

시리우스는 타락한 정령과 의사소통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이지를 잃은 정령이 내 존재는 어떻게 알고 내가 있는 곳은 어떻게 알아내서 황궁에서 여기까지 찾아온 걸까.

“네 목소리가 들렸어.”

나는 정령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령은 감정 기복이 심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놀이동산에 놀러 온 아이처럼 들떠서 떠들어대다가 이번엔 아끼던 장난감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슬퍼하는 게 느껴졌다.

“긴 시간 동안 인간의 몸 안에 갇혀서 꼼짝도 못 하고 묶여 있었는데 어느 날 ‘괜찮아’라고 하는 네 목소리가 들렸어.”

왠지 시리우스에게도 비슷한 말은 들었던 것 같은데. 꼼짝도 못 하고 묶여 있었다는 말을 듣자 사슬에 묶여 있었던 시리우스의 모습이 떠올라서 가슴이 아팠다.

‘그러고 보니 그날도 괜찮다고 했었나?’

워낙 시리우스에게 물렀던 나는 괜찮다는 말을 꽤나 자주 해서 정령이 말하는 날을 특정 지을 수 없었다. 저주가 완전히 풀렸던 날에도 괜찮다고 했었고.

“정말 캄캄하고 아무것도 없는 심심한 공간이었는데 네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려서 얼마나 신기하던지! 그 이후로 나를 묶고 있던 저주가 점점 희미해졌어. 그러더니 갑자기 저주가 풀린 거야!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지. 네가 그 녀석의 저주를 풀어줬다는 걸.”

동문서답. 정령은 지금 내 질문에 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하긴 거의 18년 동안 저주 때문에 말도 못 하고 갇혀 있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이젠 타나토스도 못 보고 죽는 건가 싶었는데 착한 인간이 날 살렸어!”

타나토스는 또 누굴까.

묻고 싶었으나 일단은 기다렸다. 정령의 신세타령이 길어지긴 했으나 이제 곧 끝날 것 같았기에.

“그래서 직접 은혜를 갚으러 온 거야. 착한 인간 나랑 계약하자!”

쉼 없이 쫑알거리던 정령의 목소리가 왼쪽 귀에서 크게 울렸다.

‘정령과 계약?’

안 그래도 황후와 티타임을 가지고 나서 나를 지킬 힘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 타이밍에 정령과 계약이라니. 완전 이득! 그러나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나는 친화력이 없어.”

마법을 사용하려면 마력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정령과 계약하려면 정령 친화력이 필요하다. 문제는 나는 정령 친화력이 1도 없다는 것. 있었다면 진작 정령술사가 됐겠지.

“괜찮아! 너는 특별하니까.”

“특별하다고?”

“그래. 지금도 내 목소리를 듣고 있잖아. 원래 친화력이 없는 인간은 정령의 목소리조차 듣지 못하지.”

“그럼 내게 친화력이 있는 거야?”

아닐 텐데.

처음 시리우스를 만나고 나서 그가 내게 관심을 가진 것을 알고 정령 친화력 검사를 했으나 그때도 없다고 나왔었다.

“나를 묶고 있던 저주가 너로 인해 풀리면서 우린 연결 됐어.”

“뭐로?”

연결됐다니. 나는 정령의 말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공작은 문장에 주어와 목적어를 생략했다면 정령은 문장의 전제를 생략하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저주는 계약으로 이루어지는 마법의 일종이라는 건 알아?”

예전에 저주 미수사건 때 공작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대가만 지불하면 마력 없는 사람도 쉽게 저주를 걸 수 있다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령은 설명을 이어갔다.

“인간들은 저주라고 부르지만 결국 마법이라는 뜻이야. 그렇다는 건 아주 약간이긴 해도 마력이 필요하다는 거지!”

“마력이 없는 사람도 대가만 지불하면 걸 수 있는 거 아니었어?”

내가 들었던 것과 달랐다. 나는 정령의 불친절한 이야기를 알아듣기 위해 열심히 질문을 던졌다.

“그건 인간의 입장에서 봤을 때고. 마력 없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리 없잖아.”

“무슨 뜻이야?”

나는 여태껏 저주란 마력 없이, 오직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령의 말은 그 전제를 부정했다.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는 정령을 한 번 더 재촉하려고 했으나 테라스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었군.”

허스키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익숙한 목소리에 미약한 분노가 감돌았다. 차가운 음성이 나를 향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는데도 무서워서 주춤할 지경!

예고도 없이 나타난 시리우스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공중에 손을 휘둘렀다. 너무 놀라서 눈을 감았는데 내 왼쪽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만 들렸다. 순간적으로 감았던 눈을 뜨자 주먹을 쥐고 있는 시리우스가 나를 보며 놀라게 할 의도는 아니었다며 사과했다.

“세르니아 님을 위협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하루살이가 주위를 알짱거리기에 급한 마음에. 죄송합니다.”

“아, 아니야.”

나 혼자 겁먹었는걸.

하루살이라면 정령을 말하는 건가? 시리우스도 정령 친화력은 없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는 정령이 정확히 보이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 손에 정령이 있는 거야?”

휘두른 그의 손은 주먹을 쥐고 있었다. 신기하게 그러쥔 손엔 공간이 있었는데 정령이 버둥거리기라도 하는지 시리우스의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손에서 정령이 힘껏 소리쳤다.

“놔! 이 나쁜 인간. 겨우 탈출했는데,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네가 갈 곳이야 뻔하지.”

시리우스가 서늘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자 ‘히극!’ 이라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정령의 모습을 볼 순 없었으나 필시 아파하고 있으리라.

“시리우스 우선 손은 놓고…….”

“아니요. 더 이상 세르니아 님을 귀찮게 할 수 없습니다. 이 녀석을 데리고 돌아가겠습니다.”

웬일. 시리우스의 입에서 먼저 돌아가겠다는 말이 나오다니.

나는 아주 약간 서운함을 느꼈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리우스가 돌아간다면 이유가 있겠지. 정령에 대해 궁금한 점은 많았으나 내가 정령과 연관되는 것을 시리우스가 바라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기에.

‘그래도 정령이 나랑 계약하겠다고 했는데 놓치기 아까운 기회 아닌가.’

기회를 잡지 않으려 했는데 문득 아까웠다. 마력도 정령 친화력도 없는 내가 유일하게 나를 지킬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됐기 때문이다. 나는 내적갈등에 휩싸였다.

애초에 시리우스의 정령도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저주의 매개체가 됐을 뿐 정령은 누구와도 계약하지 않았었다.

‘음? 정령을 저주의 매개로 쓰려면 누군가와 계약이 되어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정령은 보통 정령계에서 산다고 들었다. 그럼 저주의 매개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정령과 계약을 해서 이 세계로 불러내야 했다.

또 다른 의문. 뭔가 순식간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정령의 이야기도 덜 들었고, 솔직히 정령과 계약도 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든 의문도 풀고 싶었고.

“잠깐.”

“왜 그러십니까?”

나는 황급히 시리우스의 손목을 붙잡았다.

계약은 안 하더라도 궁금증을 풀어야겠다는 생각이 이겼다. 시리우스는 내가 붙잡자 살짝 놀란 얼굴이었다.

“아직 정령이랑 이야기가 안 끝났어. 못 들으면 궁금해서 잠 못 들 것 같으니까 하던 이야기만 끝내고 돌아가.”

“하지만…….”

“안 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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