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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91화 (9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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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에 작은 불안감이 솟아났다. 어제 아리엘이 내게도 말하지 않고 황궁에 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아리엘은 가끔 혼자 황궁 도서관에 방문했기에 당연히 어제도 도서관에 갔다고 생각했었는데.

‘황후를 만난 건가? 원작처럼?’

원작의 내용이 떠올랐다. 황후와 아리엘의 만남은 딱 한 번. 데이지를 질투한 아리엘에게 저주를 알려주기 위한 티타임이었다.

“마리, 사제를 불러줘.”

“네? 하지만 약도 먹었고, 한동안은 상태를 지켜보는 것이…….”

“부탁해.”

황후와 관련됐다면 의원의 약으로는 낫지 않을 것이다. 아니, 사제가 오더라도 장담할 수 없었다. 이 증상이 저주나 금제에서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높았기에.

‘그렌드윈을 만나야 해.’

그렌드윈은 아리엘이 왜 이렇게 됐는지 알고 있겠지. 나는 아침 식사도 거른 채 외출용 드레스로 갈아입으려고 방으로 돌아갔다. 옷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던 데이지가 조심스럽게 목적지를 물었다.

“아가씨 오늘 외출 일정은 없었죠? 이른 아침부터 어디 가시나요?”

“황궁으로.”

드레스 단추를 전부 채운 데이지가 내 머리카락을 빗었다. 그녀도 내 다급함을 느꼈는지 평소보다 빠르게 준비를 도왔다.

“어째서 황궁으로 가시는지 물어도 될까요?”

“……그렌드윈을 만나러 간다고 데인에게도 전해줘.”

비밀로 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어차피 데인에게는 말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솔직하게 털어놨다.

“알겠습니다.”

데이지는 더 깊이 물어보지 않고 나는 곧장 마차에 올랐다. 황궁까지 거리는 그리 멀지 않으니 금방 도착할 것이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봤다. 정리가 되지 않았다.

‘지금의 아리엘은 원작의 아리엘과 다를 텐데.’

헬리오스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그녀가 질투할 대상도 없었다. 아직 황후를 만났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아리엘이 황궁 도서관을 다녀왔고, 평범한 감기에 걸렸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여러 우연이 겹쳐져 발생한 일이라 믿고 싶었다. 그러나 그렌드윈의 기묘한 경고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아카데미 졸업식 이후로 사건의 연속이었다.

카나린도 해결되고, 시리우스의 저주도 풀려서 한숨 돌리나 싶었는데 이번엔 아리엘이라니.

‘카나린과 시리우스의 일은 원작에 없던 내용이었어. 여태껏 내가 원작을 신나게 비틀어댔으니 더 이상 원작과 연관된 사건은 나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시원하게 틀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리엘은 황후를 만났고, 그 때문에 열이 나는 것으로 보였다. 열이 나는 원인은 아마 그렌드윈이 알고 있을 것이다.

“도착했습니다.”

공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멈췄다. 나는 마부에게 좀 걸릴지도 모르지만 대기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기사단 건물로 향했다. 본궁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금방 도착했다. 기사단만 쓰는 건물이었기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청소하는 하녀는 있을 법한데, 이럴 땐 꼭 안 보이더라.

‘어제 그렌드윈이 했던 짓을 똑같이 하게 될 줄이야.’

발걸음이 무거웠다. 나야 공작가에서 놀고 있는 잉여 인력이니 언제와도 상관없지만 그렌드윈은 달랐다. 급한 마음에 바로 달려왔으나 생각해보니 내 개인적인 일 때문에 출근한 친구의 회사를 찾아간 격이었다.

‘민폐……. 아니야. 이 상황은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애써 합리화하려 했으나 민폐라는 생각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음, 그래. 인정하자. 민폐지만 아파하는 아리엘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친구니까 이해해 줄 거라 믿었다. 그렌드윈이 정확히 어디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우선 건물 들어가서 가장 가까운 문 앞에 섰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노크를 했다.

똑똑똑.

누가 나올지 몰라서 잔뜩 긴장하고 있었으나 안쪽에선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이 방엔 아무도 없는 건가. 다른 곳으로 가려고 돌아서자 ‘끼익’하고 문이 열렸다.

“웬일로 노크를 다 하고……. 누구세요?”

기사단과 안 어울리는 남자가 문을 열고 나왔다.

호리호리한 체격이나 유순한 외모도 한몫했으나 그보단 3일은 못 씻은 것처럼 보이는 행색과 눈 밑에 내려앉은 다크서클 때문이었다.

‘왠지 야근에 찌든 회사원 같은 모습.’

그는 다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었다가 나를 보고 당황한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세르니아 아르덴타인이라고 합니다. 혹시 그렌드윈 부기사단장님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내 말을 들은 남자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눈썹은 찌푸리고 억지로 올린 것이 분명한 입꼬리가 부들거렸다. 짜증 나지만 짜증을 참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는 얼굴!

“미리 약속하시고 찾아오신 건가요?”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그럼 그렇지. 라는 표정이었다.

이 사람 나보다 감정을 못 숨기네. 나는 얼굴에 감정이 드러나는 편이지만 그건 친한 사람과 있을 때 편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고, 공적인 자리에선 최대한 감정을 숨기고 미소로 대응한다.

‘뭐, 이 사람 입장에서 내가 곱게 보일 리 없겠지만.’

공교롭게도 고위 귀족 자제들 사이에서 약혼자 없는 사람은 소설에 등장했던 헬리오스와 에리얼, 그렌드윈뿐이었다. 헬리오스는 황태자라는 신분 때문에 귀족 영애라 하더라도 특별한 이유 없이 만나는 것은 힘들다. 에리얼의 경우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었기에 공작가에서 거의 나오지 않는다. 공작가와 친분이 있어야만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해 그렌드윈은 기사단에 있어 둘보다 만나기 쉬웠다. 아마도 나처럼 무작정 찾아오는 사람이 더 있었나 보다. 저 남자의 표정으로 유추했을 때, 그는 나를 스토커 취급하고 있었다.

‘스토커라고 생각했는데 저 표정인 거면 표정 관리 잘하는 편이려나.’

그나마 내가 아르덴타인이라고 밝혀서 참고 있는 걸 수도. 그렌드윈을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지금은 참아야 했다.

“죄송하지만 부기사단장님은 매.우 바쁘셔서요. 다음에 부기사단장님과 약속을 하고 다시 방문해주시겠습니까?”

오, 표정은 썩었으나 말투는 공손한데. 유독 ‘매우’를 강조한 것은 기분 탓일까.

나를 귀찮은 스토커쯤으로 보고 있는 남자는 올라가려는 눈썹을 억누르고 마지막 인내를 쥐어짜서 말했다. 그러나 나도 여기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야 그렌드윈을 만날 수 있지?’

여기서 계속 버티는 것도 그렌드윈을 만나야 하니 불러오라고 말하는 것도 안 된다. 아니 이미 이렇게 막무가내로 찾아온 시점에서 억지인가.

‘아예 그렌드윈을 포기하고 시리우스를 만나러 갈까.’

시리우스의 궁으로 찾아간다면 바로 만날 수 있을 테니. 어젯밤, 시리우스도 개인적으로 황후의 뒷조사를 했다는 언급이 있었다. 그렌드윈은 후작가로 따로 편지를 보내서 약속을 잡고 만나는 편이 좋을지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방법이 제일 상식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가슴속에서 울렁거리는 불안감을 도저히 진정시킬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오늘 안으로 아리엘의 상태에 대해 정확히 알고 싶었기에.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부탁이요?”

부탁이라는 단어에 마지막 인내심이 사라졌는지 남자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이 남자에게도 미안했으나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렌드윈에게 어제 일 때문에 찾아왔고,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그저께 만났던 벤치에서 기다리겠다고 전해주시겠습니까?”

“어제 일이라니…….”

“부탁드리겠습니다!”

남자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의 표정을 살피다가 거절이라도 할까 봐 다급하게 한 번 더 부탁한다고 덧붙였다. 말이 부탁이지 이것도 억지였다. 그나마 들어줄 수 있는 억지. 남자는 한숨을 푹 내뱉었다.

“알겠습니다. 다만 저는 어디까지나 영애의 말을 전달하기만 할 겁니다. 부기사단장님이 시간이 안 된다면 못 갈 수도 있으니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네! 감사합니다.”

남자는 계속 실랑이를 벌이는 것보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는지 내 부탁을 수락했다. 다행이었다. 긴장했던 표정을 풀고 감사한 마음에 활짝 웃었다. 나중에 케이크라도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기사단 건물을 빠져나와 본궁 법무부 근처에 있던 벤치로 향했다. 정확한 주어 없이 두루뭉술하게 말했으나 그렌드윈이라면 반드시 올 것이다.

‘어제 그렌드윈이 굳이 나를 찾아온 것은 그만큼 그에게 황후와 관련된 일이 중요하다는 뜻일 테니.’

초조했으나 얌전히 기다려야 했다. 아침부터 찾아온 탓에 점심시간까지는 한두 시간 정도 기다려야겠지만. 도서관 같은 곳에서 시간 때우는 방법도 있지만 지금 심정으로는 글이 머리에 들어올 것 같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하지?’

황후의 마법과 연관되었을 경우 금제나 저주일 것이다. 하지만 원작의 흐름상 저주보단 금제일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내게 금제를 걸려고 했다가 실패해서 아리엘에게 걸어버린 것은 아닐까.

차라리 저주가 나았을 텐데. 저주는 해주 방법을 안다면 풀 수 있다. 거기다 즉사하는 경우도 적었다. 대개 대가를 지불하고 대가를 앗아가는 마법이니 시력이나 청각이 사라지는 것이 많지만 사람을 바로 죽일 수 있는 저주는 없었다.

‘예외가 황후가 황비에게 걸었던 저주나 소설에서 아리엘이 데이지에게 걸었던 저주정도.’

그마저도 영혼을 봉인해서 못 일어나는 것뿐, 실질적인 죽음과는 달랐다. 반대로 금제는 단어 하나 잘못 말할 경우 즉사!

‘만약 아리엘에게 금제를 걸었다면 금제어를 뭐라고 했을까.’

또 한 가지 걸리는 점은 황후가 금제를 거는 사람은 뭔가 역할이 있었다. 드란과 레베카, 복면인 모두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으니 아리엘에게도 분명 어떤 명령을 내렸으리라. 원작에서는 데이지를 저주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황후가 무슨 꿍꿍이로 아리엘에게 접근했는지 무슨 명령을 내렸는지 도통 짐작이 안 됐다.

“세르니아 누님!”

깜짝이야! 한창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는데 어깨를 잡는 손길 때문에 진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아무리 내가 무아지경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지만 두 시간 이상 지났을 것 같진 않았다. 그렌드윈은 뛰어왔는지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었다.

“어……. 빨리 왔네? 기사단 일은 괜찮은 거야? 점심시간 안 됐잖아.”

다짜고짜 아리엘의 이야기를 꺼낼 수 없어서 일단 가벼운 안부를 물었다.

“순찰을 돌고 사무실에 돌아갔더니 부하가 세르니아 누님이 왔다고 해서, 이야기를 듣고 달려왔습니다.”

그 남자 약속은 제대로 지켜줬구나. 그리고 내 이야기를 듣고 바로 달려왔다는 그렌드윈에게도 감동했다. 이 녀석 참 우정이구나! 다음에 그렌드윈이 곤란에 처하는 일이 있다면 무조건 들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내 힘에 저항 없이 끌려와서 벤치에 앉은 그렌드윈에게 바짝 다가갔다. 황궁이라 황후를 함부로 언급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내가 갑자기 얼굴을 들이대서 놀랐는지 그렌드윈은 상체를 뒤로 빼며 당황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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