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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92화 (9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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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일이라고 전했을 텐데? 알아차리지 못한 걸까. 나는 그렌드윈이 뒤로 물러서지 못하도록 어깨를 꽉 누르고 그에게 귓속말을 했다.

“어제 그분과 티타임 이후에 열이 나는 경우가 있다고 했잖아.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안절부절못하던 그렌드윈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무언가 곰곰이 생각을 하는지 침묵했다. 나는 애가 타는 마음으로 그렌드윈의 대답을 기다렸다.

“누구에게 그런 증상이 일어난 겁니까?”

“응. 아리에게…….”

다시 침묵. 그는 시선을 내리깔고 한참을 말이 없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저렇게 뜸 들이는 거지. 궁금증이 한계에 다다를 때쯤 그렌드윈이 입을 열었다.

“자세한 대화를 나누기 전에 확인해야 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뭔데?”

“저는 세르니아 누님을 믿습니다. 그것과 별개로 거쳐야 할 절차가 있습니다.”

절차라니. 확인 절차일까. 그는 진지한 얼굴로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좀 더 설명해 주고 가지. 한숨이 나왔으나 그렌드윈은 일하던 도중에 나온 것이었기에.

‘음, 역시 신중하게 확인 절차를 밟는 걸 보니 그렌드윈이 독단적으로 황후를 조사한 것은 아니야.’

그도 세력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헬리오스. 그렌드윈이 다른 세력과 손잡았을 리 없었으니. 문제는 내가 헬리오스의 세력을 확실히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헬리오스의 세력은 소설에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헬리오스는 황태자였다. 소설에서도 현재도 시리우스는 2황자였으나 황제에 관심 없었고, 지지해주는 외가도 없었기에 황권 다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대부분 귀족들이 황태자를 지지한다. 그런데 소설에는 이상하게 주요 등장인물을 제외한 귀족들이 배제됐었다.

‘소설에 등장인물이 많아지면 읽는 독자들이 헷갈려하니까 복잡한 등장인물을 뺀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이름 모를 기사나 시종의 대사는 있었지만 에리얼이 반란을 일으킬 때조차 다른 귀족들은 없었다. 그렌드윈만이 끝까지 헬리오스를 지켰던 것처럼 묘사됐었다. 심지어 헬리오스를 보좌하는 시종장이라든가 최측근 보좌관도 없었다. 그렌드윈은 헬리오스의 최측근이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기사이며 차기 카일렌 후작이었다.

‘원작에서 황후가 의도적으로 헬리오스의 주변에 인재를 두지 않은 것이라면?’

다루기 쉬운 꼭두각시로 만들기 위해서.

어떤 확인 절차를 거치는진 모르겠으나 아라네아가 숨어들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렌드윈이나 헬리오스가 황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지만 세력 안에 아라네아가 있다면 도움을 받으려다가 반대로 내 정보가 유출될 수도 있었다.

헬리오스의 세력이 아라네아의 존재를 알고 있으면 상관없지만 모르고 있었을 경우 괜히 말을 꺼냈다가 그들에게 들키는 일만은 사양하고 싶었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원작을 알고 있어도 전혀 도움이 안 되잖아.’

이미 원작 내용도 많이 바뀌었고, 최근 벌어진 일들은 원작에 없던 내용이었다. 더 이상 원작에 의존할 수 없다는 뜻!

‘확실하게 믿을 수 없다면 아라네아에 대한 이야기는 덮어 놓자. 말해야 하는 상황이라도 생기면 어쩔 수 없지만.’

어느 정도까지 정보를 공유할지 대충 정하자 타이밍 좋게 그렌드윈이 돌아왔다. 거쳐야 할 절차가 있다고 하더니 아까 전과 비교했을 때 딱히 변한 것은 없어 보였다. 뭔가 마법 아티팩트라도 들고 올 거라 생각했는데.

“헬리오스 님의 궁으로 이동해도 괜찮을까요?”

“그래. 절차를 거치는 건 거기서야?”

“네. 제가 방금 세르니아 누님 이야기를 해서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렌드윈을 따라 헬리오스의 궁으로 갔다.

헬리오스 궁은 처음이었다. 본궁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태양을 이미지로 했는지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느낌.

‘이거 보니까 시리우스 궁이 더 초라한데.’

속으로 시리우스에 대한 애잔함을 느끼고 있는 사이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우리를 맞이했다. 우리가 올 거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 그는 자연스럽게 헬리오스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안내를 마친 시종은 노크를 하고 물러섰고, 안에서 들어와도 좋다는 헬리오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국의 영광, 태양의 후손 황태자님을 뵙습니다.”

문을 열고 인사를 하자 서류를 보고 있던 헬리오스가 우리를 반겨줬다. 평소와 같은 빈정거림으로.

“이야. 오랜만이군. 아카데미 졸업하니 얼굴 보기가 힘드네.”

“그저께 봤잖아요.”

“그랬지. 도와주러 갔더니 나를 버리고 시리우스와 쌩하니 나간 세르니아 영애가 아닌가! 이것 참 그날 너무 순식간에 사라져서 봤던 것도 잊고 있었군. 다 나의 불찰이네.”

헬리오스는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과장되게 말했다. 장난스럽게 말하고 있으나 저건 삐친 거다. 자기만 두고 가서.

“그날은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된 인사도 못 했네요. 저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흠.”

내가 순순히 사과를 하자 원하던 반응이 아니었는지 김빠진 얼굴을 했다. 예전처럼 도발에 넘어가지 않아서겠지. 지금은 그럴 기운도 없었고 빨리 본론으로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에 반응하지 않았다. 미적지근한 감사 인사가 끝나자 옆에 있던 사람이 입을 열었다.

“우선 앉아서 대화할까요? 길어질 것 같으니.”

아까 기사단 건물에서 만났던 남자였다. 남자가 헬리오스의 허락을 구했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와 그렌드윈이 자리에 앉았다.

“아,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저는 기사단 행정을 맡고 있는 헤르세라고 합니다.”

그의 소개 이후 본격적인 이야기로 넘어갔다.

헤르세는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설명했다. 확인 절차를 위해서 ‘진실의 맹세’를 해야 한다고. 황후가 주로 사용하는 ‘금지 마법’과 비슷한 마법이었다. 금지 마법이 저주처럼 사용자가 대상자에게 일방적으로 제재를 가하는 마법이라면 진실의 맹세는 사용자와 대상자가 동등한 조건을 지켜야 하는 마법이다.

“아카데미에서 마법 기초이론을 가르치셨다고 하니 이해가 빠르시겠지요. 여기 계신 황태자님과 세르니아 님이 진실의 맹세를 나누고 서로 세 가지 질문에 답을 해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의 말대로 황후가 사용한 저주 방법을 찾겠다고 꽤나 많은 양의 마법책을 읽었었다. 이론뿐이지만 시리우스가 사용하는 고난도 마법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알고 있었다.

시리우스의 마법은 자기가 직접 개발한 마법이나 두 개 이상의 마법을 복합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내가 모르는 거고.

‘진실의 맹세는 황궁에서 재판할 때도 사용하는 대중적인 마법. 거기다 마법 아티팩트만 있으면 되니 이처럼 실생활에도 많이 사용되지. 동등한 조건을 가지기 때문에 나도 헬리오스에게 질문할 기회가 생긴다!’

세 가지 질문을 통해 헬리오스의 의중을 떠보고 아라네아에 대해서도 물어볼 수 있었다. 진실의 맹세도 금지 마법처럼 조건을 어기면 페널티가 부과된다. 금제어를 말할 경우 뇌가 폭발하는 것처럼!

‘그것보단 약한 걸로 하겠지만.’

내가 수락하자 헤르세가 종이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기사단 행정을 맡고 있는데 마력을 가지고 있다니. 성이 없는 것을 보아 평민인 것 같은데. 헤르세는 원작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아라네아일 수도 있으니 방심하지 말자.’

헬리오스가 찾은 인재일 가능성이 컸으나 만약의 가능성도 있으니. 나는 그를 눈여겨본 뒤 종이에 손을 뻗었다. 헬리오스도 손을 뻗자 종이가 빛을 내기 시작했다.

“수많은 거짓 속에서 존재하는 단 하나의 진실. 여기 ‘세르니아 아르덴타인’과 ‘헬리오스 아슬란데’는 세 가지의 질문에 오직 진실만을 말할 것을 심장을 걸고 맹세한다.”

심장이요? 예상보다 큰 대가였다.

진실을 말하면 상관없으나 조금의 거짓이라도 섞이면 황후의 금제처럼 심장이 날아간다는 뜻이었다. 약간 당황했으나 손등엔 이미 맹세의 문양이 생겼다. 이 문양은 세 개의 획으로 이루어졌다. 질문이 하나씩 끝날 때마다 한 획씩 사라지는 것이다.

“좋아. 됐군. 진실의 맹세는 동등한 조건이기 때문에 그대도 세 가지의 질문을 할 수 있다만 황가의 비밀 같은 건 안 물어봤으면 좋겠군.”

“네. 헬리오스 님 먼저 질문해주세요.”

“그러지. 너는 어머님의 사람인가?”

간 보기 따윈 할 생각 없는지 헬리오스는 첫 질문부터 핵심을 물어왔다. 기회는 세 번밖에 없으니 당연한 건가. 나는 헬리오스의 질문에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내 대답이 끝나자 손등에 있던 문양 한 획이 빛을 내며 사라졌다. 진실이라고 증명됐다. 옆에 있는 그렌드윈의 딱딱하던 표정이 풀어졌다. 믿고 있다고 했지만 그래도 100%는 아니었겠지. 어쨌든 내가 황후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자 날카롭던 분위기가 진정됐다.

‘어떤 것부터 물어봐야 하나.’

물어볼 것은 많았다. 아라네아에 대해 알고 있는가, 헬리오스의 세력 크기는 어느 정도인가, 언제 세력을 만들었는지 같은 것들. 다만 일반적인 정보가 아니라 진실의 맹세로만 얻을 수 있는 정보를 묻고 싶었다.

‘예를 들어서 황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라든가.’

객관적인 정보가 아닌 주관적인 생각. 즉, 헬리오스의 속내가 궁금했다. 그가 황후를 견제하는 이유는 중요했다. 그 대답에 따라 내가 가진 정보를 얼마나 공유할지 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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