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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97화 (97/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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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니아 님.”

노인의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허스키한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귓가를 파고들기엔 충분했다.

“…….”

“…….”

히프노스를 보고 웅성거리던 마법사들도, 내게 이상한 질문을 하던 노인도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까 내가 왔을 때는 동작을 멈추고 나를 살피는 느낌이었으나 지금은 다들 긴장을 하고 몸을 움츠린 느낌이었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입니까?”

시리우스는 주위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내게 다가왔다. 해사한 웃음을 머금고. 그의 얼굴을 본 마법사 몇 명은 ‘헉’하며 헛숨을 들이켰다. 그들의 반응이 의아했으나 일단 시리우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호기심을 눌렀다.

“여기서 말하긴 좀……. 혹시 잠깐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물론이죠. 안쪽은 시끄러우니 후원으로 나갈까요?”

다른 마법사들은 바빠 보이는데 이 녀석은 일하지 않아도 괜찮은 걸까. 물어보긴 애매한 분위기라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마탑주님 아직 처리해야 할 서류가…….”

“급한 건 끝냈을 텐데.”

마탑주요? 시리우스가요?

꿈에서 마탑주는 노인이었는데. 시리우스가 천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단숨에 마탑주 자리를 차지할 정도였다니. 원작에서 실험체가 죽었다며 안타까워하던 마탑주가 자리를 뺏기고 장로가 된 것이었다.

‘마탑은 철저한 실력 위주였지.’

내가 상황 파악을 하고 있는 사이 분위기가 영하로 얼어붙었다. 이렇게 스산한 시리우스의 목소리는 처음이었다. 그와 첫 만남을 제외하곤 언제나 듣기 좋은 저음이었고, 처음 만났을 땐 무섭거나 차갑기보단 메말라 있는 느낌이었으니.

“하나 행사 전까지 끝내려면 빠듯합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마라.”

“그렇지만.”

“불만이라도 있는 건가?”

“죄, 죄송합니다.”

로비에 있던 마법사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덜덜 떨거나 주저앉는 마법사도 있었다.

“나쁜 인간이 마력에 살기를 담아 뿌린다! 세르니아가 말려야 해!”

숨어 있던 히프노스가 머리카락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 예전에 공작이 무의식적으로 뿌렸던 마력에 숨을 못 쉬던 기억이 떠올랐다. 살기가 거의 담지 않은 마력에도 숨이 턱 막혔는데 작정하고 살기를 담아 마력으로 위압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마법사들이라 기절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힘들어 보였기에 나는 황급히 시리우스의 손목을 잡았다.

“시리우스, 나가자.”

“네.”

시리우스는 얌전히 따라 나왔다. 문이랑 가까이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궁에서 빠져나왔는데 무성한 잡초를 바라보고 있자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여졌다. 시리우스의 궁으로 다시 들어갈 수도 없고 근처를 산책하면서 말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내가 잡고 있던 손목을 슬쩍 빼서 손을 겹친 시리우스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세르니아 님에게 보여드리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온도차 너무 심한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살기를 뿌리던 분홍색 눈동자가 초롱초롱하게 반짝이며 나를 보자 그 차이가 여실히 느껴졌다. 로비에서 보여준 무표정은 저주에 걸려서 짓던 무표정과 엄연히 달랐다. 옅은 분노와 짜증이 서려있는 무표정. 저주가 풀려서 부드러워 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감정에는 플러스적인 감정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이너스적인 감정이 있다는 것을 깜빡하고 있었다.

‘슬픔이나 분노가 무조건적으로 나쁘다곤 할 수 없지만.’

나와 있을 때는 거의 웃고 있거나 가끔 눈물을 흘리던 얼굴만 봤기에 처음 보는 생소한 표정이었다. 새삼 시리우스가 황자라는 사실이 와 닿았다. 정점에 서있는 자. 비록 2황자의 신분이고 황제가 될 생각이 없다고 했으니 헬리오스와 싸우진 않겠지만 마탑주라고 해도 전혀 위화감 없이 잘 어울렸다.

“여기입니다.”

시리우스의 궁과 이어진 울창한 나무 길을 땅만 보고 걸었는데 그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니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평범한 공터 한중간에 자리 잡은 거대한 나무 한 그루. 커다란 등나무가 하늘을 덮고 있었다. 온통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는 공간이었다.

“예쁘다.”

순수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전생과 현생을 합쳐도 이렇게 아름다운 곳은 처음이었다. 중앙에 자리 잡은 등나무는 하늘을 덮어 공터 주위에 있는 나무까지 가지를 뻗혀있는 상태였다. 애초에 등나무는 덩굴 식물이었다. 다른 나무나 건물을 타고 자라는 것은 많이 봤으나 이처럼 홀로 커다랗게 자란 것은 처음 봤다.

“역시 똑같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똑같다니 뭐랑 뭐가?”

내 질문에 그저 웃음만 짓던 시리우스는 성큼 다가와서 머리카락에 살짝 입 맞추며 말했다.

“꽃과 세르니아 님의 머리색이요.”

그의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비슷한 색이었다.

지지대 없이 자란 등나무는 그다지 높지 않아서 꽃이 손에 닿았다. 아름다운 풍경에 잠시 넋을 놓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등나무가 왜 벌써 폈어?”

내가 등나무에 대해 잘 아는 편은 아니지만 적어도 봄에 꽃이 피는 식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조화도 아니고, 초봄에 등나무가 활짝 피어 있는 건 이상했다.

“영구 보존 마법을 걸어 뒀습니다.”

깔끔한 대답. 이 넓은 범위에, 그것도 생물에 영구 보존 마법을 걸다니.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 아니지 쿠키에도 영구 보존 마법을 걸고, 마탑에 들어가자마자 마탑주를 할 정도인걸. 일반인의 상식으로 천재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는 막힌 숨을 내뱉으며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구나.”

“예전에 세르니아 님을 생각하며 만들었습니다. 보여줄 수 있을 거라 생각도 못했는데…….오늘 함께 올 수 있어서 정말 기쁩니다.”

“옛날에 만들었어? 텔레포트로 이동하면 언제든 보여 줄 수 있는 거 아니야?”

“보여주기 전에 죽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아, 이러면 내가 실수한 것 같잖아. 가볍게 생각했는데 나무에 담긴 시리우스의 감정은 훨씬 무거웠다.

“세르니아 님, 이쪽입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눈치만 살피고 있었는데 시리우스가 등나무가 있는 공터 중앙을 가리켰다. 등나무의 존재가 경이로워서 몰랐는데 나무 근처에 파빌리온이 설치되어 있었다. 하얀 기둥과 유리로 된 둥근 천장은 보라색 빛이 들어왔다. 그 아래에 하얀 티테이블과 의자가 있었다. 진짜 동화 속이라 해도 믿을 지경!

“이것도 네가 설치했어?”

“네. 차는 얼그레이가 좋으신가요?”

중앙에 있는 테이블에 앉자 시리우스가 어떤 차가 좋냐고 물었다. 홍차도 마법으로 가능한 건가.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시리우스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몽블랑 케이크와 홍차 잎이 담겨 있는 티포트와 찻잔이 나왔다.

“마법은 만능이구나.”

“만능은 아닙니다만 사용자에 따라 만능에 가까워지죠.”

그의 말에 주억거리며 찻잔을 내려다봤다. 어느새 홍차가 잔에 담겨 있었다. 동화 같은 풍경을 보며 향긋한 얼그레이 향을 맡고 있자 아침부터 바짝 긴장하고 움직이던 몸에 힘이 빠졌다. 마음이 편해졌다. 달콤한 몽블랑 케이크를 한입 먹으니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응…….”

찻잔을 비우자 다시 홍차를 채워준 시리우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안심이 돼서일까 순간 눈물이 나올 뻔했다. 오늘 있었던 일을 시리우스에게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황후를 만나고 나서 아리엘이 열이 난 것과 그 때문에 헬리오스와 진실의 맹세를 하고 온 것까지.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고생하셨습니다.”

시리우스가 공감해주다니!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예의상으로 짓고 있던 웃음이 아니라 순수하게 즐거워서 나오는 웃음. 아리엘의 상태는 아직 그대로였지만 시리우스와 있으니 전부 괜찮을 거라는 믿음이 들었다.

“오늘 연락도 없이 찾아온 건 아리에게 걸린 금제 때문이야. 풀어줄 수 있을까?”

“직접 봐야 알 수 있으니 오늘 밤에 공작가로 찾아가겠습니다.”

“고마워.”

풀 냄새가 섞인 바람이 뺨을 스치고 갔다. 잠시 눈을 감자 등나무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만 들렸다. 평화로웠다. 내가 이토록이나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시리우스 덕분이겠지.

“혼자 끙끙대며 고민하다가 털어놓으니까 한결 가벼워졌어.”

“저를 좀 더 의지하셔도 됩니다.”

“충분히 의지하고 있는데?”

원작 내용을 공유할 수 없었기에 언제나 혼자 해결하려고 했었다. 다만 내 능력이 부족해서 누군가의 도움 없이 해결할 수 없었을 뿐. 그리고 대체로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는 시리우스가 나타났다. 적절한 타이밍에.

‘아무것도 묻지 않아서 더 편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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