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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98화 (98/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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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허스키한 목소리에 의지를 담아 말했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제일 먼저 찾는 사람이 저였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그렇게 되도록 제가 더 노력하겠습니다.”

이미 제일 먼저 찾고 있었으나 차마 그 말을 할 순 없었다. 왠지 무덤을 파는 기분이었기에. 나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바꿨다.

“그러고 보니 너는 왜 마탑주가 된 거 말 안 했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인걸요.”

마탑주가 무슨 동네 개 이름도 아니고 중요하지 않다니. 마탑은 하나의 국가 취급 받을 정도로 독자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세력이었다. 거기다 마탑주는 황제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치! 그게 별일 아니라는 시리우스의 대답에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섭섭한걸.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거지? 나는 소문 같은 거 잘 모르니까. 그렌드윈이나 헬리오스도 알고 있었고. 쌍둥이도 알고 있었으려나.”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수도에 돌았던 시리우스가 저주에 풀렸다는 소문도 마탑에 들어가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서 퍼진 것이었다고 한다. 마리가 내게 ‘오늘 심부름 나갔다가 이황자님 저주가 풀렸다는 이야기로 떠들썩하던데 아가씨도 들으셨어요?’라고 묻지 않았다면 그런 소문이 돌았다는 것도 몰랐겠지. 나는 입술을 살짝 삐죽거렸다.

‘시리우스의 미모 때문에 수도를 떠들썩하게 한 줄 알았지.’

흑발에서 은발로 변한 것뿐이었으나 의외로 그 차이는 컸다. 신성함마저 느껴지는 은발을 한 시리우스는 사실 인간이 아니라 천사라고 해도 믿으리라. 그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다가 그의 머리카락에 시선이 멈췄다. 햇빛이 등나무를 투과해서 세상을 온통 보랏빛으로 물들여 놨기에 그의 은색 머리카락에도 보라색 빛이 내려앉았다. 투명한 연보라색이 예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시리우스가 입을 열었다.

“질투하는 겁니까?”

“응?”

진지한 얼굴. 그의 머리카락을 보느라 넋을 놓았던 데다가 그의 목소리마저 작아서 제대로 못 들었다.

“세르니아 님이 제게 호감을 느낀다고 기대해도 되는 겁니까?”

올곧은 시리우스 눈동자에 당황한 내 모습이 비쳤다.

눈동자가 분홍색이라 이렇게 보이는 걸까, 아니면 내 얼굴이 붉어진 걸까. 나는 어물거리며 뒷걸음쳤다.

“도망가지 않기로 약속하셨잖습니까.”

“아, 아니 이건 도망이 아니고…….”

“그럼 부끄러워서 뒷걸음친 겁니까?”

응! 이라고 해맑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진짜 부끄러워서. 나는 쿵쿵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하지만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빨라지는 맥박과 열이 오르는 얼굴은 숨길 수 없었다.

‘마탑주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주제가 왜 이쪽으로 튄 거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시리우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진 더 알 수 없었다. 장난으로 던진 말인가? 얼굴은 진지한데? 나는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감정을 자각한 지 좀 됐다. 두 번째 관계를 가졌을 때. 그러나 알 수 없는 불안함과 감정을 털어놓을 용기가 부족했기에 어영부영 넘기고 있었다.

“세르니아 님을 곤란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동정이라도 상관없다고 했었는데……. 욕심을 부려서 죄송합니다.”

꼬리가 있었다면 추욱 쳐졌을 것이다. 그만큼 침울해 보였다.

시리우스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았으나 다물린 입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말하면 될 텐데! 나 자신이 답답했다.

“기다려줘!”

“네?”

나는 바보, 멍청이다. 눈을 질끈 감고 외쳤으나 정작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가지 않았다. 기다려 달라니.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수습하려고 했다. 지금이라도 말해야 했다. 동정하지 않는다고. 나도 좋아한다고.

“그, 그러니까…….”

“기다리겠습니다.”

“어?”

“세르니아 님이 어떤 답을 내놓든 저는 기다리겠습니다.”

깔끔한 대답.

한숨이 나왔다. 자신에 대한 한심함에. 나는 기운이 쭉 빠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다린다고 하니, 차분히 내 감정을 정리한 후 대답하자. 무엇 때문에 불안한지 고민하고, 괜찮다는 결론이 나왔을 때 내 감정을 전해도 늦지 않겠지. 모쏠에게 연애란 어려운 것이었으니. 급하게 가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아리엘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벅찼고.

***

시리우스와 약속했던 시간이 됐다. 나는 황궁에 갔다 와서 피곤하다며 시녀들을 물리고 일찍 방으로 들어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곗바늘이 약속했던 시간을 가리키자 방 안에 은은한 빛이 터져 나왔다.

“시리우스 와줘서 고마워.”

“별말씀을요. 그럼 가볼까요?”

나는 당연히 복도로 나갈 거라 예상했는데 그는 창문을 열었다. 그는 싱긋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매끄럽게 올라간 입꼬리가 예쁘다는 생각을 하며 손을 올리자 몸이 둥실 떠올랐다. 벌써 몇 번이나 겪었던 마법이라 놀라지 않았다.

“어느 방이죠?”

“저기, 오른쪽에서 두 번째 방이야.”

아리엘의 방은 가까웠다. 방에 도착해서 창문을 열려고 했으나 시리우스에게 제지당했다. 시리우스가 ‘쉿’ 하고 말하며 검지를 입에 댔다가 창문 안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더니 아리엘을 간호하고 있는 시녀가 있었다.

‘아리의 방에 있는 시녀도 미리 물려뒀어야 했는데. 어떻게 하지. 히프노스를 불러서 재울까.’

혼자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시리우스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아리엘의 안색을 지켜보던 시녀가 쓰러졌다. 무슨 짓을 한 거지? 나는 황급히 창문을 열고 시녀에게 다가가자 시리우스가 작게 속삭였다.

“잠시 재웠습니다.”

“아, 놀랐잖아.”

시녀가 숨을 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안심했다. 시리우스가 뜬금없이 시녀를 죽이진 않겠지만 갑자기 쓰러져서 놀랐다.

‘내가 히프노스를 소환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간단하네.’

잠의 정령의 존재감이 너무 없다고 생각하며 시녀를 똑바로 눕혔다. 푹신한 카펫에 쓰러져서 별다른 상처도 없어 보였다. 시녀의 상태를 확인하고 시리우스의 옆에 섰다. 그는 건조한 눈으로 아리엘을 보고 있었다. 뚫어져라 보던 시리우스는 아리엘을 가리키며 내게 물었다.

“이마에 손을 올려도 되나요?”

“응.”

내가 수락하자 그의 손이 아리엘의 이마에 닿았고, 하얀빛이 나기 시작했다. 이마에서 퍼져나간 은은한 빛이 아리엘의 몸 전체로 퍼졌다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음…….”

시리우스가 아리엘에게 걸려 있는 금제를 ‘짠, 다 풀었습니다.’ 하며 뚝딱 풀어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예상보다 더 어두운 낯빛을 하고 있어서 긴장했다. 초조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깍지를 끼고 속으로 기도했다. 제발 별일 아니기를.

“아리엘에게 걸린 금제는 지금 제가 풀 수 없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 온 말을 듣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믿었던 시리우스마저 풀 수 없는 금제라니.

“그런 표정 짓지 마십시오. 당장 목숨이 위험한 것은 아닙니다. 열이 나는 것도 정신 쪽에 걸린 마법을 흡수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발생한 것뿐, 내일 가라앉고 2, 3일 뒤쯤에 깨어날 겁니다. 금제가 걸린 상태겠지만요.”

“어?”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지? 나는 웃으려고 했다. 입꼬리가 부들거리는 어정쩡한 웃음밖에 지을 수 없었으나 시리우스의 뒷말을 듣고, 무슨 뜻인지 다시 물었다.

“그리고 아리엘에게 걸린 건 단순한 금제가 아닙니다.”

“그럼 저주야?”

시리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저주 아니면 금제라고 생각했는데 둘 다 아니라고? 시리우스는 내 뺨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정확하게 저주와 금제가 섞여 있습니다.”

“섞였다고?!”

몰래 들어왔기 때문에 조용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목소리가 커진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에게 들은 말이 너무 황당했기에.

“금제는 드란에게 걸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저주는 애매하군요. 저주 자체는 아리엘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금제 위에 저주를 덮어쓴 느낌입니다. 아마도 제가 금제를 풀 수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나 보군요. 그래서 복면인이나 드란에게 걸었던 금지 마법에 저주를 섞어서 제가 못 풀도록 해놨습니다.”

“그런……. 다른 방법은 없어?”

시리우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웃으려고 했는데 자꾸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세르니아 님, 진정하세요. 해주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두 마법을 섞었다면 두 마법을 풀어버리면 되니까요. 문제는 저주를 풀 때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네. 방금 말했다시피 제가 금제를 푸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저주를 통해 걸어놨습니다. 자신만 풀 수 있도록 말이죠.”

두 개가 섞였다면 둘 다 풀면 된다니. 간단하고 명쾌한 답이었으나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마법 천재의 여유일까. 어쨌든 조건만 맞춰지면 시리우스가 해주 할 수 있다! 나는 희망을 가지고 물었다.

“어떤 조건이야?”

“…….”

시리우스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미묘한 침묵이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그는 애매한 표정을 짓더니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아리엘에게 저주를 걸었던 사람의 피가 필요합니다.”

“!”

황후의 피! 생각지도 못한 조건이라 나는 입만 벙긋거렸다.

대체 그걸 어떻게 구할 수 있는 거지?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차라리 내가 금제에 걸렸다면 좋았을 텐데. 아직 열이 떨어지지 않아 가쁜 숨을 내쉬는 아리엘의 손을 꼭 잡았다. 왠지 나 때문에 일어난 일 같아서 가슴이 너무 아팠다.

“괜찮습니다. 아리엘에게 걸린 마법은 반드시 풀겠습니다. 그러니 세상이 무너진 표정을 짓지 마십시오.”

“아……. 그렇게나 심각한 표정이었어?”

나는 멋쩍게 웃으며 분위기를 풀려고 했으나 시리우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내 손목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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