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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99화 (99/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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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는 제가 구해오겠습니다. 그러니 괜한 생각하지 마십시오.”

기이한 빛으로 일렁거리는 분홍색 눈동자는 초조함이 묻어 있었다. 역시 시리우스였다. 정말 독심술을 하는 건 아닐까. 아무 말 하지 않았는데 순식간에 내 표정을 읽고 저런 결론을 도출한 것이겠지.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애써 지은 미소가 아니었다.

“아니. 내가 황후를 만나는 게 나아.”

“안 됩니다. 세르니아 님이 위험합니다. 그 여자는 보통 마법사들과 차원이 다릅니다. 정신계열 마법만큼은 저를 웃돌 정도로 강합니다.”

“그래서 내가 가야 해.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시리우스가 가면 가벼운 티타임이 아니라 황궁이 무너질지도. 나는 일부러 장난스러운 어투로 말했으나 뱉은 말은 진심이었다. 대놓고 경계하는 시리우스와 은근히 견제하는 헬리오스와 달리 나는 만만! 나는 검술도 마법도 모르니까 방심할 거야. 그 부분을 노려야 한다. 그리고.

‘공작가를 조종하기 위해 내게 접근했는데 실패해서 아리엘에게 금제를 건 것은 아닐까.’

이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리엘이 나 때문에 휘말린 것일까 봐. 시리우스도 내가 왜 가려는지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피가 필요하다는 것을 듣자마자 결심을 굳혔기에. 내 결정에 시리우스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그는 깊은 동굴의 벽을 긁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섭습니다. 당신을 잃을까 봐 무섭습니다.”

그가 내 손목을 당겼다. 몸에 힘을 빼고 있던 터라 그의 힘에 끌려갔다. 시리우스의 팔은 나를 꽉 끌어안았다. 나를 감쌀 정도로 넓은 품이었으나 고개를 내 목덜미에 묻고 웅얼거리는 모습이 어린아이 같았다.

“이기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이 세르니아 님이 아니라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만약 세르니아 님이 금제에 걸려 쓰러졌다면…… 저는…… 저는 이성을 유지할 자신이 없습니다.”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우는 걸까. 나는 시리우스의 등을 토닥였다. 살짝 움찔거리더니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아프진 않았으나 조금 숨이 막혔다.

“괜찮아. 별일 없을 거야. 거기다 히프노스도 있잖아. 잠의 정령이지만 최상급 정령이니까 도움 될 거고……. 또 무슨 일이 생기면 너도 도와줄 거잖아. 나는 너를 의지하는걸.”

오늘 낮에 했던 말. 어떤 위험에 처하더라도 시리우스가 와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정말…… 세르니아 님에겐 못 당하겠군요.”

시리우스의 팔에 힘이 풀렸다. 몸을 슬쩍 빼서 시리우스의 얼굴을 봤다. 울고 있진 않았다. 그렇다고 웃는 것도 아닌.

“위험할 것 같으면 피에 집착하지 말고, 바로 몸을 빼셔야 합니다.”

“응. 알겠어.”

“약속해주십시오. 무사히 다녀오겠다고.”

“물론이지!”

나는 시리우스의 새끼손가락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이 세계는 약속할 때 새끼손가락 거는 거 없었나? 어릴 때 쌍둥이랑 자주 했던 것 같은데, 생각해보니 내가 쌍둥이에게 가르쳐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렴 어때.

‘파티도 없는 황궁을 3일 연속으로 가게 될 줄은 몰랐는데.’

시리우스는 황후에 대해 조심해야 할 점을 몇 가지 더 알려주고 돌아갔다. 나는 잠들어 있는 시녀를 다시 의자에 앉혀 놓고 방으로 돌아갔다. 내일 황후를 보려면 조금이라도 힘을 아껴야 했으니.

***

6. 행동은 전력으로

미리 편지를 보내지 않고 황후를 찾아가는 것은 안 되지만 그렇다고 편지의 답장을 기다리자니 너무 오래 걸린다. 거기다 아리엘이 금제 후유증으로 침대에 누워있고, 내가 만남을 요청하면 당연히 아리엘 때문이라는 것을 알 테니 거절하겠지. 어떻게 해야 황후를 바로 만날 수 있을지 고민한다고 밤잠을 설쳤더니 늦잠을 잤다.

‘말이 쉽지, 실수라도 황족에게 상처를 입히면 감옥으로 가야 하지 않나?’

티타임 때 실수하는 척하며 포크로 손가락 찌르는 순간 나는 기사들에게 잡히겠지. 황후의 피를 구하기 전에 내 피를 먼저 보겠는데. 내가 한숨을 쉬며 느지막이 침대에서 일어나자 평소보다 들뜬 얼굴을 한 마리가 은 대야를 들고 들어왔다.

“마리, 기분 좋아 보이네. 무슨 즐거운 일이라도 있어?”

“앗! 티 나요? 오늘 공작가에 손님이 오셨잖아요.”

공작의 손님이라니. 여태껏 방문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일과 관련된 신하들이었고, 그의 지인은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공작가의 손님이 방문한 것과 마리가 기분 좋은 게 무슨 관계지?

“손님이 누군지 알아?”

“검성님께서 방문하셨대요! 아가씨도 검성님과 친하시죠? 이따가 인사하러 가실 건가요?”

아하, 그래서 마리가 좋아했구나. 그녀는 옛날부터 기사를 동경해서 기사가 나오는 소설을 추천하곤 했었다. 그중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기사는 살아있는 전설이자, 검의 극에 다다른 검성이었다. 이제 기사는 아니지만. 어쨌든 갑작스러운 방문이었다.

“루카리온 님이 오셨다고? 미리 연락 있었어?”

“네. 어제 공작님에게 편지로 방문 약속을 잡으셨다고 데인 집사님께 들었어요.”

내가 보냈던 편지에는 답도 없었으면서 공작과 독대라니. 마리는 자신이 아는 한에서 자세하게 이야기해 줬다.

‘오히려 잘됐네.’

검성에겐 할 이야기가 많았다. 헬리오스와 있었던 이야기라든가 아리엘에게 걸린 저주라든가. 이왕이면 그에게 도와달라고 하고 싶었다. 혼자 생각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나올지도 모르고. 나는 아침 식사를 포기하고 공작의 집무실로 향하려고 했다.

“아참, 그전에 마리. 종이와 펜 좀 줄래?”

“여기 있습니다.”

나는 마리가 건넨 종이 위에 빠르게 문장을 써 내려갔다.

일단 황후의 피를 어떻게 구하냐 보다는 오늘 황후와 만날 수 있는지가 먼저였으니. 마침표를 찍고 마리에게 다시 종이를 건넸다.

“지금 바로 보내줘. 발 빠른 시종에게 부탁해서.”

“네.”

수취인은 황후가 아니었다. 지금 황후와 나를 만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 헬리오스였다. 수면 아래에서 서로 견제 중일지라도 엄연히 친아들. 헬리오스가 황후에게 티타임을 요청한다면 거절하지 않으리라. 나는 덤으로 끼어들고! 솔직히 이 방법은 한 번밖에 쓸 수 없고, 쓰더라도 뒤에서 엄청나게 욕먹을 방법이었다.

‘황후가 싫다면 면전에서 까일 수 있지만……. 오늘 안으로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야.’

헬리오스가 안 될 수도 있고, 황후가 헬리오스의 요청을 거절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가만히 있는 것보단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오늘 황궁으로 가려고 한 것이다. 짧은 편지를 보내고 다시 집무실로 향했다.

“데인, 좋은 아침이야. 삼촌과 루카리온 님은 안에 계셔?”

“방금 루카리온 님이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들어가도 될까?”

“네. 아가씨가 오시면 안으로 들이라는 명이 있으셨습니다.”

혹시나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나는 가볍게 노크를 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내가 올 거라 생각하고 데인에게 미리 언질 줄 정도면 그들의 대화 주제는 뻔했다. 아마 황후와 아라네아에 관한 것이겠지. 며칠 전 검성의 편지 내용에 따르면 곧 아라네아를 공격할 거라고 했었다. 그 계획과 관련 있는 것이리라.

“들어와라.”

안쪽에서 공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공작과 검성, 공작부인도 함께 있었다. 나는 인사를 하고 공작부인의 옆에 앉았다.

“편지로는 자주 연락했지만 얼굴을 보는 건 오랜만이군. 잘 지냈나?”

“세르니아에게 개인적으로 편지를 보낸 겁니까?”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공작이 날이 선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나는 눈을 데구르르 굴리며 공작의 기색을 살폈다. 공작부인도 찻잔을 내려놓고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검성은 공작의 뾰족한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그래. 테러 사건 때 세르니아의 활약이 컸거든. 그 이후로 종종 편지를 주고받으며 테러 사건의 배후를 쫓고 있지.”

“니아가 테러 사건 수사에 참여했었나요?”

발끈하려던 공작보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공작부인이었다.

부드러운 말투였으나 나를 향한 눈동자에는 걱정스러운 질책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녀의 눈을 살짝 피했다.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던 쌍둥이에겐 숨길 수 없어서 솔직하게 말했으나 공작 부부에겐 말하지 않았었다. 어차피 끝난 일이었고, 검성의 당부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검성은 내게 신경 쓰지 말라고 했으니.’

검성은 공작 부부에게 나와 자주 편지를 주고받은 것처럼 말했으나 사실 최근에 받았던 편지 한 통이 전부였다. 다만 검성의 의도를 알아차렸기에 그 부분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았다.

‘일부러 내가 깊게 관여한 것처럼 말해서 아르덴타인의 협조를 받아 내려는 것이겠지.’

물론 이런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공작은 검성에게 협력했을 것이다. 추측이지만 검성이 굳이 나를 끌어들인 것은 앞일을 위한 떡밥처럼 느껴졌다. 내가 보냈던 답장. 황후가 배후일지도 모른다는 내용을 보고 내가 필요하다는 판단했을지도. 아니 그 가능성이 컸다. 그랬기에 오늘 공작가까지 친히 방문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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